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8일
좌익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6일 새벽 조선공산당(장안파)이 결성된 데 이어 오늘은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일찍 시작되었다. 코민테른이 만들어지기도 전인 1918년 소련 연해주의 조선인 망명자 중심으로 이동휘가 세운 한인사회당은 1922년까지 7000여 명의 당원을 모았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인민대회에서 조선인 대표단이 전체 참가자의 3분의 1을 점했다.
국내에서도 여러 갈래 공산주의 운동이 펼쳐지다가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리에 따라 통합된 조선공산당이 1925년 4월 17일 결성되고 그 이튿날 고려공산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과 이듬해 6월, 그리고 1928년 2월의 거듭된 대규모 검거로 조선공산당은 붕괴와 재건을 거듭하다가 1928년 7월의 4차 검거 이후 활동이 중단되었다.
1928년 이후 국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종래의 활동가들은 지하로 잠복하거나 해외로 망명하였다.
해외로 망명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다. 만주에서는 조선공산당 지부 명목으로 중국공산당과 별도의 조직 활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1928년 12월 이후 중국공산당에 흡수되었다. 당시 만주의 중국인들 사이에는 공산주의 운동이 아직 활발하지 않아서 그 지역 공산당원의 90% 이상을 조선인이 점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리고 1933~36년간의 민생단 사건으로 조선인 정예 당원들이 무더기로 숙청당하기도 했다.
해외에 한국인의 공산주의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으로 인해 국내에서도 조직적 지하 활동이 불가능했다. "지하로 잠복"했다고는 하지만 조직 활동이 없는 이상 공산주의 운동을 포기한 셈이다.
공산주의 운동은 사라졌지만 좌익 사조는 자라났다. 1930년대 들어 일본 정치가 군국주의에 빠지면서 그 모순을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에서 찾는 일본 지식층의 의식화가 조선에 전파되었다. 극우파의 눈에 다른 사람이 모두 좌파로 보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1930년대 일제가 좌익으로 규정한 범위에는 헨리 조지나 소스타인 베블런 같은 제도학파도 들어갔을 것이다.
민족주의 입장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차츰 일본의 군국주의도 아울러 비판하게 되었고, 일제가 그들을 '좌익'으로 몰아붙일 때 그들도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공산혁명을 꿈꾸지는 않으면서도 사회주의적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나 일제 치하의 '좌익'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정권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넓은 범위의 비판자들이 '진보'의 이름을 공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조직 활동을 하는 공산주의자는 극소수였다. 그들은 다른 좌익분자들에게 '볼셰비키'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볼셰비키는 1903년 8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2차 대회에서 당원 정예화를 주장하는 레닌 일파가 문호 개방을 주장하는 마르토프 일파의 '멘셰비키'와 결별하면서 얻은 이름이다. 볼셰비키는 '다수파'란 뜻인데, 팽팽한 대결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거머쥔 레닌 일파가 승리를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스탈린이 1952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다수파가 아니다. 우리가 당의 모두다!" 선언하면서 볼셰비키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당원 정예화는 민주집권제(democratic centralism)의 초석이었다. "토론은 자유, 행동은 통일"이라는 민주집권제는 레닌주의의 핵심이었고 코민테른의 중심 원리가 되었다. 스탈린이 볼셰비즘을 배신했다는 트로츠키의 비판은 "토론은 자유" 없이 "행동은 통일"만 요구한다는 데 초점이 있었다.
소련과 코민테른을 지배한 볼셰비즘은 다른 공산주의 운동에 비해 외부와의 협력을 최소화하고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경향이었다. 따라서 코민테른의 지도에 따른 각국 공산주의 운동은 폐쇄적인 조직성을 가졌다. 이 폐쇄성 덕분에 일본 군국주의와 같은 불리한 환경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고, 군국주의가 패퇴하는 시점에서는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는 '좌익'을 규합, 동원하는 잠재력을 가지게 되었다.
코민테른의 정통 공산주의는 민족주의를 부정했다. 전술적 제휴는 가능한 상대이지만, 공산당 내부의 분파 위험을 극도로 꺼렸다. 만주에서 민생단 사건의 참극도 이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형성된 조선의 좌익은 민족주의를 널리 공유했다. 공산당 조직 활동을 해 온 '볼셰비키' 중에도 투철한 민족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관계,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와 함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도 해방 후 조선의 진로를 결정하는 하나의 중요한 변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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