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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줄의 글이라도 정치적으로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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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줄의 글이라도 정치적으로 써라"

[미래연 주간논평] 조지 오웰이 오늘 한국에 온다면

OO주의(主義)로 사람들을 갈라 세우는 데 이골이 나지도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래도 조지 오웰에 '주의'를 붙여놓고 우리 자신과 사회를 한 번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지 오웰이란 물론 『카탈로니아 찬가』, 『동물농장』, 『1984년』, 그리고 『나는 왜 쓰는가』,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쓴 영국의 작가를 말한다. 그의 인생역정과 사상을 전체적으로 가늠해 보지 않았지만, 위 작품들에 터 잡아 말해 보자면, 그는 민주사회주의자였다. 파시스트와 전체주의, 제국주의를 거부했고, 이를 행동으로 실천했다.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어 공화국을 위해 총을 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스스로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나는 왜 쓰는가』)고 쓰고 있을 정도다.
▲ 조지 오웰

그가 사회주의를 어떤 정치적·경제적 이데올로기로 인식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정의와 상식적인 양식(良識)'(『왜 사회주의가 지지받지 못하는가』)으로 파악했던 것은 분명하다.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의 폐해로 고통 받고 있던 영국의 가난한 노동계급에게 깊은 연대감을 느끼고 그 현실을 문학작품으로 고발했던 것은 그의 인간적 정의감과 양식의 발로였다.

그는 글쓰기의 정치성을 알아채고 인정한 작가였다. 글쓰기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였다고 하며, '돌이켜보건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 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나는 왜 쓰는가』)고 한다.

그리고 그는 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았던 자연주의자였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에서 비껴나 있는 두꺼비의 출현을 가장 매혹적인 봄의 현상으로 여겼고, 가스공장 위로 황조롱이가 날아가는 모습, 심지어 좁고 음침한 런던의 골목길에서도 봄이 주는 즐거움(『두꺼비 단상』)을 찾을 줄 알았다.

또한 그는 이미 그 당시에 '행락지' 또는 '리조트'의 특징으로 '1. 아무도 혼자 있는 법이 없다. 2. 아무도 자기 힘으로 뭘 하는 법이 없다. 3. 어떤 종류의 야생 초목이나 자연경관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4. 빛과 온도는 항상 인공적으로 조절된다. 5. 아무도 음악소리를 벗어날 수 없다.'라고 지적하는 예지(叡智)를 보여 주면서,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다.'(『행락지』)고 했다.

조지 오웰이 살았던 때로부터 70~80년이 지났지만 사람 인심과 세상사의 모습은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조지 오웰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살았다면 어떤 글쓰기를 했을까? 심화되는 소득양극화 속에서 저소득 가구, 비정규직 노동자 등이 겪는 고통에 인간적 아픔을 같이 하였을 것이다. 무상급식을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호도하고, '북한 퍼주기'라며 굶어죽는 북한 동포에 대한 인도적 지원마저 외면하면서, 부동산 개발 공약에 몰표가 쏟아지는 모습들에 대해 통렬하면서도 문학성 있는 정치적 글쓰기를 하지 않았을까?

그 뿐이겠는가, 온 사회에 넓고 깊게 뿌리박은 학벌패권, 세속적 이익을 탐하고 정치권력까지 넘보는 종교집단, 이주노동자, 새터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는 편견으로 억압하고, 경제력, 지위, 나이 면에서 자신 보다 낮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일상의 권위주의 등등이 '정의와 상식적인 양식'을 잣대로 출발하는 그의 글쓰기의 좋은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고위 법관들은 청문회나 퇴임식에서 '판사는 진보나 보수가 아니라 오로지 법의 잣대로만 재판할 뿐'이라는 식으로 정치적 중립성 신화에 투철한 변(辯)을 토하곤 한다. 정치적 글쓰기주의자 조지 오웰은 그에 대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법하다. '그런 재판은 불가능하거나, 중립의 방패막이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정치적 재판을 하였거나, 아니면 현란하고 장식적인 맥없는 판결을 한 것이리라'고.

개발을 명분으로 자연과 환경에 가하는 인공의 폭력은 또 어떤가? 강의 살아있는 흐름을 끊고, 강바닥을 온통 헤집고 강변을 콘크리트로 도배하는 4대강 사업이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채 강행되고 있다. 높은 산에는 케이블카를 설치해야 하고,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산도 허물고 숲도 베어 낸다. 자기 손으로 들 일도 없고, 자기 발로 걸을 일도 없는 골프장이 무분별하게 들어서고 있다. 산수 경개 좋은 곳이면 크게는 리조트 단지가, 작게는 펜션과 민박집이 점령하고 있다. 그 뿐이랴, 전 국토에 빼곡히 들어서 있는 사각 콘크리트 박스가 우리들 사는 '집'이 아닌가? 참으로 우리 땅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찾아보기 어렵다.

조지 오웰의 정치관, 인간관, 문학관, 자연관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멋스러움'이라는 그림으로 통합되는 것 같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람 사는 세상' 또한 바로 이 모습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우리 중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조지 오웰을 알고 공감하면 '사람 사는 세상'이 하루라도 빨리 실현될 것 같아 이런 '주의(主義)'를 한 번 주창해보는 것이다.

* 원제 : 조지 오웰주의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주간논평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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