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적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와 소수의 보호로 정의된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은 정치적 영역에서 종종 부조화라는 난관에 봉착한다. 특히 국가 정책을 결정짓는 국회라는 공간에서 다수의 지배와 소수의 보호를 동시에 만족시키기는 상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수파는 자신의 정책 의제를 어떻게든 관철시키려 하고 반대하는 소수파는 법안 통과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이 경우 정치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며 불가피한 충돌은 때로 폭력을 수반하기까지 한다. 여론은 폭력 국회를 질타하고 시민들의 정치 불신은 증가된다. 교착과 불신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국회의 정책결정과정에서 다수결은 다수의 지배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원칙으로 사용되고 있다. '50%+1'이라는 과반이 정책결정의 기준으로 채용되는 이유는 패자('50%-1')의 어떠한 연합도 승자의 연합을 넘어설 수 없는 최소한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반의 규칙은 '최소한의 민주주의'로 불린다. 승자의 연합을 결정하는 기준이 단순히 과반을 넘어 만장일치로 나아갈수록 정책으로부터 소외되는 소수는 줄어든다.
물론 그만큼 정책결정의 효율성은 감소한다. 그러나 조금 더디 가더라도 단순한 과반에서 가능한 한 절대다수의 민의를 수렴하려는 합의의 노력은 '최소한의 민주주의'에서 '최대한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이다. 정치체제의 정당성도 그만큼 증가하게 되고 시민들의 정치 불신 또한 감소하게 된다. 유럽의 합의제 민주주의 국가들이 소수의 거부권을 보장하려는 여러 제도적 장치들을 두는 이유는 바로 '최대한의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더 많은 민주주의는 소수의 거부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줄 것인가와 긍정의 방정식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22일 당시 한나라당의 한미 자유무역협장(FTA) 비준안 날치기에 항의하던 김선동 민주노동당 의원이 최루탄을 터뜨린 후 국회 경위들에게 끌려나가고 있다. ⓒ뉴시스 |
19대 국회의 개원을 앞두고 지난 5월 2일 국회 본회의는 '몸싸움 국회'를 근절하겠다는 명분 아래 이른바 "국회 선진화법"을 통과시켰다. '의안 자동 상정 제도'와 '안건 신속처리절차', 그리고 '무제한 토론제도(일명 필리버스터)'가 핵심적인 장치들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장치들은 '더 많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으며 손질이 필요하다.
먼저, 교섭단체 사전협상을 실질적으로 폐지함으로써 원내 소수파의 권리를 없애고 다수파의 지배를 강화시켰다는 점이다. 국회에서 하나의 의안은 상임위원회-법사위원회-본회의를 통해 각 단계마다 '회부-상정-심의-의결'을 거쳐 법안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갖는다. 여기에 개정 이전의 국회법은 상임위, 법사위, 본회의의 상정 단계 이전에 위원장 및 의장이 교섭단체(원내 의석 20석 이상의 정당) 간사 및 대표 등과 함께 회부된 법안을 상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협의하여 결정하도록 했었다. 즉 다수당과 소수당 간의 협상을 통해 국회의 절차를 걷게 되는 의안을 정하도록 한 것이다. 특히 회부된 법안이 갈등 법안일 경우 소수당의 목소리를 일정하게 보장하는 합의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도입된 '의안 자동 상정 제도'는 상임위와 법사위에 회부된 의안이 상정유예기간(상임위 위원들의 의안 숙지를 위한 기간)을 거친 후 30일을 경과하면 교섭단체 협의 과정 없이 자동으로 상정되도록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발의된 의안에 대한 다수당과 소수당 간의 사전 숙의 절차를 감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소수당의 협상권을 없애는 효과를 지닐 수밖에 없다.
둘째, 다수파의 지배 강화는 '안건 신속처리 절차'에서도 발견된다. 이 장치는 상임위에 회부된 의안에 대해 재적의원 과반수의 '신속처리 안건 지정동의'가 이루어질 경우 '무기명 표결, 재적의원 3/5 동의로 '신속처리대상안건으로 지정할 것과 상임위에서 180일 이내에 처리되지 않을 경우 다음 단계인 법사위와 본회의에 자동 회부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소관 위원회(상임위와 법사위)에서 의결을 거치지 않아도 본회의 회부가 가능하도록 한 것은 위원회 내에서 다수당과 소수당 사이의 숙의와 조정 기능을 없애면서 다수의 지배를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셋째, 개정된 국회법은 국회의원의 대표성을 회피하는 장치를 두고 있다는 점이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된 '의안 신속처리 절차'뿐만 아니라 '의안 자동 상정 제도'에도 심의 과정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무기명 표결, 재적 3/5의 동의로 다음 단계의 절차를 진행할 수 있게 했다. 물론 절대 다수에 가까운 동의(3/5)라는 나름의 안전장치가 있기는 해 다수 의지의 강제 집행을 일정하게 견제하는 효과를 볼 수 있긴 하다. 그러나 '무기명 표결'로 처리하게 한 것은 결국 국민의 대표로서 책임성을 회피하겠다는 것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소위 밀실 야합의 가능성도 엿보인다. 주권자인 국민 앞에 감추어야 하는 정치적 행위는 있을 수 없다.
넷째, 개정된 국회법에는 소수파의 권리를 일정하게 보장하는 장치로 재적의원 3/5의 종결조건을 전제로 '무제한 토론 제도'를 두고 있다. 본회의의 심의 과정에서 토론 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음으로써 소수파의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다수의 지배를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로 미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제도이다. 그러나 개정안이 미국의 제도와 다른 점은 회기가 종료되면 토론도 종결되고 무제한 토론의 대상 의안은 다음 회기에서 곧바로 표결에 부쳐지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3/5 종결조건'이라는 소수당의 권리를 보호하는 안전장치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 다수당의 입장에서 굳이 소수당의 필리버스터를 종결시킬 필요가 없으며 단지 다음 회기의 국회까지 기다리면 될 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제한 토론 제도'를 통한 소수의 보호는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19대 국회는 몸싸움을 방지하고 효율성을 진작시킨다는 명분 아래 합의제로부터 후퇴해 다수의 지배를 강화시키는 국회법 아래 운영될 예정이다. 물론 몸싸움 국회는 시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렇다고 이를 피하기 위해 소수의 권리를 보장하는 다양한 숙의 장치를 폐지하면서까지 다수의 지배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을까?
어느 국회의원의 고백처럼 몸싸움은 아프고 병든 국회의 생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오히려 국회의 상처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보장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최대한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은 합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정치영역으로 감염됨으로써 가능하다. 제도적 손질이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 최소한 '의안 자동 상정 제도'와 '의안 신속처리 절차' 내의 무기명 표결 제도와 필리버스터 제도 내의 다음 회기 의안 자동 표결 제도는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더불어 기존 국회가 운영했던 교섭단체 간 협상을 풍부하고 세련되게 진행토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기존 소관 위원회와 본회의 상정 이전에 행했던 원내 교섭단체 간 협상의 관행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나아가 원내교섭 단체 간의 협상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국회 거버넌스의 체계도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소수의 저항을 다수가 포용하는 국회, 그리고 소수가 다수의 의견을 경청하는 19대 국회가 되길 바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