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니 전 사무총장은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서머셋팰리스 호텔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은 농업 지형이 취약하고 적절한 농업 프로그램이 없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식량생산이 어렵다"면서 "수출입도 원활하지 않고 기금 지원도 많이 못 받고 있어 식량 부족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더 많은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3월 발표된 WFP와 유니세프, 식량농업기구(FAO) 등 유엔 산하 기구들의 북한 식량사정 실태조사 결과를 언급하며 "보고에 따르면 (생후) 6~24개월 영유아들이 심각한 영양 부족을 겪고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45%가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그는 "2세 이전에 영양 섭취가 부족해 발육이 부진하면 평생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이른바 '2012년 강성대국'을 앞두고 북한이 식량을 비축하고 있다는 의혹이 지속 제기된데 대해 그는 답답하다는 듯 "(그런 의혹과) WFP, FAO, 유니세프, 식량 지원국 대표단이 북한 식량 상황을 평가하고 만성적인 기아와 절대적인 지원 필요가 있다고 하는 말 중 어느 쪽을 믿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식량이 비축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면서도 "북한 사람들은 배급에 의존하고 있는데 배급 상태가 상당히 나쁘고 생산도 수입도 없었으며 외부 지원도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라. (…)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의도적으로 식량을 비축하고 있고 그것을 풀면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주장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을 방문한 외국 외교관들이나 관광객들이 평양 등 일부 지역에 자동차와 휴대전화가 늘어나는 등 활기찬 변화가 관측된 것이 식량난을 겪고 있는 중에 가능하겠느냐는 지적에 대해 그는 "최근에 북한에 가보지 않아서 현재의 변화에 대해 잘 모르겠다"면서도 "하지만 그런 변화가 영양실조가 없다거나 사람들이 만성적으로 굶주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캐서린 버티니 전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이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머셋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
국제기구 통한 '다자간 지원' 강조…"한국은 대통령 바뀌면 식량지원 끊기지 않나"
그는 이 자리에서 WFP 등 국제기구를 통한 '다자간 지원방식'의 장점에 대해 강조했다. 그는 식량 기부국들이 특히 북한과 같은 나라에 대해 식량을 지원해야 하는지 계산을 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도 2002년 북일 정상회담 후 식량지원을 하지 않았나. 한국도 대통령이 바뀌니 정책이 바뀌지 않았나"라며 "미국도 북한과 정치적 거래를 하면서 그 시기에 지원이 이뤄졌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각국 정부가 직접 북한에 식량지원을 하게 되면 인도주의적 사안임에도 정치 논리가 개입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을 예로 들며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의) 양자간 지원이 남북관계에 도움이 됐지만 정부가 바뀌고 정책이 바뀌니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면서 "남북간 직접 식량지원이 물론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되지만 다자간 지원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과거 한국의 대북 식량지원에서 모니터링이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만약 한국 정부가 WFP를 통해 식량지원을 하게 된다면 모니터링이 투명하고 효과적으로 이뤄질 것"이라며 지난 4월 북한 외무성과 WFP 간에 체결된 양해서한(Letter of Understanding)의 내용을 언급했다.
그는 "미국과 한국이 처음부터 대규모로 지원할 필요 없이 우선 5만 톤 정도 해 보고 안심이 된다면 단계별로 높여갈 수도 있고 대표단을 파견해 직접 모니터링에 참여할 수도 있다"면서 "양해서한에 따르면 어떤 국적의 모니터링 요원도 북한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북한이 수용하고 있는 모니터링 수준에 대해 미국 NGO들도 만족하고 있다면서 "항구에서 도(道) 단위의 첫 번째 창고, 군 단위의 두 번째 창고, 수요자들의 집까지 모든 경로를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로서는 "약속된 것은 그대로 이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WFP 재임 중 22개국이 식량부족국 '졸업'…북한은?"
그는 나아가 "단기적으로는 식량지원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 북한이 스스로 다음 단계로 발전해서 식량부족이 없는 국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에 대한 해법이 식량지원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면서 농업기술을 향상시키고 보건 체계를 개선하는 등 구조적 '체질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WFP 사무총장으로 재직했을 때 베트남, 엘살바도르 등 22개국이 식량부족 국가 상태를 '졸업'했다는 사례를 들었다. 그는 "식량 지원을 받으면서도 가난을 극복하고 식량 생산량을 늘리거나 식량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면 (식량부족국을) '졸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같은 '졸업'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가 바로 한국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50년 만에 빈곤국에서 선진국으로 성장했고, 최근 새로운 정책으로 개발원조(ODA)를 늘리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면서 "같은 민족이고 문화와 기후를 공유하고 평화를 공유하고자 하는 한국보다 북쪽 이웃들에게 더 좋은 원조를 할 수 있는 나라가 있겠나"라고 물었다.
그는 한국의 발전 경험을 북한과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다면서 토양 유실을 막는 방법 등 농업 관련 전문지식과 공중보건‧교육 분야의 경험이 공유된다면 북한이 만성적인 식량난을 벗어나는 데 많은 도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간담회는 2~4일 열린 '2011 대북지원 국제회의'의 회의 경과 보고회와 함께 진행됐다. 버티니 전 사무총장은 2일 이 회의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프레드리히에버트재단, 경기도와 함께 국제회의를 공동주최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이종무 평화나눔센터 소장은 "다양한 대북 지원단체들이 서로의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하며, 긴급구호 식량지원 차원에 머물고 있는 대북지원에 대해 북한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는 개발협력 등 근본적 논의들을 하는 장"이라고 국제회의의 취지를 설명했다.
■ 캐서린 버티니 전 WFP 사무총장은? 지난 1992~2002년 세계에서 가장 큰 인도주의 지원기구인 WFP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재임시 보여준 지도력으로 세계의 기아 퇴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식량‧농업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계식량상'(World Food Prize)을 수상했다. 같은해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그를 유엔 사무국 관리담당 사무차장으로 지명했다. 국제기구에 몸담기 전에도 미국 공무원으로 관련 분야에서 일했다. 그는 농무부 식량‧소비자서비스담당 차관보, 보건부 가족지원국담당 차관보 대리 등을 지냈다. 농무부 재직시에는 모유 수유를 하는 저소득층 여성들을 위한 식단(food package)을 개발했다. 2005년 유엔에서 물러난 그는 현재 미 시라큐스대 맥스웰시민공공대학원에서 행정학 교수로 있다. 1950년생으로 알바니 뉴욕 주립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과거 미시간대 포드스쿨과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 연구원으로 몸담는 등 학자로서의 경력도 있다. 유엔 세계식량안보위원회(CFS) 자문위원과 미 국무부 국제개발처(USAID) 자문위원을 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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