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게걸음으로 슬쩍 고물상의 함석문을 열고 길가로 빠져나온 내가 그에게 물었다. 10분을 참지 못하고 빠져나온 처지가 궁색해서 얼떨결에 튀어나온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걸핏하면 철거하겠다는 것만 빼면 그럭저럭 살 만하오."
어느 동네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대화가 이루어진 곳은 서울이 아니라 필리핀 케손(Quezon City)의 빈민촌이다(유재현 지음, <아시아의 오늘을 걷다(유재현 온더로드 04)>, 그린비 펴냄, 98쪽). 한때 필리핀의 수도였고 지금은 메트로마닐라에 속하는 도시인 케손 변두리의 쓰레기더미 속에 사는 가족과 만나 유재현이 나눈 대화는, 기묘하게 시공간을 초월한다. 사실 유재현이 보여 주는 아시아(타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등)의 모습은 그의 말대로 아시아 구성원에게 "가까운 과거나 미래"이다.
유재현은 누구보다 아시아의 현대사와 오늘을 많이 이야기하는 작가다. 그의 아시아 이야기는 역사서라고 하기에도 여행서라고 하기에도 충분치가 않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르포르타주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가 아시아 각지를 수차례 돌아다니는 것은 여행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그들의 삶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과거나 미래'를 전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한 달 정도가 아니라 몇 달을 머물며, 현지 친구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데 힘을 쏟는다.
그런 유재현의 모습을 보며 그린비가 제안한 것이 '온더로드'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따뜻한 우정이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리지 않는다. 유재현이 그리는 건, 풍광이 아니라 '전쟁 같은 삶'이고 '삶을 유린하는 국가의 폭력들'이며, 그가 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느껴지는 건 '아름다운 우정'이라기보다는 '끈끈한 연대'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그의 책의 제목을 뽑거나 헤드카피 회의를 할 때면 '슬픔'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슬픔'과 함께 또 하나 빠지지 않는 단어가 바로 '희망'이다. 나는 이것이 유재현의 시선을 가장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슬픔'과 '희망'. 그것은 슬픔 속에서라도 억지로 희망을 찾자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유재현에게 늘 함께 있는 '슬픔'과 '희망'은, 예컨대 루쉰이 소설 '고향'이 보여 주었던 그런 슬픔과 희망이다.
나는 희망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갖고 싶어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줄곧 우상을 숭배하고 잊지 못하는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 역시 내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 낸 우상 아닌가? 단지 그의 소망이 바로 손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나의 소망은 손에 들어오기 어려울 뿐이다. (…) 생각건대 희망이라는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비루한 삶을 가리기 힘든 아시아의 이야기들보다 고된 삶을 화려하고 세련되게 곧잘 감추는 미국과 서유럽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더 인기가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여겨진다(아시아를 다루는 책은, 기행문이건 에세이건 사회과학서이건 이론서이건 거의 잘 안 팔린다). 누가 남루하고 구질한 것을 똑바로 보고 싶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함께 걸어서 길을 만들어 내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걸어갈 곳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유재현은 '직시'할 모습들을 끊임없이 우리 앞에 들이민다. 우리가 거쳐 온 길(군사 독재, 쓰레기더미 속의 삶, 개발의 탐욕 등)을 고스란히 걸었고 걷고 있는 아시아인들의 모습 말이다. 그 모습 속에서 우리가 현재 상태에서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은 미래보다는 만들고 싶은, 혹은 만들어야 할 미래가, 더 선명해질 수 있다고, 그 길로 함께 걸어가 보자고, 그는 말하고 있다.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을 구사한다. 언뜻, 좋게 말하면 시크하고 나쁘게 말하면 냉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감추어진 유머와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놓치지 마시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이런 그의 마음과 시선이 느껴지는, 개인적으로 그의 글 중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끝으로 덧붙인다.
논 가운데에서 피를 뽑던 아이는 뜻밖의 불청객이 나타나자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아이의 시선을 피했다. 잔인하군. 잔인하군. 나는 중얼거렸다. 그 아이가 서 있는 논에서 두 시간 떨어진 프놈펜에는 거실의 금고에 100만 달러를 현금으로 가진 인간들이 있었다. 그런 인간들의 금고를 모두 털고 외국에 숨겨둔 돈을 모두 찾아 원래의 주인에게로 되돌린다면, 아니 절반의 절반의 절반의 절반의 절반이라도 그들의 손에서 되찾아온다면, 아이는 깨끗한 옷을 입고 학교에서 크메르 문자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아이의 세상은, 아이를 논바닥에 붙박아두고, 코를 박게 하고, 흙투성이 문맹으로 만들고 있다.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이 있는지 나는 알고 싶다. 나는 기억한다. 선글라스를 낀 군인이 지배하던 어느 혹한의 겨울날, 70년대 초 서울 동쪽 변두리의 한 골목에서 김이 피어오르던 수챗구멍을 뒤져 멸치대가리를 찾아 입에 넣고 있었던 내 또래 아이의 시선을. 나는 정말 무능하지만, 나는 정말 비겁하지만, 그 시선을 내 기억에서 지워버릴 만큼 용감하지는 못하다. 인간으로서, 나는 증오해야 할 것을 증오한다. 내 기억 속의 그 시선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유재현 지음, <무화과나무 뿌리 앞에서(유재현 온더로드 03)>, 그린비 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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