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피스는 "후쿠시마 사태는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촉발되긴 했지만, 원전 사고의 핵심적 이유는 정치적 영향력과 산업계가 주도해 만든 규제 등 제도상의 실패"라면서 핵발전소의 불안정성에 대한 거듭된 경고가 축소되고 무시됐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서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대응'을 집필한 데이비드 보일리 프랑스 핵·방사성물질감측연구소장은 일본의 긴급대응 계획은 전혀 기능하지 않았고 주민 대피 절차도 혼란스러웠으며 많은 주민들이 불필요하게 방사능에 노출됐다고 비판했다.
보고서는 일본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거듭해서 축소했음을 보여준다. 2011년 3월 12일 일본 정부는 방사능 유출량은 많지 않을 것이며 반경 20km 밖으로는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2주 후 정부는 20~30km 지역 주민들에게 대피를 권했고 4월에는 대피구역 반경을 50km로 늘렸다.
보일리 소장은 "3월 25일 일본 원자력위원회가 총리실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 4호기 인근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에서 멜트다운이 일어날 경우 도쿄(東京) 일대의 많은 부분을 포함한 반경 170~250km 지역의 강제 대피가 불가피했다"면서 이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가능한 시나리오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전날 발표된 일본 민간 검증위원회의 보고서 내용과도 동일한 부분이다.
▲28일 외신에 개방된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 내부의 모습. ⓒ로이터=뉴시스 |
낙진 예측 보고서, 총리실 패스하고 주일미군 손에
방사능 낙진이 떨어지는 패턴을 예측하는 소프트웨어도 적절히 활용되지 못해 일부 주민들은 오히려 방사능 오염이 덜한 곳에서 심한 곳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스피디(SPEEDI)라고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일본이 130억 엔(약 1800억 원)을 들여 개발한 것이다.
보일리는 "소프트웨어(스피디)는 한 초등학교 건물이 방사능이 퍼져가는 길목에 위치한다고 예측했지만 이 학교 건물은 심지어 임시 대피소로 쓰였다"면서 "수천 명이 매우 심하게 오염된 지역에서 며칠 동안 머물렀다"고 전했다.
그러나 스피디에 기반한 낙진 예측 보고서는 사태를 총지휘한 총리실에는 보고조차 되지 않았다. 보일리 소장은 스피디를 활용한 첫 예측 보고서가 3월 11일 오후 9시 12분 처음 나왔고 다양한 시나리오에 기반한 향후 5일 간의 낙진 경로 예측이 173쪽으로 기술돼 있었지만 총리실에는 전달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그로부터 3일 후인 14일 일본 외무성을 거쳐 주일미군에는 전달된 것으로 확인돼 충격을 주고 있다. 일본 국민들이 보고서의 존재를 안 것은 그보다 9일 후였다. 총리실은 스피디의 존재를 안 이후에도 예측 결과를 공표하거나 국민들을 보호하는데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다.
규제 대상이 규제 기준 만들어
그린피스는 어떻게 후쿠시마 사태와 같은 최악 수준의 재난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핵산업 규제에 지나친 정치적 영향력이 개입돼 있었다"면서 업계와 당국 간의 "긴밀한 연대"를 언급했다.
보고서는 "도쿄전력 내부의 문제, 취약성, 부패가 드러나도 규제 당국은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충분히 강력한 수단을 동원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규제를 받아야 할 산업계가 오히려 규제 기준을 만들어 온 관행도 사태의 주된 원인으로 꼽혔다.
그린피스는 "우리는 후쿠시마 사태로부터 원자력은 절대 안전할 수 없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면서 한편으로 핵 체제를 엄밀한 공공 감시 하에 두고 투명성을 요구하는 가운데 신재생에너지 개발 등 대안 에너지원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단체는 "후쿠시마 사태를 지켜본 이후 우리의 결론은 '핵 안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직 핵 위험만이 존재했다"고 적었다. 이들은 보고서 서문을 다음의 질문으로 마무리했다. "우리는 배울 준비가 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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