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의원은 최근 광주 '민심 투어'를 통해 이런 분위기에 쐐기를 박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3주기 기념식 방문 후 그는 "광주가 대한민국 정치 개혁의 씨앗과 중심이 돼 달라. 저는 그 마중물이 되겠다"고 말했다.
이에 질세라 민주당도 광주에 총출동했다. 민주당은 안 의원 방문에 하루 앞서 "을을 위한 정당"이 되겠다며 '광주 선언'을 발표했다. 흔들리는 호남 민심을 다잡기 위한 극약처방이다. 그러나 효험은 미지수다.
한 광주 시민은 지금 호남 분위기에 대해 "안철수는 상수, 민주당이 변수"라고 정리했다. 채 1년도 안 돼 변수와 상수가 바뀐 이 상황에서 또 한 번의 반전이 있어날 수 있을까. 안 의원이 광주를 다녀간 지난 17, 18일 광주 지역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시민들은 여전히 "민주당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 동시에 안 의원에 대해서도 완전한 믿음이 아닌 막연한 기대감만을 내보였다. 호남 민심은 여전히 민주당과 안철수 세력을 예의주시하는 중이다. 편집자주.
▲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17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로에 열린 제33주년 5·18 민주화운동 전야제를 찾아 시민과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호남은 빈 성… 안철수, 깃발 꽂기 일보 직전"
한겨레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지난 3월 2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창당 가정 시 '안철수 신당'의 호남 지지율은 24.7%로 민주당의 24.2%에 비해 근소하게 앞섰다. 4월 29일 같은 조사에서는 안철수 신당이 30.9%, 민주당이 15.4%로 격차가 벌어졌다.
5.4 전당대회를 통한 지도부 교체에도 민주당 지지율은 요지부동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5월 13일부터 3일간 벌인 조사 결과, 안철수 신당은 40%, 민주당은 18%를 기록해 2배 넘는 차이를 보였다. 안철수 신당이 창당할 경우 지지 정당을 바꾸겠다는 민주당 지지응답자도 50%에 달했다. 안 의원이 독자 세력화를 선언한 즈음이다.
수치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론조사 상으로만 보이던 민심은 17일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5.18 전야제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단상에는 오르지도 못하고 행사장 언저리만 맴돌았던 안 의원이 시민들로부터 '대선후보'급 환대를 받은 반면, 민주당 의원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이날 전야제에 참석한 백남기(44, 남) 씨는 가족 모두 '정통 민주당 지지자'라고 했다. 가까운 친척이 과거 민주당 도의원을 지냈을 정도다. 그러나 최근엔 집안에 '파'가 갈렸다. 백 씨는 '안철수 파'다.
이날 금남로를 찾은 안철수 의원과 악수했다는 백 씨는 "아까 민주당 국회의원들, 시도의원들이 와서 인사를 청하는데 다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이제 관심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옳은 얘기"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백 씨는 호남을 '성'으로 비유했다. 그는 "호남이라는 큰 성의 성주가 있는데, 성주의 품행이나 통치 하는 모양새가 우스운 거다. 거기다 백성의 삶은 고달프고 성주만 희희낙락하는 상황에서 저 바깥에서 누군가가 백마를 타고 나타난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호남 백성들이 알아서 성문은 열어줬다. 이제 백마 탄 사람은 성에 들어와 깃발만 꽂으면 된다"고 말했다.
안 의원은 백 씨의 표현대로 호남 땅에 깃발을 꽂기 일보 직전이다. 안 의원은 18일 광주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는 "관성에 젖고 기득권에 물든 기성 정치가 광주 정신을 계승하기보다 열매를 향유하는 것에만 열중했다"며 옛 '호남 성주'인 민주당을 겨냥한 비판 발언을 쏟아냈다.
18일 조선대학교에서 만난 대학원생 이재영(30, 남, 가명) 씨는 민주당 당비를 내는 젊은 권리당원이다. 그러나 그는 권리당원 대상 ARS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관심이 없었다'는 것.
민주당 이번 전당대회 권리당원 ARS 투표율은 29.9%에 그쳤다. 지난해 6.9전당대회 당원 및 시민선거인단 투표율은 44.9%이었다. 선거인단 구성에 차이가 있음을 고려한다 해도 낮은 수치다.
이 씨는 "대선 끝나고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니 탓 내 탓 공방만 하고 있다. 이런 당에 아직도 신뢰를 준다는 건 바보같은 일"이라며 민주당에 대한 실망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 씨는 "전당대회 결과가 호남 민심을 투영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의 충성 당원 대부분은 호남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나처럼 선거에 나몰라라 했다. 언론에서는 호남 당원들이 호남 출신 후보들 정신차리라고 일부러 표를 안 줬다고 하는데, 그보단 민주당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라지다보니 지역 정치인에 대한 관심도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한길 대세론이 높았다 해도, 호남 사람들이 똘똘 뭉친다면 (호남 후보를) 당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호남 당원들이 나서지 않았다. '누가 되든, 말든'이라는 심정으로 포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만간 당원을 탈퇴할 것이라고도 했다.
▲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3주년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묘지로 들어서며 항의농성을 하는 유족들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
"안철수 믿는다" 아닌 "안철수 믿어보고 싶다"
호남의 주도권은 분명 안 의원 측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현재 호남 주민들이 안 의원에게 보내는 지지가 확고부동한 정도는 아니다.
호남에서 안 의원의 지지율이 높은 이유에 대해, 대부분의 시민들은 "안철수"가 아닌 "민주당"을 주어로 놓고 설명했다. 안철수 당사자에 대한 호감이라기 보단, 민주당에 대한 반감 탓이라는 대답이 다수였다. 다시 말해 민주당의 향후 행보에 따라 분위기는 다시 역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18일 금남공원에서 만난 고등학교 교사 김대수 씨(43, 남, 가명)는 자신을 '현재 시점에서 안철수 지지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사실 안철수가 말하고 보여주는 것들이 앞으로도 작년이나 올해나 내년이나 크게 변할 것 같지 않다"며 "그런 점에서 '조건부 지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건'이 무엇이냐고 묻자 김 씨는 "민주당이 (다음 대선까지) 남은 4년 간 할 일이 많고 그만큼 기회도 많다"며 민주당의 역할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첫째는 박근혜 정부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야당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고, 둘째는 계파 갈등 소지를 근본적으로 없애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 셋째는 민주당을 대표하는 혁신적인 인물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민주당이 이렇게 제대로만 한다면야 굳이 안 의원을 찾을 필요가 없다"며 입장 변화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어 안철수 의원 측에 대해선 "새정치가 무엇인지 좀 더 각론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씨뿐 아니라 "지지 대상이 바뀔 가능성이 있느냐"는 물음에 역시 "민주당"을 주어로 답변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유학준비생 이정아(29, 여) 씨는 "안철수를 좋아하지만, 지금 상태에선 완벽하게 믿는다기 보다는,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에 달려 있다. 앞으로 민주당이 잘 하면 다시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민주당과 안철수 의원 측의 본격적인 대결에 있어 6월 국회가 1차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구청에서 근무하는 안광범(38, 남, 가명) 씨는 16일 민주당이 '광주 선언'을 발표한 데 대해 "방향을 잘 잡았다고 본다"면서 "민주당이 가장 확실하게 안철수를 따돌릴 수 있는 카드는 원내 활동인 것 같다"고 말했다. 수적 우세에 있는 민주당이 원내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준다면 반전의 기회가 있으리라는 것.
광주 동구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임영화(40, 여) 씨 역시 "이미지가 깨끗하건 아니건 주민들한테 제일은 삶이 나아지도록 도와주는 정치인"이라면서 경제민주화 입법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 민주당 김한길 대표, 전병헌 원내대표,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지자체장들이 16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 민주의 문 앞에서 '을(乙)'을 위한 민주당 광주선언을 발표한 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연합뉴스 |
"호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광주 시민들은 민주당에 대한 실망을 토로하는 한편 '호남 정치인' 부재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
5.18 민중항쟁 유족 중 한 명인 장종배 (69, 남) 씨는 18일 기념식에 참석한 안 의원을 보고 "저 양반이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모르겠다"며 "호남에서 맥이 끊어져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장 씨는 "광주에서 나고 자라면서 지금까지 김대중 선생님 하나만 보고 산 세월이 30년"이라면서 "(김 전 대통령이) 가시고 난 뒤로 선생이라 부를 정치인이 없으니 통탄스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17일 전야제에서 안철수 의원 주변에 시민들이 몰려드는 광경을 보고, 오성호(45, 남)씨 역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 씨는 '안철수 호남 대세론'이 불편하다고 했다.
오 씨는 "호남 사람들이 좀 더 길게 생각해야 한다. 결국 안철수 의원은 호남 정치인이 아니다. 여기서 인기만 취하고 말 것"이라며 "호남이 실속을 차리려면 호남 정치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안 의원이 '인재 영입'을 거론한 데 대해서도 "안 의원 스타일 상 지역을 안배하진 않을 것이다.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호남 인물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안 의원을 향해 "호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그는 "이건 물론 민주당에게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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