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첩보기관인 보안정보국(MI5)의 수장을 지냈던 엘리자 매닝햄-불러 전 국장의 최근 '양심선언'은 그래서 눈길을 끈다. 매닝험-불러는 지난 1일 영국 <BBC> 방송의 석학 초청 강연에서 "9.11 테러는 '범죄'일 뿐 '전쟁행위'는 아니었다"며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용어 사용 자체가 넌센스라고 비판했다.
매닝험-불러는 이 자리에서 또 중요한 말을 했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젊은 아랍인들을 단합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중동 문제의 역사적 뿌리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짚어낸 것은 첩보기관의 전직 수장다운 정확한 지적이었다.
<인디펜던트>의 중동 전문 기자 로버트 피스크도 지난 3일 칼럼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야말로 반미‧반서방 정서와 테러리즘에 동력을 공급하는 진원지라고 지목했다. 진짜 뿌리는 남겨둔 채 테러리스트를 잡겠다며 들쑤시고 돌아다녀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이다.
피스크는 9.11 테러가 발생한지 10년이 됐지만 누구도 테러의 '동기'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꺼린다면서 노골적인 이스라엘 편들기 등 미국의 중동 외교정책에 대한 반감이 이슬람 극단주의라는 요인 못지않게 중요한 9.11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9.11 테러에서 몇 명이 희생됐는지, 납치된 4대의 비행기 중 세계무역센터(WTC)로 향하지 않은 1대의 운명은 어찌 됐는지, 과연 펜타곤(미 국방부) 건물에 대한 항공기 테러공격은 실재했는지 등의 각종 음모론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이같은 '근본적 원인'에는 관심이 없다고 피스크는 개탄했다. 다음은 이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원문 보기) <편집자>
● '9.11 10주년, 세계의 시각' 시리즈 <1> 스티글리츠 "대테러전쟁, 일상화된 테러 위협과 빚만 남겼다" |
▲ 9.11 테러 당시 붕괴되기 직전 화염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WTC)의 모습. ⓒ로이터=뉴시스 |
10년간의 거짓말에 감춰진 단 하나의 '진짜 질문'
9.11 테러에 대해 수없이 많은 책이 쏟아졌다. 많은 책들은 사이비 애국주의나 자존심으로 채워졌고, 다른 책들은 미 중앙정보국(CIA)과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신화를 담고 있다. 또 몇몇 책들은 9.11 테러를 저지른 살인자들이 '소년'들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모든 책들은 단 하나의 항목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한다. 거리에서 일어난 사소한 범죄에 대해서도 순경들이 빼먹지 않고 묻는 항목, 즉 '동기' 말이다.
왜일까? 10년 동안 전쟁을 했고 수십만의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다. 미국과 탈레반에 의해 거짓말과 위선, 배반과 고문이 행해졌다. 세계는 공포로 가득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아직도 침묵해야만 하나? 9.11을 저지른 19명의 살인자들은 스스로 무슬림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중동이라 불리는 지방에서 왔다. 거기 무슨 문제가 있나?
2001년 미국에서는 수많은 사진이 실린 9.11 서적들이 발간됐다. 제목이 이 책들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신성한 땅 위에서>(Above Hallowed Ground),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은 살아남을 것이다>(So Others Might Live), <강력한 진심>(Strong of Heart), <우리가 본 것>(What We Saw), <최후의 전선>(The Final Frontier), <신을 향한 분노>(A Fury for God), <무기의 그늘>(The Shadow of Swords) 등등. '새로운 기준'을 논하고 있는 이런 책들을 보면 누구나 미국이 곧 전쟁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전에도 또 한 무더기의 책들이 나왔다. [아프간에 이어 이라크에서도] 계속되는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들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케네스 폴락 전 CIA 국장의 <위협적인 폭풍>(The Threatening Storm)이다. 윈스턴 처칠의 회고록 2권인 <심해지는 폭풍> (The Gathering Storm)에 빗댄 것이었다. 폴락은 장차 사담 후세인과 미국이 치를 전투를 1938년 영국과 프랑스가 맞이했던 [독일의] 위협에 비유했다.
폴락의 책에 담긴 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WMD)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WMD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이라크 전쟁이] "이라크 문제와 아랍-이스라엘 분쟁" 사이의 "연결고리"를 차단할 기회라는 것이었다. 즉 이라크의 강력한 지지를 잃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지배에 대항한 투쟁에서 더욱 약화될 것이라는 얘기다.
폴락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사악한 테러"를 저지르고 있다며 비난했지만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도 하지 않았다. 폴락은 철저히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서술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편견은 아랍인들의 '믿음'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폴락의 책은 엉터리이고 되는 대로 쓴 것이긴 하지만 최소한 9.11 테러가 (심지어 후세인과는 관계없다 해도) 팔레스타인 문제와 뭔가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그 이후 몇 년 동안 9.11이 남긴 상처에 대한 저작은 홍수를 이뤘다. 로렌스 라이트의 달필로 쓴 <문명 전쟁>(The Looming Tower)에서부터 9.11의 진실을 추적한 학자들의 [음모론적] 저서들까지 쏟아졌다. 몇몇 사람들은 펜타곤 밖의 비행기 잔해는 [미 공군의] C-130 수송기가 실어나른 것이라거나, WTC를 들이받은 비행기는 무인 조종됐다거나, [납치된 또 한대의 비행기] '유나이티드 93'편은 미군의 미사일에 격추됐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백악관의 비밀주의적이고 둔감하고 때때로 부정직한 발표 내용이나 사고조사위원회가 했던 거짓말을 생각해 보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음모론을 믿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가장 큰 거짓말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미국은 9.11의 배후에 사담 후세인이 있다고 말했다. 신임 CIA 국장인 리언 파네타는 올해에도 이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관련기사 보기)
영화도 나왔다. [9.11을 다룬 미국 영화] <플라이트93>은 왜 이 비행기가 펜실베이니아주 숲속에 떨어졌는지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편다. TV 스페셜 시리즈도 나왔다. 모든 시리즈는 9.11이 실제로 세계를 바꿔놓았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암살부대원들에게 침공·살인·고문을 허용하는 결과를 낳은,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 식의 위험한 주장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 중 어디에도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미국 <ITV>의 브라이언 래핑은 '이라크'를 한번 언급했지만 2003년 이라크전이라는 전쟁범죄가 9.11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9.11에서 죽었나? 약 3000명이다. 그럼 이라크전에서는? 누가 신경이나 쓰겠나?
안토니 서머즈와 로빈 스완의 신간 <열한번째 날>(The Eleventh Day)은 서방 국가들이 9.11 이후 몇 해 동안 한사코 돌아보지 않으려 했던 문제들을 지적한다. 저자들은 "모든 증거는 이들 음모자[9.11 테러리스트]들을 단결시킨 요인이 팔레스타인 문제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적었다. 이들에 따르면 테러를 기획한 자들 중 하나는 이 공격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지지함으로써 미국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미국인들은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저자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야말로 "독일 함부르크에 살았던 젊은 아랍인들을 [테러로] 몰아가는 불만의 씨앗"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9.11 테러의 동기를 심지어 공식 보고서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고 지적한다. 사고조사위원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 몇몇 위원들은 후일 "이는 민감한 부분"이라며 "알카에다가 (미국 외교정책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종교적 이념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한 위원들은 이-팔 분쟁을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알카에다가 미국에 반대하는 근본적 원인으로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를 꼽는 것은, 그들에게는 미국이 [이스라엘 지지] 정책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서머즈와 스완은 "(테러의) 동기 부분에 대해서는 헛된 말들만이 맴돌았다"고 지적했다. 공식 보고서에 [테러의 동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는 (아무도 안 보는) 각주에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계를 영원히 변화시켰다'(고 믿도록 강요되)는 범죄의 진실에 대해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 그러니 지난 5월 오바마가 네타냐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들 놀라울 것도 없다. (☞관련기사 : 5월 19일 오바마의 중동정책 연설에 대한 피스크의 칼럼 바로보기)
미 의회조차 이스라엘 총리에게 비굴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 미국인들이 9.11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한 답을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문제란 "왜 9.11이 일어났나?"라는 것이다.
* ( )는 원저자의 표기이며 [ ]는 옮긴이가 추가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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