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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성 3호는 다시 발사된다"

[기고] 북한과학기술정책사 연구자가 본 北 위성 발사와 실패

북한의 광명성 3호 발사는 실패를 인정한 것으로 끝이 났는가? 이번 발사가 '한 순간의 이벤트'였다면 그냥 실패한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태양절 행사를 위한 불꽃놀이만으로 기획된 것이었다면 더 이어갈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복잡한 계산과 장기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면 당연히 여기서 끝일 수 없다. 실패라는 '새로운 위기'의 시작일 뿐이다.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할 김정은은 '위기 극복의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광명성 3호 발사 예고가 나온 후 언론에 쏟아진 대부분의 글들은 과학적, 학문적으로 치밀하게 분석된 글이 되라고 하기에는 빈틈이 많은 글이었다. 객관적인 상황, 즉 북한이 자력으로 개발한 '광명성 3호'라는 지구관측위성을, 역시 자력으로 개발한 '은하 3호'라는 운반로켓에 실어 발사하겠다는 발표에 대해 '왜' 발사하는가라는 질문만 던지지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발사가 어떠한 거대 프로젝트의 '과정'에 속한 것인지 파악하고, 이것이 '어떻게' 준비되었고 어떤 효과를 기대하면서 이루어지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분석한 글은 거의 없었다. 인공위성 관련 제작 기간이 적어도 1년 이상 걸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1년 이전의 상황부터 북한의 움직임을 분석한 글은 더더욱 없다. 따라서 발사 실패 이후 쏟아지는 평가도 모두 이벤트의 끝이었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것은 '3차 핵실험'뿐이었다.

필자는 기존의 북한학자들과 달리, 과학기술을 통해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를 해왔다. 전공분야인 '북한 과학기술정책사'는 단순히 북한의 과학기술 내용이나 정책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 정책이나 활동 전반을 역사적으로 연구해 '북한적 현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필자에게 이번 광명성 3호 발사는 단순히 '체제 안정화를 위한 상징적인 이벤트'나 '김일성 탄생 100주년 기념 축하쇼'가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경제발전 전략'의 일환으로 파악된다. 자칫하면 아무런 소득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국방비'를 환급받기 위한 조치, 혹은 앞으로 만들어 수출할 'made in DPRK' 상품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기술력에 오점을 남긴 채 광명성 3호 발사가 마무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발사 실패라는 새로운 '위기'를 최대한 빨리, 예상보다 높은 수준에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할 가능성이 크다.

위성 발사는 복잡도가 상당히 높은 일이다. 그 누구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자체적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스페이스 클럽' 국가들도 모두 수많은 실패를 겪었다. 새로운 기술은 실패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그러므로 항상 실패를 염두에 두고 플랜 B, 플랜 C 등이 준비된 상태에서 사업을 진행한다.

북한도 광명성 3호 발사가 실패할 때를 대비한 계획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 계획은 다른 나라보다 더 빨리, 더 높은 수준에서 재발사를 성공시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나로호'는 실패된 뒤 10개월 만에 재발사되었고, 일본은 다목적 위성을 탑재한 'H-2A 7호'가 15개월만에 재발사되었다. 북한에서는 아마도 이러한 기존의 기록을 뛰어넘어 최대한 빨리 재발사에 들어갈 것이라 예상된다. 북한 지도부는 건국 기념일이 9월 9일 근처나, 당창건 기념일 10월 10일 무렵에 재발사를 원할 것 같다.

우선 북한은 이번 발사용 위성과 발사체를 제작하면서 복사본을 1세트 더 만들어두고 실패를 대비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패의 원인을 분석할 수 있는 시스템을 최대한 준비해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속도전'을 인공위성 발사 사업에도 적용할 수 있다.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므로 최대한 빨리 원인 분석을 한 후 오류 수정을 거쳐 발사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남들보다 빨리 위기를 극복했다고 선언할 것이다. 그래야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이 더욱 탄력을 받아 추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달한 국방과학기술을 활용해 민간 경제를 최대한 빨리 발전시킨다는 전략이 계속 추진되려면 광명성 3호는 재발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 이번에 발사 실패한 광명성 3호의 추진체 은하 3호 발사 전 장면 ⓒAP=연합뉴스

선군시대의 경제발전전략 : 국방 과학기술을 핵심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제시된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을 통해 보더라도 광명성 3호는 재발사되는 것이 순리이다. 2000년대 넘어오면서 선군정치를 주창한 김정일 위원장은 2002년 9월에 '국방공업을 확고히 앞세우는 것과 함께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켜 인민생활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을 새로운 경제발전 전략으로 제시했다. 이는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이전 시기의 전략과 연속선상에 있다.

이를 '강성대국 건설론'에서 경제발전 전략으로 제기하는 '과학기술 중시 정책'과 함께 결합시키면, '국방 과학기술'을 우선 발전시키면서 그 결과를 바탕으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겠다는 전략이 된다. 북한이 확보한 인공위성-미사일 관련 기술과 핵 기술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전략은 허황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공위성-미사일 관련 기술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과 겹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군사적 의미로만 국한시켜 해석하는 것은 너무 좁은 시야이다. '우주산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공위성 관련 기술은 그 자체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최첨단 산업이면서 동시에 그 기술들이 상품생산에 활용되기 시작하면 탁월한 기술 경쟁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항공우주 시장의 규모가 대략 연간 4000억 달러에 달하지만 이를 일부 선진국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그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북한의 일반 상품과 관련한 기술은 아직 많이 뒤떨어져 있지만 군수 부문에서 이미 인공위성-미사일 관련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이를 민수로 전환하기만 한다면 북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원천이 될 수 있다.

물론 군수를 민수로 전환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북한 경제구조의 특징을 살펴보면 이러한 전환에 긍정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 북한 지도부는 1970년대부터 '제2경제'라는 이름으로 군수 관련 경제를 일반 경제와 분리해 우선적으로 보장해왔다. 말 그대로 군수 분야가 우선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위한 조치였지만, 1990년대 경제 위기 상황에서 군수 관련 분야가 일반경제 분야보다 피해를 훨씬 덜 받을 수 있게 보호하는 기능도 했다. 따라서 낙후된 경제를 빠른 시일 내에 끌어올리려는 오늘날이 과거 어느 때보다 군수에서 민수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과 요구가 강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필요성과 절박함이 군수-민수 전환에 대한 저항력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북한 지도부는 '제2경제'를 일반 경제와 분리해 운영하면서도 유사시에는 민수 시설을 군수 시설로 전환하기 쉬운 체제를 구축했다. 예를 들어, 일정 규모 이상의 생산 현장에는 반드시 군수 관련 시설을 설치하게 했다. 따라서 이미 북한 경제는 민수와 군수의 연결고리가 강하고 그 거리가 상당히 가깝게 형성되었다. 이제는 이 구조를 역으로 이용해 군수를 민수로 전환하기 쉬운 체제를 만들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안팎으로 '상황'만 마련된다면 의외로 쉬울 수 있는 일이다. 미국과 대립 상황을 끝내고 화해, 공존 상황으로 바꾸어야하는 실질적인 이유이다. 즉, 미국과 군사적 대립 상황을 끝냄으로써 군수 부문에 과도하게 몰려 있는 자원 및 인력, 기술들을 최대한 빨리 민수로 전환해야 북한 경제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북은 '과학기술과 생활의 밀착화'라는 말을 자주하고 있다. 과거 '경제발전과 과학기술 발전의 일체화', '과학기술과 생산의 일체화'라는 용어로 표현되었던 정책이다. 현장 중심의 과학기술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뛰어난 과학기술, 즉 국방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을 위해 적극 활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군사적 긴장도가 완화된다면 북한 경제에서 군수-민수 전환이 훨씬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광명성 2호 발사 이후 '군수의 민수 전환 프로젝트' 가동

실제로 광명성 2호 발사가 있던 2009년 4월 5일자 <조선신보>에서는 우주개발 과정에서 확립된 첨단 과학기술을 다른 부문으로 이전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고 하면서 기술 이전의 영문표현인 '스핀 오프'(spin-off)를 직접 언급했다. 인공위성 시험발사를 통해 확인한 북한의 군수 관련 기술을 민수로 전환해 경제발전을 이룩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2009년 4월 7일 <로동신문>은 '강성대국 대문을 두드렸다'는 제목의 정론에서 광명성 2호 시험발사를 통해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력을 과시했고 이는 과학기술을 앞세워 2012년 강성대국 대문을 열겠다는 계획이 구체화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러한 '군수의 민수 전환 프로젝트'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위한 인사 조치가 광명성 2호 발사 직후 단행된 국방위원회 조직 개편 때 이루어졌다. 2009년 4월 9일 단행된 국방위원회 조직 개편에서 기존에 9명이던 국방위원의 수가 13명으로 대폭 늘었다. 모두 5명이 새롭게 국방위원이 된 셈이다. 당시 새롭게 국방위원으로 선임된 사람 중에서 '주규창'이라는 사람이 바로 새롭게 시작될 '군수의 민수 전환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주규창이 책임지고 있던 노동당 군수공업부 제1부가 로켓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이므로 광명성 2호 발사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지위가 상승했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너무 단순한 분석이었다. 그가 계속 로켓 개발 업무를 담당할 예정이라면 굳이 국방위원으로 새롭게 선임할 필요가 없었다. 음지에서도 충분히 일을 잘하고 있던 그를 양지로 내놓는 이유는 그의 능력을 음지가 아니라 양지에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단순한 논공행상 수준에서 국방위원으로 위촉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광명성 2호 발사 시험을 통해 만천하에 공표한 인공위성-로켓 제작 기술을 생산현장에 적극 도입하는 일을 맡았다. 실제로 주규창은 김정일 위원장이 중요한 기계공업관련 중요 생산현장을 현지지도할 때 항상 수행했다. 그는 당 기계공업부장의 직책을 맡았다. 기계공업 전체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CNC : 군수의 민수 전환 프로젝트(Spin-off)의 대명사

북한의 'Spin-off 전략'은 2009년 8월 '최첨단을 돌파하라'라는 <로동신문> 정론으로 유명해진 'CNC'로 구체화되었다. CNC란 Computer Numerical Control의 약자로서 컴퓨터를 통해 수치제어하는 공작기계, 혹은 기계장치를 뜻한다. 보통 CNC란 CNC 공작기계를 뜻하는데, 북한에서는 이것의 의미가 좀 더 넓어서 컴퓨터를 이용해 정밀하게 수치제어를 하는 기계장치를 모두 뜻한다.

작업자가 손으로 일일이 부품을 깎고 수치를 측정하는 작업방법으로는 정밀한 기계장치를 만들기 어렵다. 작업의 한계가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재료의 낭비도 많다. 무엇보다 기계의 정밀도를 보장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고도의 정밀도를 요구하는 기계장치(대표적으로 인공위성 발사체)는 정밀한 CNC 공작기계를 활용해야만 만들 수 있다. 인공위성 관련 기술들을 자체 보유한 국가들을 일컫는 '스페이스 클럽' 국가들은 대부분 최첨단 CNC 공작기계 제작 기술을 보유한 국가이기도 하다.

결국 2009년부터 북한 정책의 핵심이 된 CNC는 김정일 위원장이 제시했던 '국방공업을 우선시하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겠다'는 전략의 구체적인 정책이라 할 수 있다. 2009년 4월 광명성 2호 시험발사는 CNC를 중심에 둔 경제발전 전략에 힘을 실어주고 군수의 민수 전환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위한 조치였다. CNC를 김정은의 업적이나 김정은 체제와 연결시킨 기존의 주장들은 모두 이러한 흐름을 살피지 못한 오류라 할 수 있다.

▲ 2010년 8월 2일 평양에서 열린 집체공연 '아리랑'에서 '컴퓨터제어기술(CNC)'을 선전하는 매스게임이 등장했다. ⓒ연합뉴스

북미관계 정상화 : Spin-off 전략을 위한 전제 조건

하지만 이러한 경제발전 전략을 성공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어 원래 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군사 부분에 몰려 있는 첨단 기술이나 우수한 인력 등을 민수로 이전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긴장감이 완화되어야만 한다. 군사적 긴장 완화의 핵심 사항은 바로 북미관계 정상화라 할 수 있다. 북한이 이를 계속 요구하는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방에 대한 부담이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의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 북미공동코뮈니케 체결 당시 손에 잡힐 듯하던 관계 정상화의 결실은 오늘날까지 요원하다. 2012년으로 터닝포인트를 지정한 북한의 입장에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2009년 4월 광명성 2호 발사 시험, 2009년 5월 2차 핵실험을 진행한 뒤 곧바로 최첨단 돌파 전략을 수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핵 물질과 장거리 운송 수단을 확보했음을 공개하면서 '핵무기를 통한 비대칭 전략'으로 군사적 여유를 확보하고 민수 이전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2009년 이후 급박하게 추진된 경제발전 전략

CNC를 통한 생산현장의 기술 수준을 한꺼번에 업그레이드하려는 경제발전 전략은 계획보다 늦어진만큼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이미 1990년대 중반 '범용 CNC'라고 할 수 있는 1계통 CNC 공작기계를 제작했던 북한은 2009년부터 2계통 CNC 공작기계라고 할 수 있는 5축 CNC를 생산했고,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 개최 즈음에는 9축 CNC를 생산했다. 2011년 북한의 핵심 기계제작공장인 희천종합공장이 CNC 전용 제작 공장으로 완전히 바뀔 당시 CNC 공작기계를 생산하는 '어미 CNC'라 할 수 있는 '11축 복합가공중심반'을 제작했다고 한다. 2011년 10월에 공개된 희천련합기계종합공장은 규모나 설비 수준 등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 판단하면 북한의 CNC 기술은 세계 10위권 안에는 충분히 들고 톱5 안에도 들 수 있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의 대형 생산현장들이 개보수 작업을 거치고 새로운 기술을 적용해 재가동에 들어갔다. 비날론 공장, 비료공장을 비롯한 함흥 지역의 화학공장들이 전면 재가동할 수 있게 되었고, 성진제강련합기업소에서는 전량 수입해야 하는 코크스를 사용하지 않는 제철방법을 완성시켰다. 2009년 12월(성진), 2011년 10월(함흥), 11월(자강도)에는 이러한 성과들을 일단락하면서 해당 지역의 노동자, 과학자, 기술자들을 평양으로 초청해 환대해주는 행사를 진행했다.

개별 생산현장의 업그레이드는 'CNC화', 혹은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현대화'는 노후 생산설비를 새 것으로 교체하면서 연속식‧흐름식으로 바꾸는 것을 말하는 듯하고, 'CNC화'는 이러한 설비의 운용을 컴퓨터를 이용해 자동으로 제어하는 수준까지 실현시킨 것을 말하는 듯하다. 낡은 설비들을 새로운 설비로 교체하는 사업은 이전과 달리 급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과거 북한의 기술혁신은 기존의 생산방식을 유지해 할당된 생산계획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혁신 과제를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존의 생산방식을 완전히 중단한 상태에서 새로운 기술로 생산 공정 전반을 업그레이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과거의 생산방식을 잠시 중단하더라도 새로운 생산방식을 제대로 도입하면 늦춰진 생산일정을 짧은 시간 안에 보완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재원 마련이 쉽지 않은 상태에서 생산현장의 급속한 개조 프로젝트는 예상보다 더딜 수밖에 없었다. 북한 언론에서 연이어 생산현장의 현대화, CNC화에 대해 보도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옛날 모습을 탈피하지 못한 곳이 남아있었다. 기초 토목공사에 중장비가 동원된 모습보다 개인 장비로 수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그대로 나오기도 했다. 대풍국제투자그룹이 2010년부터 10년 동안 총 1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유치를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처였다고 볼 수 있다.

2009년부터 국방 비중을 조금 줄이면서 경제발전 전략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미국과 관계가 완전히 정상화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방 관련 활동을 완전히 줄일 수 없었다. 따라서 북한은 2009년 공개 실험했던 인공위성-로켓 기술과 핵 관련 기술을 더욱 연마할 수밖에 없었다. 핵 기술과 관련해서는 영변 지역에 대규모 우라늄 농축 설비를 완비해 가동에 들어갔고 자체적으로 경수로 발전소를 짓기 시작했다. 인공위성 기술과 관련해서는 시험통신위성 수준에서 지구관측위성 수준으로 발전했고 예상 수명도 2년으로 늘어났다. 로켓 관련 기술과 관련해서는 사거리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추력이 늘어났을 것이며 자세 제어 수준도 늘어났을 것이다. 또한 정식 발사대가 완비되었다. 핵관련 기술과 관련한 성과는 2010년 미국 핵과학자를 평양에 초청하여 공개했고 인공위성-로켓 기술과 관련해서는 이번에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요약해보면

이전 시기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과 관련한 움직임을 위와 같이 살펴보고 나면 이번 인공위성 발사 계획이 단순한 이벤트성 사건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적 구상 속에서 실행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체제 안정이나 미국에 대한 협박용이라기보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계산된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은 1990년대 후반부터 뒤쳐진 경제를 급속히 끌어올리기 위해 국방 부분에서 확보하고 있던 자원들을 민수로 전환하는 계획을 세웠다. 국방 부분에 몰려 있던 자금뿐만 아니라 인력, 기술을 활용하지 않고서는 낙후한 경제를 빠른 시일 내에 끌어올릴 수 없다고 판단한 지도부는 미국과 대결구도를 끝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2001년 미국에서 부시 정부가 등장한 이후 이전까지 진척되던 관계 정상화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에 북한은 시간을 좀 더 두고 비대칭 전략을 위해 핵 관련 기술 개발에 더욱 매진했다. 그만큼 민간 경제 회복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국방 부문에 대한 투자가 계속 되었고 이는 2006년 핵 실험과 미사일 시험을 통해 결실을 맺었다. 이러한 결실은 미국의 행동을 바꾸었다. 2009년 두 번째 핵 실험과 인공위성 발사 시험을 통해 미국에 비대칭 전략이 상당한 수준 갖추어졌다. 이로 인해 부시 행정부의 전략이 대폭 수정되는 결과를 낳기는 했지만, 여전히 관계 정상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9년 이후 일부 국방비와 인력, 기술 등을 민간으로 돌릴 수는 있었지만 충분치는 않았다. 예전보다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방 부문에 대한 투자는 일정 수준 유지되었다. 경제 발전 전략에 투입되었으면 더욱 큰 성과로 드러날 수도 있을 자원들을 여전히 국방 부문에 투자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0년 말까지 왔다.

2012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북한은 핵 관련 기술의 발전을 공개했다. 우라늄 농축 시설과 경수로 개발 계획을 공개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행동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고 2011년에 들어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각종 협상이 진행되었다. 2011년 12월 예정되었던 북미 합의가 2개월 연기되기는 했지만 결국 이뤄졌다. 관계 정상화를 위한 일보 전진이 이루어진 것이다.

투자에 대한 '환급 가능성'을 따진다면…

하지만 이제는 터닝포인트로 정해진 시간이 돼버렸다. 관계 정상화를 위한 느슨한 약속인 '2.29 합의'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아직은 가능성이 높아진 것일 뿐이다. 오히려 이전 북미 합의 수준보다 못한 상태였다. 손에 쥔 성과가 아직 없는 상태에서 3년 동안 준비한 인공위성-로켓 관련 기술은 다음 단계에 올라섰다.

기술 성취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북미관계 정상화가 긍정적으로 진척되는 상황이라면 발사 시험을 진행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리 계획되어 있던 2012년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상황을 일단락 짓는 행위가 필요해졌다. 진전된 수준의 인공위성과 로켓 기술을 공개함으로써 2009년 이후 국방 부문에 투입한 노력의 결실을 맺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원래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핵과 미사일 관련 협의는 별도로 진행되었다. 또한 미사일 협의에서 인공위성 관련 내용은 또한 별도로 진행되었다. 위성 발사체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미사일 발사를 유예하는 대신 보상을 해주고 인공위성 발사는 미국이 대리해준다는 것이었다. 최근 북미 합의 수준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오히려 다음 단계에 진행될 미사일 관련 협상이나 인공위성 관련 협상에서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면 지금까지 상황을 명백히 공개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광명성 3호의 첫 발사를 그냥 실패로 끝맺음하고 재발사를 하지 않으면 인공위성-미사일 협상은 2009년 수준보다도 더 후퇴한 상태에서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이 이루어진 결실에 대한 보상은 받기 힘들게 된다. 달리 말해, 그 사이 투입된 국방 자원은 경제적 효과로 되돌려 받을 수 없게 된다. 관계가 좋아져 국방 부문에 대한 비중이 줄어들었다면 민간 경제 부문으로 돌려 경제적 선순환으로 이어졌을 자원이 국방 부문에 그냥 매몰되어버리는 것이다. 반면 재발사를 성공하게 되면 앞으로 진행될 협상이 2009년이 아니라 2012년 수준에서 진행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시기 투자에 대해 '환급 가능성'이 높아진다. 북한으로서는 재발사를 강행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위성 제작, 발사, 운영 기술을 확보했음을 세계에 공표하면 북한 자체의 기술 수준에 대한 신뢰도도 높아질 뿐 아니라 앞으로 수출하게 될 북한 제품에 대한 신뢰도도 높아질 수 있다. 우주산업 자체에서도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우주산업과 연관성이 큰 분야에서도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성대국 건설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했던 2012년을 광명성 3호 발사로 맺음하려는 전략이 나왔을 것이다. 오랜 기간 제재를 당해왔기 때문에 미국에 의한 제재 수준이 더 나빠질 여지가 없다. 오히려 북중관계가 사상 최고 수준에 도달했으므로 제재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되니 광명성 3호 발사는 북한 입장에서 손해보다는 이익이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북한 지도부는 올해가 가기 전에 어떻게든 광명성 3호를 우주에 올려놓고 싶을 것이다.

● 필자 강호제

서울대 물리학과 졸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북한 과학기술정책사) 석사, 박사
<북한 과학기술형성사 1> (2007, 선인) 저자
<민족21> '에피소드로 본 북 과학기술사' 2009~2011년 연재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서 박사 후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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