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부터 한 부 한 부씩 총 일곱 부의 최종 원고를 받고 6월 중순 서문을 받았는데, "부제에 있는 '필로소페인'은…" 하는 부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번 책은 김용석의 전작 <철학 정원 : 고전으로 철학하기>(한겨레출판 펴냄)에 이어 <철학 광장 : 대중문화와 철학하기>(한겨레출판 펴냄)로 이미 제목이 정해진 상태였다. 대중문화'로' 철학하기가 아닌 대중문화'와' 철학하기로 정한 것은 대중문화를 철학의 도구로 삼는 게 아니라 벗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도에서였다.
저자에겐 <철학 정원>의 부제에 쓰인 '으로'라는 조사가 계속 눈에 밟히는 것 같았다. 감탄했다. '개념의 예술가'라는 별명의 이유를 알 듯했다. 실제로 '로'와 '와'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큰 강이 있었고, 이를 예민한 촉수로 짚어낸 것이다. 이 부분에 방점을 두고 작업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철학 광장 : 대중문화와 필로소페인>(김용석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
대중문화'로' 철학하기가 아닌 대중문화'와' 철학하기를 따라가기에도 벅찬데, '필로소페인'이라니! 책의 서문에도 설명하고 있듯, 필로소페인을 등장시킨 이유는 '철학하기'라는 말이 학습의 의미를 강하게 품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이 아닌 '철학하기'를 이야기해왔지만 이 역시 '철학'의 자장 안에 머물고 있기에 '필로소페인'이라는 낯선 단어로 충격을 주고 싶었을 테다. 더불어 고대 그리스어인 필로소페인은 '광장'과 잘 어울리는 말이고, 제목과 부제에서 '철학'이 반복되는 점도 해결되니 저자에게는 더더욱 매력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결국 '필로소페인'이었다.
원고를 읽어가면서 여러 구절에서 무릎을 쳤다. 모두가 눈길을 끌기 위해, 시각을 집중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시각 활동의 과잉화' 시대에 오히려 '시각의 분산화'를 통해 관객에게 편안함을 선사한 <난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첫 꼭지부터, 직립성이 인간에게 부여한 '터전을 벗어나고자하는 특성'과 뛰어난 직립성을 가진 <아바타> 나비 족의 자연 친화성 사이의 균열을 짚어내는 마지막 꼭지까지 새로운 시각과 이를 지탱하는 탄탄한 논리에 철학의 참맛을 느낄 수 있었다. '대중문화를 통해 철학을 공부하기'가 아닌 '대중문화와 필로소페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고, 결국 저자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책이 나왔다.
책을 알리기 위해서는 차별점을 잘 소개해야 한다. 영화로 철학하기 같은 콘셉트로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은 이미 많다. 이 책은 영화나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만화, 방송, 광고, 특히 공연이나 문자 문화 전반에까지 그 폭을 넓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 철학하는 책이 아니라, '와' 철학하는 책이다. 또 '철학하기'의 함정을 지적하고 '필로소페인'을 제안하는 책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묻는다. 기존의 대중문화로 철학하는 책들과 무엇이 다르냐고. 마케터는 홍보한다. 대중문화로 철학하는 새 책이 나왔다고.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 나는 철학과를 나왔다. 아니, 철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굳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학부제 시절 입학해서 2학년을 마치고 전공을 선택했으며, 따라서 전공 수업은 2년만 듣고 졸업했음을 부연하고 싶어서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지만, 철학과 수업을 2년만 들은 나는 철학과 나온 티를 전혀 낼 수 없다는 게 내 논리인데, 뭐 내가 아무리 구분을 해도 듣는 이들은 '철학과 나왔다'고 생각하더라. 쩝.
사실 철학은 어렵다. 피곤하다. 상식과 싸우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딴죽을 걸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로 철학하기'라 하면 편한데 굳이 '대중문화와 필로소페인'을 고집하고, 그냥 '철학과 나왔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철학 전공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 스스로 귀찮은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의 아버지라는 소크라테스 역시 아테네를 군마(軍馬)에 비유하면서 자기를 그 군마가 살찌지 않게 돕는 등애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꾸 귀찮게 하는 것. 불편하게 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철학의 할 일인지도 모른다.
"철학은 상식의 권력이 무시하는 대안들을 보존하고 선택하며 실천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엉뚱하고 힘만 드는 실속 없는 일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어렵다. 철학적 사유도 어렵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도 어렵다. 쉬운 철학은 없다. 흥미롭고 재미있으며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철학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기 있게 실천하는 철학이 있다." (238쪽)
다시 읽어보니 그 울림에 털들이 곤두선다. 위로가 되고, 힘이 난다. "대중문화를 통해 철학을 배우는 쉽고 재미있는 책이니까 많이들 사주세요"라고 말할 뻔 했는데,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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