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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 일본 총리는 새 매뉴얼을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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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 일본 총리는 새 매뉴얼을 만들 수 있을까

[김성민의 'J미디어'] 절망 속에서 탄생한 '미꾸라지 내각'을 보는 시선

일본 이와테현(岩手県) 오후나토시(岩手県大船渡市). 필자는 8월 초 3.11 대지진의 대표적인 피해지역 중 하나인 그곳에서 잔해 철거 작업에 참여했다.

배정받은 곳은 바닷가의 한 마을이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집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그냥 수백 채의 집이 세워져 있던 황량한 벌판이었다. 그 풍경이 주는 충격은 도쿄를 떠나면서 품었던 두려움과 불안을 한 순간에 하찮은 감정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짙고 강렬했다.

우리의 작업은 사라진 집들 아래에서 하수폐액을 들어내는 일이었다. 하수로에 다가서자 종류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의 벌레와 쓰레기가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습격해오는 악취가 전혀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시커먼 진흙더미 속에서 쓰레기들과 함께 나온 것들은 사라진 집과 사람들의 기억들이었다. 흑백사진이 담긴 앨범과 알록달록한 끈 장식이 달린 휴대폰, 누군가 구워 선물한 듯한 음악 시디와 사인이 적힌 야구공 등이 주렁주렁 밖으로 나왔다. 앨범이나 지갑은 모두 한 곳에 모아 놓았지만, 그것들이 주인을 찾아갈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 이와테현 오후나토시 지진 피해 현장 ⓒ필자 김성민

사실 모든 작업이 원활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자원봉사 네트워크에서 파견된 팀장은 활기차고 의욕적인 사람이었는데, 그는 삽이나 집게 등 작업도구의 도착이 늦어지자 우선 손으로 작업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팀원 모두 별 생각 없이 그 말을 따랐지만 지나서 돌이켜보니 아무리 작업용 보호장갑을 겹겹이 착용하고 있었다 해도 그건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스스로의 고백대로 그는 경험이 조금 더 많은 자원봉자사일 뿐이었고, 그런 그의 미숙한 리더십이 많은 사람들을 커다란 위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필자에게는 그 일이 지금 일본 사회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느껴졌다. 만약 그에게 정확한 매뉴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그가 풍부한 경험 혹은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리더였다면 어땠을까. 그랬어도 그는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시커먼 진흙 속으로 손을 집어 넣으라고 지시할 수 있었을까.

일본에서 방대한 경험과 데이터가 축적되어 만들어진 매뉴얼은 성서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 일본사회가 3.11 이후 매뉴얼을 잃어버린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고 있다.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소 문제에 대한 대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정보를 믿고 어떤 사람을 따라야 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번 대지진이 태평양전쟁에 버금가는, 일본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참사라는 각계의 진단이 그리 호들갑스러운 것은 아닌 듯 하다.

새 노다 정부는 그런 절망 속에서 탄생했다. 민주당 대표 선거 당시의 지지율 4%가 말해주는 것처럼 사실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라는 정치인의 인지도와 존재감은 매우 미미하다. 그리고 노다 총리뿐만 아니라 새로 꾸려진 내각 역시 '너무 평범한데다 실력도 미지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각이 출범한 2일, 도쿄 주식시장이 오히려 100엔이 넘는 하락세를 기록한 건 그런 싸늘한 시선의 반증이었다.

게다가 노다 요시히코가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한 건 알려진 대로 실세이면서 동시에 골칫거리인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를 둘러싼 당내의 역학관계였으니 누구도 예상치 못한 그의 승리 요인을 굳이 노다 본인에게서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지 모른다. 따라서 노다 정권의 시대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그가 승리했는가가 아니라 지금의 일본 사회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 노다 요시히코 신임 일본 총리 ⓒ뉴시스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주목할 만한 정치적 족적도 없는 그에게 처음부터 대단한 기대가 있을 리 없다. 노다 총리 본인도 원대한 포부를 나열하기보다 '촌스럽지만 우직하게 일하는 미꾸라지'를 표방하고 있다. 그걸 보여주듯 새로 출범한 내각 역시 당내융합과 재정 안정, 신속한 재해 복구 등 당장 꼭 필요한 과제들에 초점을 맞춰 꾸려졌다.

중요한 건 2년 전 정권교체와 함께 민주당이 내걸었던 화려한 개혁은 이제 없다는 점이다. 가장 자민당스러운 민주당원 노다에게 일본 사회가 바라는 건 일본 사회를 바꿀 개혁이 아닌, 일본 사회를 안정시킬 최소한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수폐액 속으로 손을 집어 넣지 않게 할 최소한의 리더십. 작업도구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게 할, 사람들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지 않을 최소한의 매뉴얼.

'평범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건지', '일본이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다는 후쿠시마 아이들의 애절한 물음(<아에라> 9월 5일자)에 지금의 일본 사회가 해 줄 수 있는 답은 아무 것도 없다. 노다 총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 대답을 위한 매뉴얼을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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