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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옷 걸친다고 원숭이가 신이 되나?

[철학자의 서재]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

동물은 되는데 원숭이는 안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인간이면 누구나 숙명처럼 이 물음에 대해 고민하게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닐까? 그러기에 위대한 사상가, 철학자, 성직자, 문인들치고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전해질 수 있는 자신의 해답을 만들어내고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이가 없는 듯하다.

철학을 보자면, 이 물음에 대한 성찰은 철학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한 요소로서 확고한 지위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철학사에서는 정신, 사유, 의식 등의 표현으로 인간의 징표 혹은 본질적 속성을 규정하는 관점이 주된 흐름을 형성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 없는 원숭이>(김석희 옮김, 문예춘추사 펴냄)는 1967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니까 꽤나 오래 전에 나온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의 우리말 첫 번역서가 1991년에 나왔다. 당시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자의 유물론적 인간론, 그리고 막스 셸러나 아르놀트 겔렌의 '철학적 인간학' 등에 관한 버거운 책들과 한창 씨름하고 있던 차에 '동물학적 인간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털 없는 원숭이>는 흥미를 끌고 머리를 식히기에 더 없이 좋은 책이었다.

하룻밤하고 한나절, 단숨에 읽었다. 우연하게 이루어진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여운은 오래갔다. 이후 <털 없는 원숭이>와 함께 모리스의 '인간 동물' 연구 3부작이라고 불리는 <인간 동물원>, <인간의 친밀 행동>을 비롯하여 <접촉>, <육안으로 바라본 털 없는 원숭이> 등을 애써가며 구해서 읽었다.

그가 수많은 동물학 책들을 통해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결국에는 '인간 동물'이기 때문에 그에게 동물학은 곧 인류학이며, 그는 동물학자이면서 동시에 인류학자인 셈이다. 모리스의 책들은 하나같이 신선하고 재미있고 때로는 충격적인 내용들이 많아서 대학 강의 중에 짭짤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야기 소재를 제공해주었다.

모리스가 직접 출연한 BBC 다큐멘터리가 국내 텔레비전 위성방송에서 <영원한 유전자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된 적이 있는데, 방영 테이프를 구해 매학기 학생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 테이프는 지금은 너덜너덜해지고 화질이 나빠 사용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하는 오랫동안 강력하게 지속되어 온 정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느 누구도 인간이 동물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에서 언제나 관심사는 '종차'(種差)였다. '최근류'(最近類)가 동물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분명한 것이어서 주목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니 주목한다는 것은 인간성을 동물성으로부터 떼어놓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에 반하는 위험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모리스는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인간을 '털 없는 원숭이'라고 부른다. 동물학자인 그에게 인간의 최근류로 동물보다는 원숭이가 훨씬 적합한 말일 터인데, 원숭이를 수식하는 말이 무엇이든 그러한 규정은 용납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최근류를 동물로 제시할 때와는 달리, 동물학적 사실에 입각하여 그것을 원숭이로 대신할 때에는 당연히 인간성이 아니라 동물성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털 없는 원숭이'라는 호칭은 동물성과 인간성을 분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욕적이고 염세주의적인 호칭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다. "그것이 모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동물 전체에 대한 모욕"이며, 그것이 염세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이로운 "한 포유류의 놀라운 성공담에 경탄하지 않겠다는 태도"일 뿐이다.

그에게 털 없는 원숭이라는 표현은 조금도 모욕적이거나 냉소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다른 영장류 원숭이와 나란히 놓고 보면 그에게 '털 없는 원숭이'는 동물학자로서의 균형감과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사냥하는 원숭이가 등장하다

▲ <털 없는 우너숭이>(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문예춘추사 펴냄). ⓒ문예춘추사
거의 20여 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느낌을 떠올리면서, 같은 번역자에 의해 2006년에 새로 번역되어 나온 <털 없는 원숭이>를 최근에 다시 보았다. 다시 보아도 재미가 있다.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193종의 원숭이와 유인원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192종은 온 몸이 털로 덮여 있고, 단 한 가지 별종이 있으니, 이른바 '호모사피엔스'라고 자처하는 털 없는 원숭이가 그것이다. 지구상에서 유래가 없을 만큼 대성공을 거둔 이 별종은 보다 고상한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기본적인 욕구를 무시하는 데에도 똑같은 양의 시간을 소비한다. 그는 모든 영장류 중에서 가장 큰 두뇌를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두뇌만이 아니라 성기도 가장 크다는 사실은 애써 감추면서 이 영광을 힘센 고릴라에게 떠넘기려고 한다."

우리 털 없는 원숭이는 왜 털이 없게 되었는가? 그것은 수많은 원숭이와 유인원 중에서 우리 조상만이 숲속에서 과일이나 열매나 따먹던 원숭이에서 갑작스럽게 사냥하는 원숭이가 되었다는 사실과 긴밀히 관련이 있다. 사냥하는 원숭이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고기를 먹는 영장류로서 등장했다는 것, 즉 우리의 조상이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돌연히 초식동물에서 육식동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냥하는 원숭이로의 극적인 진화가 가져온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모리스의 동물학적 인간론의 핵심 줄거리가 된다.

모리스가 <털 없는 원숭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하고, 장황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두 단어만 말한다면, 하나는 사냥이고 다른 하나는 짝짓기, 즉 성적 행위이다. 그리고 모리스는 털 없는 원숭이의 복잡한 성적 행동의 기원 또한 사냥하는 원숭이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에게 바로 사냥이라는 행위는 우리 털 없는 원숭이의 다양한 습성을 설명해주는 가장 중요한 준거가 된다. 물론 이러한 설명에는 모리스 자신의 인상적인 동물학적 상상력이 동원된다. 사냥과 성 행위를 중심으로 털 없는 원숭이의 유전학적, 문화적 진보를 훑어보자.

우선 사냥은 털 없는 원숭이의 신체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미 사냥에 익숙해진 많은 육식동물에 비해 갑자기 사냥터에 나서게 된 이 원숭이의 신체 조건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냥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직립해야 했고, 사냥 활동에서 높아진 체온을 낮추기 위해 털이 없도록 진화해야 했다. 그리고 털을 없애는 대신 체온 조절용으로 땀구멍의 수를 늘리고 피하지방층을 키웠다.

사냥은 우수한 두뇌를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어린 시절을 더 연장해야 했다. 암컷은 집에 남아 새끼를 돌보아야 했고, 사냥을 하는 데는 수컷들끼리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처럼 사냥은 신체 구조나 생활방식 전반에 걸쳐 털 없는 원숭이의 진화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사냥 활동이 어떻게 털 없는 원숭이의 세계에 한 쌍의 암수 관계를 정착시켰는지를 좀 더 살펴보자. 털 없는 원숭이의 수컷은 암컷을 놓아두고 사냥하러 떠날 때, 암컷이 그에게 정절을 지키리라 확신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암컷은 한 마리의 수컷하고만 짝을 짓는 성향을 가져야 했다.

또 수컷은 사냥에서 다른 수컷들의 협력을 받으려면, 그들에게도 일정한 성적 권리를 인정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수컷도 마찬가지로 한 마리의 암컷하고만 짝을 짓는 강력한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 이제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기에 암컷을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은 전보다 훨씬 위험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새끼에 대한 긴 양육의 부담은 암컷과 분담해야 했다. 이런 점들이 강력한 한 쌍의 암수 관계를 형성해야 할 좋은 이유들이 되었다. 사냥하는 원숭이의 습성은 우리 털 없는 원숭이의 행동양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냥하는' 원숭이가 '일하는' 원숭이로, '사냥터'가 '회사로', '소굴'은 '가정'으로, '한 쌍의 암수 관계'는 '결혼'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달라진 것이 없다.

성적 자극과 성적 억압

익히 알려진 대로 털 없는 원숭이는 영장류 가운데 가장 성적인 동물이다. 특별하게 발달된 성적인 행위는 한 쌍의 암수 관계를 유지, 형성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이제 털 없는 원숭이는 직립 보행을 하며, 사교적 활동을 할 때는 정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적 신호와 성감대는 신체 앞부분에 집중하게 되었고, 정상 체위는 생물학적으로 기본적인 성교자세가 되었다.

털 없는 피부가 암컷의 젖가슴을 더욱 돋보이도록 촉진했을 것인데, 이 젖가슴은 암컷의 반구형 엉덩이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다. 젖가슴은 수유 기관이라기보다는 성적 장치의 기능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젖가슴과 마찬가지로 입술도 암컷의 신체가 자기모방의 방식으로 생식기를 흉내 낸 것이다. 어쨌든 한 쌍의 암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성욕을 자극하고 쾌감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의 진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영장류 암컷 가운데 오직 인간 여자만이 오르가슴을 느끼는데, 이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모리스에 따르면 일견 모순되어 보이지만 성적 신호를 줄이거나 성적 행위를 방해하는 방향으로의 진화도 동시에 필요하였다. 암컷이 처녀막을 갖는 것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특징인데, 그것은 "암컷이 최초의 육체적 고통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수컷에게 강한 애정을 갖게 된 뒤에야 마지막 선을 넘을 것을 요구하는 장치"이다.

한편으로 부부를 결합시키기 위해 관능을 높여야 했다면, 부부가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제3자를 자극하지 않도록 관능을 억제하는 조치도 필요했다. 다른 영장류와 달리 털 없는 원숭이는 직립 자세 때문에 성기를 드러내 보이지 않고는 다른 털 없는 원숭이에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제3자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성기 주위를 간단한 나뭇잎으로 가릴 필요가 있었다. 모리스는 이 나뭇잎 가리개야말로 최초의 문화적 발달이었을 것으로 해석한다. 나아가 젖가슴이나 입술처럼 2차적인 성적 신호를 약화시키는 가리개도 등장하였다.

성적 행위에 대한 이런 통제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러한 통제는 많은 경우에 충동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억압할 뿐이다. 털 없는 원숭이의 생물학적 본성은 끊임없이 그런 제약에 반란을 일으킨다. 여자는 젖가슴을 가리지만, 브래지어로 젖가슴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입술을 가리고 웃지만 입술의 성적 신호를 강화하기 위해 입술연지를 사용한다.

모리스에 따르면, 대부분의 경우 제3자에 대한 인위적 성적 신호는 위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필요하기도 하다. 그것은 직접적인 성행위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다른 구성원들의 적대감을 줄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화적 제약이나 통제를 충실히 지키면 "나는 임자 있는 몸이다"(당신과 성교할 수 없다)는 분명한 신호를 주면서 '한 쌍의 남녀 관계'를 지켜 낼 것이고, 다양한 인위적 성적 신호는 "그렇지만 나는 섹시하다"는 또 다른 신호를 줌으로써 자신에 대한 공격을 억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재치 있는 번역을 그대로 옮기면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전략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다수의 아이를 낳고 남자가 다른 남자들과 사냥하러 가는 상황에서 효과를 발휘하도록 고안된 것이고, 자녀수가 적고 여자들도 회사에서의 '사냥 활동'에 가담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보자면 먹혀들기 어렵게 되고 있다. 즉 '한 쌍의 남녀 관계'가 한 번의 외도로도 깨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도보다는 덜 해로운 대용품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넓은 의미의 엿보기 취미이다. TV, 영화, 연극, 소설이 이 취미를 충족시키는 일에 관여한다. 이런 매체를 통해 남의 성행위를 보고, 성행위에 대한 글을 읽고, 성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렇게 하여 엿보기 취미를 충족시키는 거대한 산업이 형성되었다. 매춘도 엿보기 취미와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비단옷을 걸쳐도 원숭이는 원숭이

모리스는 동물학자이고, 털 없는 원숭이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그가 털 없는 원숭이를 연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을 인식하고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도에서 저 호칭을 고집한다. 털 없는 원숭이는 불과 50만 년 사이에 불을 피우고 도끼로 동물을 잡을 줄 아는 동물에서 우주선을 만들 줄 아는 동물로 극적인 진보를 이루었다.

그러나 모리스는 도끼 시대에서 우주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성적 충동을 비롯한 생물학적 습성은 기본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고 거듭해서 강조한다.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현대 문명이 아무리 휘황찬란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생물학적 법칙에 순응하는 동물일 뿐이다. 아무리 고운 "비단옷을 입었어도 원숭이는 원숭이"라는 것이다.

이 동물학자이자 인류학자 역시 우리 인간이 참으로 비범하고 성공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성에 대한 찬사는 수없이 제시되어 왔다. 이에 반해 "우리의 비천한 기원"을 떠올리게 하는 접근들은 억압받아 왔다. 그러기에 그가 평생에 걸쳐 진행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철저하고도 집요한 동물학적 접근은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게다가 신선한 방식으로 재미있고 쉽게 풀어가는 그의 이야기 솜씨는 아주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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