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만에 머문 지 40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대만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我在台灣住了四十年, 也可以算是台灣人了。)" -1987년 7월, 장징궈(蔣經國) 총통
내년 1월 14일 대만에서는 총통 선거가 치러진다. 대만 국회는 올해 총통 선거와 입법위원(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르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 대만 사람들은 세 장의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다. 총통·부총통을 선택하는 투표, 입법위원을 선택하는 투표, 정당을 선택하는 투표로 나뉜다. 아무래도 대만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다.
올해는 중화민국 건국 100년이 되는 해였다.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청조를 무너뜨리고 신중국을 대표하게 된 중화민국의 탄생이었다. 그 중화민국 정부가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고 1949년을 전후해 대만으로 쫓겨왔다. 이후 '중화민국'은 대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렇게 대만섬에서 60여년 유배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중국을 대표하던 중화민국 정부는 점점 본토화되면서 '대만'만의 중화민국이 되었다.
대만이냐 중화민국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대만에서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민주화가 시작된 이래 '중화민국'이라는 정체성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30여 년 전에는 대만인들 중에 자신이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90% 이상이었다. 그러나 최근 대만정부의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중국인'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30%를 넘지 못 하고 있다. "나는 오로지 대만인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65%, "나는 대만인이자, 또한 중국인이다"라는 사람이 18%, "나는 중국인일 뿐이다"라는 사람이 12%로 집계됐다. 대만 사람들의 국가 정체성에 얼마나 큰 혼란이 생겼는지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 위기에는 사실 전임 총통인 리덩후이(李登輝)와 천수이볜(陳水扁)의 영향이 컸다. 두 전임 총통은 각각 1988년~2000년, 2000년~2008년까지 햇수로 약 20년간을 집권했다. 리덩후이 총통은 재임기간 중 국가정체성과 관련하여 몇 차례 변화를 추구했다. 처음에는 장제스、장징궈 총통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정체성을 계승했다. 이후 '대만에 있는 중화민국(中華民國在台灣)'을 주장했고, 마지막에는 대만과 중국이 '특수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特殊的國與國關係)'라는 소위 '양국론'을 내세웠다. 대만이나 중국의 정치 무대에서 발견하게 되는 흥미로운 점은, 호칭 속에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리덩후이 총통이 대만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변화무쌍한 호칭들을 사용했지만, 그 본질은 결국 '두 개의 중국'을 기정사실화하고 싶은 것이었다.
천수이볜은 2000년 총통에 당선된 후, 임기 초부터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중국을 자극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과의 교류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다시 한번 집권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는 반응하지 않았고 못마땅해 했다. 천수이볜 총통은 자신의 부단한 구애가 계속 묵살되자 '일변일국론(一邊一國論)'을 외치며 중국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리덩후이 총통으로부터 계승한 양국론이라는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천 총통은 집권 2기 중에 대만의 주권을 결정하는 국민투표까지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 속에서 대만 사회의 정체성 혼란은 심화될 수 밖에 없었다.
2008년 마잉지우(馬英九) 국민당 주석이 총통에 당선되고 다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후에도 대만의 국가정체성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매 선거 때마다 쟁점이 되어 왔고, 이번 총통 선거전에서도 중요 쟁점이다. 국민당의 마잉지우 현 총통은 대만이 중화민국의 일부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에 민진당의 주석이자 총통 후보인 차이잉원(蔡英文)은 "중화민국이 대만이고, 대만이 곧 중화민국이다"라고 주장한다.
1992년 컨센서스(九二共識) vs. 대만 컨센서스(台灣共識)
소위 '통독(統獨) 논쟁', 즉 '통일을 지향하느냐, 독립을 지향하느냐'는 대만사회의 정치 지형을 결정하는 주요 프레임이다. 국민당과 민진당으로 나뉘는 양대 정당의 핵심쟁점이기도 하다. '중화민국'을 지켜내려는 국민당과 '대만'을 또 하나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하는 민진당의 투쟁이다. 물론 양당 모두 선거전에서는 자신의 속내를 분명히 드러내는 것에 전전긍긍한다. 중도를 껴안아야 선거에 승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당은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두 개의 컨센서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1992년 컨센서스(九二共識)'와 '대만 컨센서스(台灣共識)'가 그것이다.
'92년 컨센서스'는 양안간의 민간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타이베이 당국과 베이징 당국이 형식상의 민간기구인 '해협교류기금회'와 '해협양안관계협회'를 각각 만들어 협상을 진행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협상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로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결렬됐다.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하나의 중국'에서 이 '중국'이 1912년에 성립된 '중화민국'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지속적인 의견 교환을 통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그 의미는 각자의 해석에 맡긴다(一個中國, 各自表述)'는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92년 컨센서스'라는 호칭이 생겨났다. 결론적으로 '92년 컨센서스'의 핵심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현 마잉지우 정부의 대중국 정책의 기본틀이기도 하다.
반면에,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후보는 '92년 컨센서스'의 수용을 거절하고, 선거 과정에서 그 대안으로 '대만 컨센서스(台灣共識)'를 제시했다. '대만 컨센서스'가 내세우는 것은 민주적인 절차(입법 혹은 국민투표)를 거쳐 대만 국민들이 생각하는 컨센서스가 무엇인지 먼저 명확히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내부적 컨센서스를 명확히 한 후 그것을 전제로 중국 당국과 협상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대만의 기업인들은 차이잉원의 '대만 컨센서스'에 대해 우려하는 분위기다. '92년 컨센서스'를 부정함으로써 기업인들 중에는 아무도 차이잉원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마잉지우 정부는 '92년 컨센서스'라는 전제 하에 중국과 대만 간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추진하고 있다. ECFA를 통해 양안간 경제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따라서 '92년 컨센서스'를 부정하고 또 다시 컨센서스를 세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차이잉원의 '대만 컨센서스'는 대만 경제계에 큰 부담이 된다. 중국 당국이 대만에 베풀고 있는 경제적 혜택과 협력조치를 거두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반 대중들은 차이잉원의 '대만 컨센서스'를 반긴다. 중국과의 경제협력 강화가 결국 중국과의 통일로 이어질 것을 걱정한다. 그래서 대만의 주권과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가 침해되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ECFA의 경제적 효과가 서민층에게는 별로 체감되지 않는 요인도 있을 것이다.
구심력과 원심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양안관계와 중화민국의 운명
현재 양안 간의 교류가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경제적인 교류이든 문화적인 교류이든 교류의 양은 증가하는데, 이념과 가치관에 있어서는 더 멀어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만인들은 중국인들과 교류하면서 더욱 좁힐 수 없을 것 같은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갈수록 가까워지고 있는 동시에 갈수록 멀어지는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과의 관계에서 가까워지려는 힘과 멀어지려는 힘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조셉 나이의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의 개념에 착안해서 얘기해 본다면, 하드파워(경제력과 군사력 등)적인 측면에서는 구심력이 작용하는데 소프트파워(문화매력 등)적인 측면에서는 원심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결국 2012년 대만의 총통선거는 '구심력'에 편승(bandwagoning)하려는 세력과 '원심력'으로 견제(balancing)하고 맞서려는 세력 사이에 벌이는 한판 승부다.
이 승부에서 중화민국의 운명도 갈릴 것이다. 1979년 미국의 단교조치로 중국을 더 이상 대표하지 못하고 나락에 떨어져버린 중화민국! 이후 대만화의 길을 걸어온 중화민국! 그리고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으로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실존의 위기를 맞이했던 중화민국! 국민당의 재집권으로 다시 그 명(命)을 유지했던 '중화민국'의 운명을 2012년 1월 다시 한 번 애처로운 눈으로 주시하게 될 것 같다. 그렇게 중화민국 100년의 해가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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