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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과 언어 사이, 한 문제적 남자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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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과 언어 사이, 한 문제적 남자의 초상

[편집자, 내 책을 말하다] 다니엘 파울 슈레버의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1세기 전, 프로이트, 라캉, 들뢰즈 등 세기적 이론가에게 학문적 성찰과 영감을 제공했던 한 광인이 있었다. 바로 다니엘 파울 슈레버.

1842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아버지 모리츠 슈레버와 어머니 파울리네 슈레버의 2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판사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가던 중 드레스덴 고등법원 판사회 의장직을 맡은 직후인 1893년에 발병한다. 독일제국 법관으로서는 거의 최고의 지위가 주어진, 인생의 최고 정점이라 할 만한 시기였다.

직위에 대한 부담감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발병 이유였지만, 프로이트와 라캉을 위시한 정신 분석학자는 좀 더 심도 있는 분석을 시도했다. 당대 독일의 계몽주의적 교육학자로서 최고 명성을 날리던 아버지의 혹독한 교육이 슈레버에게 오이디푸스적 외상을 입혔고, 그로써 어머니와의 상상적 동일화를 욕망케 했으며, 그러나 애초 불가능한 그것 때문에 결국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상징계로 편입되지 못한, 그래서 '법'에 붙들린, 그러나 '법' 사이로 미끄러져나가는, 정신병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 다니엘 파울 슈레버. ⓒ자음과모음
수차례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 의학의 도움을 입어 '치유'를 시도했던 슈레버는 결국 자신을 치료하던 의사를 자신의 '영혼 살해자'로 몰기에 이른다. 또 자신의 신경이 신이라는 거대한 신경과 연결되어 있고, 과도한 흥분으로 검게 탄 인간의 신경으로 '세계 질서'에 위협을 느낀 신이 조만간 세계를 멸망시키고 자신을 여자로 변신시켜 신인류를 탄생시킬 것인데, 병상을 둘러싼 의사와 간병인 등 '일시적으로 급조된 인간들'이 자신의 영혼을 살해하려 한다는 등, 망상증에 시달린다.

하지만 슈레버는 자신의 '망상'이 망상이 아님을 해명하기 위해 책을 한 권 쓴다, 간절하게. 그것이 바로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김남시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이다. 그는 자신의 이 기록이 아직까지 논의되지 않았던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고 그로 인해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서 상당한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역설했다. 오늘날에 와 평가하자면 그의 예언은 어느 정도 적중한 셈이다.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은 출판되기까지 가족과 지인의 숱한 반대와 삭제 및 검열을 당해야 했는데, 저 세기적 지성들은 한결 같이 입을 모른다, 바로 이 책 한 권이 그를 구원했다고…….

"신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영혼과 유사하다. 그러나 인간 육체 내의 신경이 제한된 수로만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신의 신경은 무한하거나 영원하다. 신의 신경은 창조된 세계의 어떤 사물로든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능력에서 그 신경들은 광선(Strahlen)이라고 불리며, 바로 여기에 신의 창조의 본질이 있다." (25쪽)

"한 인간에게, 그것도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간―나는 아무런 자만심도 없이 나 자신이 그러한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데―에게, 이성을 상실하고 정신박약으로 몰락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278쪽)

이 책 전반을 압도하는 단어를 두 가지로 꼽으라 한다면, 위 인용문에서 드러나듯, '신'과 '이성(의지)'을 꼽고 싶다. 아버지의 이름이 부재하는 자리, 그래서 어머니조차 파괴되고 마는 그 (정신) 분열의 자리에서 슈레버는 신을 호명한다. 아니 신이 자신을 호명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망상(의 구조와 원인)을 그는 법학자로서 숙련된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로 표현해낸다. 세기적 지성들이 주목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분열의 자리에서 그가 '언어(행위)'를 붙듦으로써 상징계(아버지의 이름)를 회복하려 시도한다는 것. 설령 그 내용이 망상일지언정 자신의 무너진 (정신) 세계를 스스로 다시 세우려는 (언어적) 형식을 통해 그는 치유되기 시작한다는 것.

홀연히 과거에서 날아온 이 책 한 권을 읽어나가는 동안, 우리는 아주 자주 스스로의 얼굴을 마주치게 된다. 미쳤지만 지극히 논리적이고 그래서 압도되는 이 광인의 자서전은 자기 치유를 스스로 시도할 수밖에 없는 자의 처절한 실존, (논리를 넘어서는) 삶, 실재, (칸트식) 물자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기념비가 된다. 이 책의 스토리가 아니라 이 책의 존재 형식 자체를 주목하는 이는 우리의 언어와 정신과 세계(가 갖는 관계)를 제3의 눈으로 통찰하게 될 것이다.

▲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다니엘 파울 슈레버 지음, 김남시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끝으로, 100여 년 전 이 책을 쓴 다니엘 파울 슈레버도 놀라운 인물이지만, 2년여의 번역 기간을 거쳐 한국 독자에게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을 안겨준 역자 김남시(서울대학교 미학과)도 놀랍다. 팔딱거리는 언어들, 상처의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슈레버의 문장을 고스란히 체화해서 옮겼다. 그래서 독일판본과 한국판본 간에 벌어진 100여 년의 간극이 결코 간극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또 한 사람의 슈레버가 섬망 증상으로 밤새도록 눈만 껌벅거리며 앉아 있다가도 불현듯 펜을 들어 자신의 깊고 어두운 심연을 써내려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 우리 모두에게 깃든 광기, 분열, 고통은 때때로 껌벅껌벅 스스로를 발화(發話, 發火)한다.

자음과모음이 엄선해서 번역 소개하는 책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터이지만, 이 책은 그 첫 자락에서 늘 어떤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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