1945년 8월 31일
(略) 중국, 일본, 만주 등 각 처에서 거리에 방황을 하며 형언키 어려운 고초를 겪고 있는 동포들이 수백만이나 되는 형편이므로 이들 곤경에 빠져 있는 동포들을 구원하고자 8月 31日 오후 1시 경성부 壽松町 中東學校 대강당에서 유지 다수 참석하여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에서는 돈이고 물건이고 힘 닿는 대로 유지들의 기부금을 거두기로 되었는데 사무소는 경성부 太平通 전 조선일보사 일층이며 이 회의 역원은 다음과 같다.
委員長 兪億兼
副委員長 蘇完奎 金相毅
總務部長 趙基琹
救恤部長 李容卨
宣傳部長 鄭泰熙
財政部長 金競浩
幹事:李海珪 洪鍾憲 李鳳業 元容毁 崔周容
顧問:金性洙 金活蘭 金炳魯 金觀植 金應珣 曺晩植* 都容浩 李鍾麟 呂運亨 李鍾萬 白寬洙 方應模 宋鎭禹 徐相日 安在鴻 梁柱三尹河英 尹希重 尹洪烈 尹相殷 崔錫模 許憲 洪命憙
評議員:金俊淵 金度演 高凰京 鄭寅普 李淑鍾 劉錫鉉 李相殷 吳漢泳 尹潽善 楊潤植 兪珏卿 崔承萬 黃信德 (<매일신보>, 1945년 09월 02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눈치만 살피던 '실력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른색으로 표시된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사전에 등재된 사람들은 대개 종교(특히 개신교)-교육-여성계 인사들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상류층 사람들이다. 친일파라도 친일을 통해 출세한 것이 아니고 자기 능력과 노력으로 출세한 뒤에 일제의 포섭을 받은 사람들이다. 식민지 엘리트층이다.
식민지 엘리트층의 가장 중요한 지표가 교육 수준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재산도 중요한 지표이고, 교육 수준과 큰 상관관계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문명 전환을 겪고 있던 당시에는 새 문명 체계를 어느 층위에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평상시보다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식민지 시대 초기에 일본 명문 대학에 유학한 사람들은 다른 배경 없이도 20대 나이에 언론사와 학교의 간부로 발탁되어 기자와 교사들의 몇 배 되는 봉급을 받는 일이 예사였다. 서양에 유학한 소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만으로 명사로 대접받았다. 이승만이 인품에 비해 지도자로서 과도한 명성을 누린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 '미국 박사'였다. 서양 유학은 거의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는 것이었다.
식민지 시대 후기가 되어 국내의 중등 교육도 확충되고 일본 거주 조선인도 늘어나면 본인의 능력만으로 유학하는 고학생도 늘어나지만, 초기에는 유학 자체가 상당한 배경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초기에는 유학생 수도 적고 그 대부분이 식민지 특권층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신교회도 일종의 특권층이었다.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284~290쪽에 "국내 인맥의 기원"을 밝힌 절이 있는데, 여기서 이승만이 1899~1904년간 옥중 생활 중 기독교로 끌어들인 수감자 집단이 눈길을 끈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선교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이승만은 1902년 옥중에서 세례를 받고 이후 열성적으로 죄수들에게 전도해 40여 명의 죄수와 심지어 옥리까지 개종시켰다고 한다.
이승만이 인도한 동료 죄수 중에는 이상재-이승인 부자, 유성준(유길준의 동생), 이원긍, 홍재기, 신흥우 등 고위층 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출옥 후 YMCA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그때까지 비교적 낮은 계층에 치중해 있던 조선 기독교회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그리고 대부분이 이승만의 중요한 지지자가 되었다. 또한 식민지 시대 엘리트층 가운데 교회와 연결된 미국 유학파의 초석이 되었다.
이승만이 개종시킨 감방 동료들 중 대부분은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이승만과 접촉을 가졌던 개화파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이 1902~04년의 기간 중 옥중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이승만의 지지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중 이상재(1850~1927년) 같은 사람은 초년에 미국 공사관 근무를 비롯해 고위 관직을 지내고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인데, 개종 이후 20여 세 연하의 이승만을 오히려 지도자로 받드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극진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이 그룹의 개종에 새로운 정체성 모색의 뜻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과 대한제국 양쪽에 환멸을 느낀 독립협회의 민족주의자들이 제3의 길을 찾은 것이라고. 국가가 국가 노릇을 못하는 상황에서 침략자에게 투항하지 않는 길로 기독교를 택한 것이 아닐까?
3·1운동에 대해 이 그룹 인사들이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개신교회가 3·1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은 데 비해 이 그룹과 연결된 교회 엘리트층은 참여를 거부하거나 드러나지 않는 위치를 지켰다. 민족 정체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더 중시한 이 그룹의 성향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두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예민하게 느끼지 않아서 만세 운동에 전심전력으로 임한 낮은 신분의 교인들과 차이가 있었을 것 같다.
유억겸이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이하 '구제회') 위원장을 맡은 것을 보며 이 그룹 생각이 난다. 연희전문 교장이던 유억겸(1895~1947년)은 유길준의 아들로서 옥중 개종 그룹 멤버였던 유성준의 조카다. 이 그룹을 이어받은 기독교파 엘리트층의 대표적 인사였다. 부위원장인 경성정총대연합회 위원장 소완규는 약간의 친일 행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성망을 유지하고 있던 변호사였다.
확고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면서 대중의 반감을 피할 만한 인물들을 앞세워 인도적으로 타당성 있는 사업을 내세운 것이 이 '구제회'였다. 당시 서울에는 일본과 중국에서 귀환하는 동포들의 수용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들을 '구제'하는 것도 중요한 인도적 과제였고, 또한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서 잠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도움을 줄 '실력'을 가진 집단이 존재를 드러낸 첫 움직임이 이 '구제회'였다.
고문단을 비롯한 '구제회' 인적 구성을 보면 상당한 흠을 가진 친일파 집단에서 투철한 민족주의자까지 망라되어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실력을 가진 집단이 이런 명분 있는 사업을 통해 경미한 친일 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면서 민족주의의 길에 합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호응했을 것이다. 한편, 실력자 집단은 자기네 실력을 과시하면서 가급적 유리한 타협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민족주의자와 실력자 집단의 타협은 동상이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타협의 모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실력자 집단은 민족 정체성보다 엘리트의 정체성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엘리트로서의 특권이 어느 정도 허용된다면 민족주의와 타협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 특권을 철저히 부정하는 좌익이 그들에게는 기피 대상이었고, 좌익의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민족주의와 타협할 동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민족주의와 타협해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서 좌익과 경쟁할 것을 거부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며칠 후 그들이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건준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서는 상황에서 뭘 믿고 그렇게 나올 수 있었는지 잘 살펴봐야겠다. (☞바로 가기 :필자의 블로그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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