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선거 구도에서 영·호남 인구 격차에 따른 야권의 불리함은 그 존재론적 정당성을 논하기에 앞서 한국 정치의 '상수'였다. 따라서 야권의 선거전략은 지역 변수가 이슈가 되는 것을 최소화하고 계층별 투표 양상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두었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다.
하지만 오히려 문 후보의 선거전략을 되짚어 보면 지역별 투표 전략, 특히 부산·경남(PK) 표 대책을 중심에 놓고 전체 선거운동을 진행시켰다. 선거유세의 시작과 끝이 모두 부산이었을 정도로 PK에 집착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그나마 지역별 득표전략을 놓고 봐도 결과적으로 잘 된 것은 아니었다. PK에서 40%를 넘는 득표를 올리라는 것이 문 후보 측의 희망 섞인 기대였지만 이는 현실이 되지 못했고, 강원과 충청 등 여권 성향이 강했던 지역에서 거둔 성적도 '선방'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최대 표밭인 수도권에는 유리한 판세가 점쳐졌지만 격차를 더 확실히 벌리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계층투표는 강남3구 몰표 등 이른바 상위계층에서는 나타났지만 서민층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에는 참여정부에서 양극화가 더 심화됐던 것에 대한 저소득층의 경험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문 후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참여정부의 부족함을 반성한다고 밝히기는 했다. 하지만 끝끝내 '친노 프레임'을 벗는데 실패한 것이나, 중도 부동층의 표심을 의식한 나머지 때로 보수적인 색채까지 보였던 것은 계층별 투표를 저해한 요인이었다.
같은 지점에서 민주통합당의 문제도 지적된다. 문 후보나 안철수 전 후보가 '네거티브 없는 선거'를 강조했지만 실상 선거판을 지배한 것은 네거티브 이슈의 비중이 더 컸다. 먹고사는 문제를 선거 이슈로 창조해 내는 숙제의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정당의 정책역량을 총동원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는가 하는 측면에서 합격점을 주기 어렵다.
거꾸로 박근혜 후보는 2010년 10.26 재보선에서의 '무상급식' 이슈와 같은 계층별 이슈가 될 만한 경제민주화와 반값 등록금 등의 이슈를 선제적으로 점하고 나섰고, 뒤늦게 차별점을 부각시키려는 문 후보의 노력은 큰 결실로 이어지지 못했다.
점차 고령화가 진행되는 한국의 상황에서, 지역투표에서 계층투표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 단계적 성격을 갖는 세대별 투표를 끌어내는 데도 문 후보와 민주당은 실패했다. 60대 이상 고령층의 압도적인 박근혜 후보 지지 성향에 대비해, 젊은 층 특히 20대는 문 후보에 열광하지 않았다.
문 후보 측은 청년층에 다가갈 의제를 개발하고 이를 공세적 이슈로 바꿔내지 못했고, 그나마 반값등록금 정책에서 박 후보와 차이점을 부각시켜 보려 했으나 이슈 자체의 유효기간이 지난 면도 있었고 차별화에서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청년유세단 등 당 일각에서 청년 이슈를 부각시키려는 노력도 없지는 않았으나 당 차원의 조직적 뒷받침을 받지는 못했다.
그밖에 이처럼 지역 구도로 선거전략 판세가 굳어지는 데 부차적인 영향을 미친 전술적·상황적 요인은 △너무 늦게 시작된 본선, △'친노'의 귀환에 대한 우려 불식 실패 등이 지적된다. 이같은 문 후보의 실점은 고스란히 상대 진영인 박근혜 후보 측의 득점으로 이어졌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프레시안(최형락) |
문재인, 늦었다
야권의 대선 패배 후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대선이 며칠만 늦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배어나왔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대선이 빨랐던 게 아니라, 문 후보가 정해진 일자에 맞춰 세력 결집을 이뤄내지 못했다. 문 후보는 여론조사 공표금지기간인 12일까지 안철수 전 후보의 지원사격 등으로 꾸준히 박근혜 후보를 추격하는 추세였다. 문제는 문 후보와 박 후보 간의 '본선' 자체가 너무 늦게 시작됐다는 것.
문 후보와 안철수 전 후보의 단일화가 이뤄진 것은 후보등록 직전인 지난달 23일이었다. 그나마 안 전 후보가 사퇴 직후부터 문 후보 지원에 나선 것도 아니었다. 그가 문 후보와 전격 회동을 가지고 부산 지원유세에 나선 것은 대선을 열흘 남짓 남겨둔 시점이었다. 단일화 시너지가 지지율로 바뀌고 다시 표심으로 다져지기에는 부족했다는 평이다.
안 전 후보와의 단일화가 후보등록마감 사흘 전까지 타결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가 결국 한 쪽의 '포기'에 가까운 사퇴로 끝난 것도 원래 중도와 야권을 포괄했던 문재인-안철수 지지층의 마음에 골을 남겼다. 문재인-안철수 진영 간의 감정싸움 등이 낱낱이 중계되면서 참신함, 두 후보의 인간적 매력 등 야권의 긍정적인 이미지들은 손상됐다. 야권 지지자들을 넘어 부동층의 표심에까지 영향을 미친 동인이었을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이 기간 동안 박근혜 후보 측은 야권의 혼란을 즐기며 우세를 누렸다. 막판에 추격당하긴 했지만 결국 '박근혜=안정=승리'라는 이미지가 이 기간 동안 다져졌다. 대세론을 깨뜨린 것은 '문-안 연대'의 득점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골을 뒤진 상황에서 넣은 한 점의 만회골에 불과했다.
친노 프레임, 결국 먹혔나
또한 문 후보가 선대위 구성 단계에서부터 그렇게도 피하려 했지만 결국 '문재인=친노'라는 관념을 끝끝내 넘어서지 못한 것도 패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참여정부의 한계에 지쳐 결국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한 유권자들은 참여정부의 실력자였던 문 후보에게 불안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10월 하순 선대위 보직을 사임했던 이른바 '친노 9인방' 사태는 이런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당시 발표된 이들의 보직을 보면, 후보 비서실의 실무자급으로 결코 친노세력이 선대위의 전권을 장악했다고 평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보의 일정과 메시지라는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했고, 비서실 인선만 덩그러니 발표한 방식도 문제였다.
'9인방'의 퇴진과 이해찬 대표의 사퇴는 결국 이뤄지긴 했지만, 후보의 손발이고 당의 머리였던 이들의 희생과 맞바꾼 전력손실에 비해 효과는 미미했다. 문 후보는 단호하다기보다는 결단을 미룬다는 느낌이었고, 안철수 전 후보 때문에 마지못해 물러나는 모양새로까지 비쳤다. 게다가 심지어 사퇴했다는 9인방이 11월 하순 또다시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집권시 임명직 공직을 맡지 않겠다는 식의 속시원하고 간명한 '백의종군' 선언을 내놓지 않으면서 이같은 논란을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물론 이를 후보의 리더십 스타일의 차이로 볼 수도 있다. 좋게 보면 문 후보는 주변의 의견을 폭넓게 반영하고 명령보다는 자발성을 중시하는 민주적인 리더였지만, 한국 유권자들의 민주적 감수성과 이들이 바라는 리더상(像)에 더 어울렸던 것은 결국 문 후보보다는 박 후보였다. 게다가 배경은 '전시 상황'에 비견되는 대선 국면이었고, 앞에서 지적했듯 문 후보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반면 박 후보 측은 이명박 정부의 여당이었음에도 과감한 인적 쇄신을 했다는 인상을 심어줬고, 실패한 정권으로 지목된 현 정부와의 냉혹할 만큼 단호한 선긋기로 여당 색 지우기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문 후보가 친노를 대한 태도와, 박 후보가 이명박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는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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