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33세 청년의 66일 단식투쟁이 거둔 인간승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33세 청년의 66일 단식투쟁이 거둔 인간승리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중동 최근 취재 <2> 팔레스타인 활동가의 싸움

일기예보를 업으로 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중동의 겨울 날씨만큼 까다로운 것이 없을 듯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날씨가 바뀌길 거듭한다. 2012년 2월 하순의 팔레스타인 날씨가 그랬다. 먹구름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우산을 망가뜨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이 개이고 태양이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다간 곧 한두 시간 만에 하늘이 흐려지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진눈깨비마저 내렸다.

이런 날씨는 유혈충돌과 소강상태를 되풀이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불안정한 정세를 되비추는 듯했다. 2012년 새해 들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뜨거운 감자 하나를 꼽자면 65일 동안 이어졌던 카데르 아드난(33.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인 이슬람 지하드 대변인)의 단식투쟁이다. 한국 언론에는 이상스러울 만큼 아예 보도가 되지 않거나 단신으로 보도가 됐지만, 중동 현지 사람들은 카데르 아드난의 단식투쟁에 엄청난 관심을 쏟아왔다.

▲ 이스라엘의 불법 구금 관행에 맞서 감옥에서 장기간 단식투쟁을 벌인 카데르 아드난의 포스터. ⓒ김재명

이스라엘의 못된 관행에 도전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사건의 개요를 먼저 정리해보자. 지난해 12월 17일 팔레스타인 북부도시 제닌에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스라엘 병사들이 카데르 아드난(33)의 집을 들이닥쳤다. 그들은 아내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아드난을 수갑 채워 잡아갔다. 생업으로 빵을 구워 파는 제빵사인 아드난에겐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인 이슬람 지하드(Isalm Jihad)의 대변인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왜 체포됐는지, 구체적 혐의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채 아드난은 이스라엘 감옥에 갇혔다. 그것은 이른바 '행정 유치'(administrative detention)에 따른 불법 구금이었다.

1967년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한 뒤 지금껏 이스라엘은 '행정 유치'를 내세워 '테러분자'로 의심이 가는 인물이라면 무조건 잡아다가 가두곤 했다. 팔레스타인 투쟁가들을 기소도 하지 않고, 법정에서 피고가 자신을 변론함으로써 유무죄를 다툴 기회조차 주지 않는 채, 최장 6개월까지 억류하고 이어 또다시 6개월씩 추가로 구금기간을 연장해왔다.

한마디로 못된 관행이었다. 분명한 인권침해였지만, 관행처럼 21세기 이스라엘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는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져 왔다. 팔레스타인 정치범들을 돕는 인권단체인 ADDAMEER('양심'이란 뜻의 아랍어. 1992년 출범)의 자료에 따르면, 2012년 2월 현재 아드난처럼 이스라엘 감옥에 기소도 없이 갇힌 팔레스타인 활동가는 309명에 이른다. (참조 웹사이트http://www.addameer.org/ )

아드난은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이스라엘의 못된 관행에 정면 도전하고 나섰다. 체포된 다음날부터 즉각 석방과 수감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이 길어질수록 아드난의 건강은 나빠졌다. 병원으로 옮겨진 아드난의 체중은 막판에 30Kg 가까이 줄었고,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의 단식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스라엘 감옥에 있던 수백명의 죄수들이 함께 단식투쟁에 들어섰다.

▲ 동조 단식중인 라말라의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의 눈엔 핏발이 서 있다.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이가 팔레스타인인민당(PPP) 간부 이삼 바케르 ⓒ김재명

"그를 살리는 것은 우리 자신 살리는 것"

아드난의 단식이 장기화되면서 이스라엘에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를테면, 아드난이 단식 61일을 기록하던 시점에서 유엔의 팔레스타인 인권특사로 활동하는 리처드 포크(미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국제법)는 "카데르 아드난을 살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것"(Saving Khader Adnan's life is saving our own soul)이라는 글을 <알자지라> 온라인에 실었다.

포크 교수는 "팔레스타인 죄수 아드난의 단식은 오랫동안 이어진 점령상태 아래서 견디기 어려운 이스라엘의 잔혹성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축소판"이라며 이스라엘을 비판했다. 아울러 그는 국제법 전공자답게 "이스라엘의 행정 유치는 사법제도의 테두리를 벗어난 구금(extra-legal form of imprisonment)이며 전시 하에서 민간인 보호를 규정한 1949년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는 것"이라 지적했다.

▲ 죄수복을 입고 아드난처럼 분장한 채 시위에 나선 팔레스타인 활동가들 ⓒ김재명
"팔레스타인 죄수, 인간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사회도 들썩였다. 많은 활동가들이 동조단식에 들어가고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라말라 시내에 자리한 적십자사 건물로 갔더니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천막 아래서 6일째 단식투쟁 중이다. 그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타프 엘레얀. 60대 초반의 그녀는 얼굴을 가리는 이슬람 특유의 여성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눈매만큼은 매우 빛났다.

1987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1차 인티파다(봉기)가 터질 무렵, 당시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샤미르를 죽이려다 실패해 6년 동안 옥고를 치렀던 그녀는 이스라엘 감옥을 떠올리며 "땅위의 지옥이 따로 없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정치범들을 살아 숨을 쉬고 생각을 하는 인간으로 보질 않고 동물을 다루듯 한다"며 치를 떨었다.

그녀 말고도 텐트 안에서 함께 단식을 하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이스라엘 감옥의 악몽을 기억하는 이들이었다. 진보정당인 팔레스타인인민당(PPP) 간부인 이삼 바케르도 그러했다. 40대 중반 나이인 그는 "20대부터 이스라엘 감옥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기에 이젠 이력이 났다"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결혼해 아이를 셋 두고 있는 그는 "아내가 엔지니어 전문직이어서 나는 투쟁활동에 전념할 수 있다. 직업적 투쟁가인 남편을 이해해주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다.

인권 사각지대, 이스라엘 감옥

현재 팔레스타인에는 5000명가량의 죄수가 수감돼있다. 대부분이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서 투쟁하다 끌려온 정치범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한때는 '야세르 아라파트의 후계자'로 꼽히던 마르완 바르구티 파타(Fatah) 사무총장도 있다. 그는 2004년에 체포돼 이른바 쌍무기징역(두개의 서로 다른 범죄혐의로 각기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채 복역중이다.

이스라엘 감옥은 인권 사각지대로 악명이 높다. 비좁은 감방에 꽉꽉 채워 넣고 일상적인 고문이나 구타, 모욕으로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잃기 일쑤다. 1년만 갇혀 있다간 몸이 망가져 폐인이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정치범들에게 군화나 위장복 등을 만드는 강제노동으로 수모를 주고, 이를 거부하면 고문을 받거나 햇볕도 안 드는 지하 징벌방에 가둬 몸이 망가지도록 만든다.

▲ 분리장벽 넘어 돌을 던지던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최루탄을 이스라엘군이 쏘기 시작하자 서둘러 몸을 피하고 있다. ⓒ김재명

한국보다 독한 이스라엘 최루탄

라말라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은 만난 다음날 대규모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서안지구 라말라에서 자동차로 50분 거리에 있는 벨린 마을에서였다. 그곳에서 다시 이삼 배케르를 만났다. 그는 핸드 마이크를 잡고 "아드난을 석방하라" "점령을 멈춰라" "정착촌 건설을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선창하며 500명쯤 되는 시위대를 이끌었다. 단식중인 점을 떠올리면, 그의 강인한 의지가 버팀목일 것이다.

그렇게 시위대가 2Km쯤 걸어가 멈춘 곳은 이스라엘의 대규모 정착촌 가운데 하나인 무다인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언덕이었다. 무다인과 팔레스타인 벨린 마을 사이엔 8미터 높이의 분리장벽을 가로 막고 있다. 시위대는 그 분리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 군과 대치를 했다. 곧 최루탄이 터졌다. 그런데 놀라운 발견! 과거 서울시청 앞에서 맡아보던 최루탄 가스는 싱겁게 느껴질 정도로 독했다. 이어 고무총탄이 날아들었다. 시위대는 몸을 웅크리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죄수부 장관 "이스라엘이 아드난 죽이려한다"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 쓰고 라말라로 돌아온 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청사에서 죄수부장관 이사 카라카를 만났다. 흔히 '죄수부 장관'이라 부르지만, 죄수(prisoner)라는 표현보다는 '구금자'(detainee)라는 용어를 써서 '구금자 업무부 장관'이 정식 이름이다. 이스라엘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한 부서이다. 100명을 약간 웃도는 이 부서의 공무원들은 대부분 지난날 이스라엘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던 경력을 지녔다. 이사 카라카 장관도 10년 징역을 살았다.

카라카 장관은 필자와의 짧은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이 아드난을 죽이려 한다"고 분개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이스라엘 강경파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에 대한 우리 팔레스타인의 어떤 저항도 용납하지 않겠고 어떤 양보나 타협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아드난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 이스라엘 최루탄은 한국에서 겪어보던 것보다 훨씬 매웠다. ⓒ김재명

끝내 두 손 든 네타냐후

아드난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팔레스타인 민심은 흉흉해져만 갔다. 아드난이 소속된 이슬람 지하드는 "그가 죽을 경우 이스라엘에 대한 엄청난 보복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같은 정치색을 지닌 하마스도 투쟁을 예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테러분자와의 타협이란 없다"며 큰소리치며 국제사회의 비난도 못들은 체 하던 이스라엘 정부는 당황할 수밖에 없게 됐다. 만약 그가 단식투쟁 끝에 죽는다면,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불을 보듯 뻔하고 자칫 제3차 인티파다(봉기)로 또다시 유혈사태가 터질 가능성이 컸다.(제1차 인티파다는 1987~93년, 제2차 인티파다는 2000~06년 사이에 벌어졌다)

이스라엘 강경파 언론의 칼럼들은 아드난을 '위험한 테러분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에게 행정 유치 명령을 내린 이스라엘 군사법정은 구체적 혐의를 제시하지 못해 설득력을 잃었다. 죽음으로써 순교하기로 마음먹은 아드난이 단식 66일째에 접어들던 2월 21일, 결국 이스라엘이 손을 들었다.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의 대변인은 "넉달 동안의 유치 명령이 만료되는 4월 17일 그를 석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아드난은 단식을 그쳤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지만 값진 승리였다.

목숨을 건 투쟁, 인간 승리

지금껏 팔레스타인 죄수들의 정치투쟁과 단식투쟁은 자주 있었지만, 아드난처럼 66일에 이르는 단식투쟁을 벌인 사람은 없었다. 그의 투쟁은 지난 1980년 영국 북아일랜드 감옥에서 아일랜드공화군(IRA) 출신 죄수들이 단식투쟁을 벌이다 10명이 죽은 비극을 떠올린다. 당시 27살의 보비 샌드가 66일 동안 이어졌던 단식 끝에 숨을 거두었고, 그를 포함해 모두 10명이 감옥 안에서 단식투쟁 끝에 죽었다.

당시 영국의 철혈 총리 마가렛 대처는 "옹고집과 비타협으로 10명의 젊은이들을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스라엘의 강경파 총리 네타냐후에게도 마찬가지 비난을 받아왔다. 같은 66일 단식인데 영국은 이겼지만 이스라엘은 졌다. 한마디로 아드난의 인간승리이자 팔레스타인의 승리다. 이를 기억하고 되새기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투쟁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