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군사법원은 24일(현지시간) 장애인과 어린이 등 비무장 민간인 24명의 죽음을 가져온 하디타 마을에서의 '작전' 지휘 책임을 스스로 인정한 프랭크 우터리치(31) 미 해병대 하사에 대해 더 이상의 구금은 필요 없다고 판결했다.
하디타 마을 사건이란 우터리치 하사를 포함한 4명의 미 해병대원이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후 인근의 마을을 습격해 민간인들을 공격,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이 참극을 저지른 4명과 사건을 은폐하려 한 4명 등 총 8명이 기소됐으나 앞서 우터리치 외 7명 중 1명은 무죄 방면됐고, 6명은 기소 중지로 사건이 종결됐다.
이 사건은 이라크 정부가 미국의 강한 압력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내 미군의 치외법권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게 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됐으며, 사건의 유사성 때문에 1968년 3월 베트남전 중 이뤄진 미군 '미라이 학살'의 재판(再版)이라는 평이 나왔었다.
군 검찰의 주장에 따르면 사건 당시 우터리치는 분대원 1명이 인근에서 일어난 폭발로 몸이 산산조각나 사망하자 이성을 잃고 분대원 3명을 인솔해 하디타 마을을 덮쳤다. 우터리치의 분대원은 45분간 이어진 공격에서 비무장 민간인 24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사망자 중에는 여성, 어린이와 노인이 포함돼 있었으며 휠체어를 탄 남자도 있었다. 미군들은 재판에서 자신들이 공격당한 적도 없었으며 마을에서 어떤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24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캠프 펜들턴 기지에서 열린 군사재판이 끝나고 석방된 프랭크 우터리치 미 해병 하사가 법정을 나서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일단 쏘고 질문은 나중에!"
우터리치 하사는 당시 분대원들에게 '일단 쏘고 질문은 나중에 하라'는 취지의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었다. 기소된 분대원 중 하나인 움베르토 멘도사 병장은 지난 2007년 재판에서 우터리치가 '마을 주민들이 테러범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며, 현관문을 두드린 다음 문이 열리면 바로 쏘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었다.
우터리치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이같은 명령을 내린 사실은 인정했으나 위급한 상황에서 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며 민간인들에게 해를 입힐 의도는 없었다고 항변했다.
검찰은 우터리치의 명령은 해병대의 훈련 내용에 반하는 것이라면서 적절하지 못한 지시를 내린 책임을 물어 그에게 직무유기 혐의를 적용했다. 직무유기 행위는 최대 3개월의 영창형에 처해질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과실치사 등 상대적으로 중한 혐의에 대한 기소가 철회된데 이어 이같은 직무유기죄 또한 혐의는 인정됐으나 처벌은 없게 됐다. 군 판사인 데이비드 존스 중령은 석방 이유에 대해 '플리바게닝'의 조건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법거래제라고도 불리는 '플리바게닝'은 입증이 어려운 사건에 대해 피고인이 혐의를 인정할 경우 가벼운 처벌을 내리는 영미식 사법제도다. 앞서 군 검찰은 최고 종신형에 해당하는 과실치사 등 중한 혐의에 대한 기소를 취하하는 대신 피고인이 직무유기 혐의를 자백하는 사법 거래에 응했다.
또 군 판사인 존스 중령은 우터리치는 하사에서 일병으로 계급이 강등돼야 한다고 주문했지만 감봉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구금 기간 중 이혼당한 우터리치가 3명의 자식을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검찰 측이 구형한 영창 3개월, 급여의 2/3 감봉, 계급 강등 중 법원은 계급 강등만 인정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7년 가까운 재판 끝에 결국 사법거래로 끝난 재판에 대해 이라크 현지에서는 거센 분노가 터져나왔다. 학살 사건 생존자인 아위스 파미 후세인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총상을 보이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후세인은 당시 등 뒤에서 총을 맞았다.
후세인은 "나는 범인이 전 세계인 앞에서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미군 법정이 종신형을 내리길 기대했다"면서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이 민주적이고 공정한 나라라는 것을 보여줄 줄 알았다"며 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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