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가 심상치 않은 이 책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임옥희 지음, 도서출판 여이연 펴냄)은 '폭력의 시대, 타자와 공존하기'라는 부제가 없었다면 호러 소설이거나 요즘 드라마·영화로 미국 시장을 강타하는 '뱀파이어'의 한 계보로 여김직 하다. 구미호, 강시, 도깨비를 연상시키는 뱀파이어는 오랜 세월을 두고 다양한 버전으로 재생되어 왔다. 뱀파이어를 불러내는 인간 사회의 심리적 사회적 욕망을 분석한 연구도 있는 모양이다.
흥미로운 것은 2010년생 미국의 뱀파이어는 사람의 피 대신 인공 혈액 음료를 먹고, 뱀파이어에 빠진 10대들이 200달러가 드는 뾰족한 송곳니를 시술받기 위해 줄을 선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자의 '뱀파이어'는?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아이러니한 국면에 대한 은유이다. 이에 의하면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거대한 프레임 속에서 인간은 타자를 삼켜야 하는 식인(食人) 주체임과 동시에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딜레마적 존재이다.
▲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임옥희 지음, 도서출판 여이연 펴냄). ⓒ여이연 |
이 폭력의 시대를 넘어서 공존의 가치를 찾는 작업이 2부에서 이어지는데, 타자·환대·주름·문학·유머·일상·채식의 가치를 통해 공존의 시학을 모색했다. 아, 참! 중요한 걸 빠뜨릴 뻔 했다. 사람 및 사물들의 관계를 관찰함에 있어서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인문학적 페미니즘이다.
돈의 포르노그래피가 만연한 폭력의 시대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어버린 외설적인 시대에 가난한 자들은 자존심과 영혼을 가질 수 없다는 저자 특유의 시니컬한 통찰은 우리 사회 곳곳을 관통한다. 다국적 기업과 여성 노동력의 문제, '구글 베이비' 현상이 보여주는 교환가치로 환원된 자궁, 육체자본과 취향의 계급화 등의 문제를 사례로 제시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신귀족들이 전 세계의 부를 휩쓸어가는 동안 여성화된 노동은 글로벌 분업 형태로 극심한 착취 대상이 되어 왔다. (…) 맞벌이를 해야 생계가 유지되는 한국 사회의 여성들이 직장에 나가 일하는 동안 그 빈자리는 중국 조선족 여성, 필리핀 여성들의 노동으로 채워진다. (…) 세계 경제의 밑바닥에 3세계 여성 노동자들의 인내와 피와 땀이 있다면, 꼭대기에는 신들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우연성과 투기가 지배한다. 그렇게 하여 말레이시아 여성 노동자 1년 전체 임금보다 더 많은 CF 계약금을 마이클 조던에게 주고, 회사의 주주와 CEO들은 엄청난 연봉을 챙긴다."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환원된다 해도 자궁만큼은 사용가치를 고수할 줄 알았다. 하지만 자궁의 생식력도 가족 안에서의 사용가치로만 남겨두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생체권력과 의료가부장제가 자궁의 용도마저 전유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결과 엄마가 여럿이 되었다. 알엄마(난자엄마), 자궁엄마(대리모), 양육엄마, 새엄마 등 엄마가 무한으로 증식되면서 분열되고 있다.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완전히 외주에 맡겼을 때 여성의 모성은 어디에 있을까. 다큐로 보여준 '구글 베이비'가 이런 문제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남성인 도론은 자신의 정자와 인터넷 난자 주식회사를 통해 동유럽의 한 여성으로부터 구매한 난자를 가지고 미국으로 간다. 거기서 정자와 난자를 체외 수정시킨 다음 영하 80도로 냉동 보관한 수정란을 가지고 인도의 뭄바이로 간다. 거기서 대리모를 물색하여 수정란을 착상시킨다.
인도의 대리모는 산부인과에서 10개월 동안 인큐베이터가 되었다가 아이를 출산하는데, 태어난 아이는 주문한 부모의 나라로 보내진다. 그 전체 과정이 10만 불, 아이 하나를 '합법적'으로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도론이 인도 여성의 자궁을 매매한 것은 가격이 저렴하고 인도에서는 합법이기 때문이다."
구글을 통하면 구하지 못할 것이 없다. 신용카드로 구매한 베이비도 그렇지만 이렇게 여성의 몸이 어느 한 군데도 남기지 않고 시장의 논리에 포섭되었을 때 과연 여성이 성적으로 해방되고 자유로워질 것인가? 가족은 무엇이고 모성 가치는 또 어떻게 되는가? 저자나 독자 다 궁금하고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를 읽어내는 냉정하고도 섬세한 렌즈
세간에 문제가 되었던 간통법을 저자의 논법으로 따라가 보자. 저자는 국가주의, 인권의 문제를 통해 이 문제를 파헤친다.
일부다처에서부터 중혼이 다반사였던 시절, 합법적으로 결혼한 첫 번째 여성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주의자들이 가부장적인 국가에 호소함으로써 간통법이 성립되었고 유지되어 왔다. 즉, 간통죄는 남자보다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일부 여성주의자들은 말한다.
사실 일부일처제는 남성들을 길들여 가정화(혹은 가축화)하려는 여성들이 이루어낸 성취의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간통을 인간 성(性)의 제도화가 낳은 산물로 보고, 간통법이 초래할 인간의 행복권, 성적 자기 결정권의 문제를 인문학적 감수성과 페미니즘적 시각을 통해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간통법이 가정을 보호해준다? 그것이 작동되는 순간 대부분의 혼인 관계는 깨진다. 간통법에 관계된 두 여자가 어떤 신세가 되는지는 차치하고서도 '남녀 사랑'에 관해 국가가 심판을 보는 꼴이다. 신뢰와 사랑을 배신한 배우자에게 복수하려는 심리로 국가 '아버지'에게 "나를 배신한 쟤 좀 혼내주세요"하고 일러바치는 식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간통법이 수행한 아주 특별한 역할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가정을 지켜주는 것도 조강지처를 보호해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간통법은 '부정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전환시켜주는 것이었다고 하며 그 사례들을 소개하였다. 저자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결혼'을 더 이상 경이로울 것이 없는 것, 즉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습관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비유한다.
어쨌거나 불륜에의 욕망을 법으로 막는 것은 인권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폭력적이다. 간통죄를 처벌해달라는 것은 성적 자결권을 알아서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가부장적인 국가에게 호소하여 금기를 계속 만들어낼 것이 아니라 금기를 풀어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금기는 그 안에 욕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저자가 휘두르는 '여의봉'은 그저 그렇게 흘러가나보다 했던 일상을 새로운 맛과 느낌으로 되살려내는 재주가 있다. '뇌사'라는 인위적인 죽음의 개념이 그렇듯이 생물학적인 사건이었던 인간의 생명과 죽음이 이제는 '발명'되는 시대이다. 그녀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과 죽음을 발명하는 근대적인 생체권력과 의료 테크놀로지라는 무시무시한 존재와 마주하도록 한다. 또한 그녀는 여성주의 의제나 우리가 잠재하고 있는 편견 등 내부 비판적인 발언을 아끼지 않는다.
"가족은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 계급 종교 인종 등에 따라서 제각기 모습을 달리하고 있으므로 주어진 상황과는 무관하게 '가족은 해체되어야 한다'거나 '가족은 반사회적'이라고 단언하기 힘들다. (…) 다문화가족으로 이행된 시대에도 여전히 한 민족 한 겨레, 한 핏줄과 같은 '피의 언어'로 구성된 가족의 배타성은 문제적이다. 피의 언어에 따라 근본과 혈통을 모르는 상것들을 천시하려는 태도는 한국인들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개인을 중심으로 한 대안 가족의 탄생은 이미 가시화되었다. 저자는 그런 가족의 탄생이 우리 사회에서 욕망의 민주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가족을 만드는 것이 싫고 어른이 되어서 가족을 건사하는 것도 싫고 애인을 만드는 것도 귀찮아서 나 홀로 사는 코알라 족, 나 홀로 반려가족 등 '수상한 가족'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변혁을 모색하는 창조적 메타포
인간은 타자를 먹어치우고 정복하고 노예로 만들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자신이 노예로 만든 바로 그 타자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식인주체의 딜레마를 안고 있다. 인간은 그런 딜레마로부터 정녕 벗어날 수 없는가, 저자는 고민한다.
"우리가 폭력에 둘러 싸여 있고 바로 그런 폭력적인 호명에 의해 주체로 탄생하는 것이라면, 주체가 그런 폭력성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타자의 인정을 받으려고 사생결단해야 하는 주체들이 모여서 공존을 모색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 소위 관용을 외치는 자유주의들과 좌파들은 기득권이라는 성곽에 양다리를 걸치고 앉아서 성 아래로 손을 내민다.
'근면 성실 정직하게 일해서 열심히 계급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내 손을 잡아라. 그러면 내가 성 안으로 끌어올려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는 다급한 상황이면 그들은 언제든지 계급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내밀었던 관용과 배려의 손을 거두어들인다. 그것이 자유주의적인 배려와 관용의 한계다."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우리의 마당이 그다지 녹록한 상황은 아니다. 저자는 오히려 공존이 불가능한 이 상황을 공존의 가치를 모색해야 할 시점으로 본다.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불가능한 상황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빈혈에 시달리면서도 흡혈의 욕망을 다스리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이러한 딜레마적 상황이야말로 타자와 관계 맺고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자원이 될 수 있다는 뜻이겠다.
저자는 자신의 작업에 '조롱'과 '유머'라는 수사를 걸치는데, 언뜻 유쾌하고 밝은 내용처럼 보일 것이다. 과연 박학다식 언어의 달인답게 글은 무지하게 재밌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 구석구석이 얼마나 폭력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가를 객관적 자료와 역사적 지식, 문학적 사례들을 빌려와 죄다 까발리는 통에 현실과 대면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많은 경우 그녀가 사용한 페미니즘 언어가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녀는 페미니즘을 스스로 '여자'로 동일시하는 여자들이 살아가면서 하는 온갖 이야기들이라고 한다.
이번 여름 10여 일 간의 여정으로 실크로드를 다녀왔다. 눈썹 하나라도 빼놓고 가는 것이 여행의 법칙이라는 고수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넣다 빼다를 반복하다 결국 노트북과 책 몇 권을 쟁여 넣었다. 3~5월이면 어김없이 한반도를 찾아오는 황사, 그 진원지인 고비사막을 건너던 중간 중간, 오아시스 도시 호텔에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와 만났다. 그런 밤은 나름의 묘미가 있었다. 언젠가 저자가 즐겨 썼던 '생존의 사막, 이론의 오아시스'라는 은유가 생각났다. 사막과도 같은 생존의 조건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이론을 창출해내는 것이라는 뜻이었지 아마?
페미니스트 인문학자들의 삶의 조건에 비유되던 사막, 그 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옆을 보아도 모래와 바람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은 예전의 그 황야가 아니라고들 했다. 사막을 가로질러 고속도로가 뚫리고, 여기저기 기중기, 트럭이 널려 있으며, 풍력발전소, 솔라 시설이 가동되고 있었다.
저자가 조롱하던 신자유주의의 법칙이 사막에도 관철되고 있었다. 생존의 은유로서의 사막, 그 마저도 '적'들에게 접수되고 있는 이 현실을 그녀는 어떻게 조롱할까 퍼뜩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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