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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해피엔딩? 혼자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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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해피엔딩? 혼자가 아니니까!

[편집자, 내 책을 말하다] 게세코 폰 뤼프케의 <두려움 없는 미래>

머리는 지끈거리고, 가슴에서는 방망이질을 해댔다. 내가 뭘 잘못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그러다가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이건 아니잖아. 안 되는 거잖아'라며 나를 달래도 보았다. 오늘이 벌써 10월 하고도 20일이 아니던가?

2009년 10월 20일, 시간은 밤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 시각 한 손에는 독일어 원서, <미래는 위기로부터 온다(Zukunft entsteht aus Krise)>를 들고, 다른 한 손엔 "꼭 출판하라!"는 강추 메시지를 담은 검토자의 리뷰 원고를 들고,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며 머리를 책상에 콩콩 박고 있다.

제목처럼 이 책은 이른바 '미래 예측서'다. 미래 예측서는 연말이나, 늦어도 연초에는 나와 줘야 한다. 그건 이 바닥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 릴리스 타이밍이 중요한 책들을 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민이었다. 절대 시간이 부족하니까.

얼핏 보아도 번역 분량이 만만치 않았다. 번역을 맡기는 일부터 막막한데 편집은 또 누가 맡아주기나 할까? 게다가 작업이 시작되고 마무리할 때가 되면 연말인데, 1년 내내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어왔던 온갖 약속과 모임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시기가 아닌가. 디자인은 또 어떨까. 그거야 말로 시간이 필요한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이 아닌가? 나의 고민은 아주 합리적인 결론을 향해 가고 있었다. 톰 크루즈의 명언처럼, 미션 임파서블!, 그렇게 책을 덮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밤을 지내면 새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다음 날 아침, 다시 그 책(지난밤에 포기하겠다는 메일을 보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었겠지만)을 집어 들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판단을 꼭 내가 해야 하는 것인가. 이 녀석의 운명을 한번 테스트해보자. 그러고는 차례로 전화를 돌렸다. 번역자 후보들에게, 또 편집자 후보에게, 디자이너에게.

우선 나에게 고민을 안겨준 검토자에게 연락을 했더니, 도전해 보겠다고 한다. 자기를 무슨 톰 크루즈나 A특공대쯤으로 아는지, 아니 기꺼이 번역하고 싶다고 한다. '두뇌 상태를 스캐닝 해봐야 하나?'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인사를 던졌다. 물론 혼자서는 절대 시간이 부족하니 공동 번역자를 찾아달란다.

공동 번역자 후보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일을 하나 끝내고 쉬고 있다며 원고를 한번 보자고 한다. '이건 또 머지?' 이번엔 편집자 후보인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고 당장 달려온 선배는 이건 말도 안 되는 무모한 도전이라며 합리적으로 나를 말려주기는커녕, 어디 한번 해보자고 한다. 뭔가 크게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 <두려움 없는 미래>(게세코 폰 뤼프케 지음, 박승억·박병화 옮김, 프로네시스 펴냄). ⓒ프로네시스
그렇게 여러 사람이 날밤에 날밤을 거듭해, 마침내 쌍코피를 터뜨리고 나서야 책 한 권이 세상 빛을 보았다. 게세코 폰 뤼프케의 <두려움 없는 미래>(박승억·박병화 옮김, 프로네시스 펴냄).

도대체 나는 왜 이 책에 대책 없이 빠져들었을까? 아마도 첫 번째 이유는 시의성을 갖고 있는 이 녀석의 기구한 운명 탓이다.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로 번진 세계적 위기는 비단 경제 위기만은 아니었다. 위기는 언제나 있어왔지만, 이번에 느끼는 불안감의 정체는 '로드 아웃!', 즉 길이 끝나 버렸으니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다른 길을 찾거나 어쨌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이때 '위기'를 좀 더 거시적 측면에서 바라보고, 세계관을 한번 바꾸어 보자는 제안에 공감했다. 세계관을 바꾸는 순간 우리 눈에 새로운 길이, 그것도 다양한 길이 보이게 될 테니까. 두 번째 이유는 어쩌면 이 책이 나를 위한 책이라는 일종의 계시 같은 감정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나, 또 편집자로서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그런 책. 믿거나 말거나.

치밀하게 짜인 불가능한 미션의 시간 단위 계획표를 받은 작업 참여자들은 모두들 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경솔함을 인정하며 뒤늦게 이성적으로 돌변했지만, 이미 계획표를 던지기 전 저작권사의 계약 승인을 받은 상태라 나로선 이젠 정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집에다는 앞으로 석 달간 나를 찾지 말라고 말했다. 송년 모임에도 크리스마스에도 날 찾지 말라고 했다.

아무튼 그렇게 작업이 시작되자 시간은 총알처럼 흘렀고, 작업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갔다. 통화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허스키해졌고, 어떤 이는 송년 모임에 나가서 딱 한 잔만 하고 오면 안 되냐며 애원했다. 그런데 그 중 무엇보다 강력했던 태클은 바로 날씨였다. 혹한과 눈. 최근 몇 년 동안 그렇게 많은 눈을 본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가뜩이나 연말연시라 부르기 어려운 퀵 서비스와 택배 이용이 눈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도대체 내가 받았던 그 계시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착각?!

퀵도 택배도 우리를 버렸지만, 나와 작업자들은 눈길을 헤치며 만나 서로의 원고를 주고받았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사는 디자이너도 40분을 넘게 걸어와서 작업을 넘겨주고 갔다. 전화로, 메일로, 택배로 작업을 주고받으며 책 한 권을 만들도록 얼굴 한번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우린 그야말로 눈보라를 헤치며 서로 만나 작업 내용들을 확인하고 다음 일을 주고받았다.

그렇게도 눈이 내리고 날씨가 궂더니, 어느새 해가 바뀌었고, 또 그 사이 새로 태어날 책의 제목도, 표지도 정해지고, 도무지 끝이 안 보이던 작업들이 하나하나 각을 잡아갔다. 인쇄를 하기로 되어있는 날, 또 갑자기 내린 폭설에 종이차가 발이 묵인 해프닝도 있었지만, 그렇게 내 속을 태운 녀석 <두려움 없는 미래>는 2010년 1월 18일 무사히 태어났다.

말 많고 탈 많으면 대박이 난다고 했던가? 흠…… 대박이라? 어느 나무에서 열리는 박을 대박이라고 부르는지. 이 책에 쏟아진 미디어의 폭발적인 관심에 나는 만족해야했다. 어느 신문의 기자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잘 안 팔리죠? 이 책이 잘 팔리면 우리나라가 진짜 희망적인데 말이에요. 하하하!" 나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희망이 만연하면, 희망이 아닐지도 모르니깐.

당분간 서로 연락을 하지 말자며 흩어진 우리의 작업자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렇게 희망에 중독된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죽어도 해피엔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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