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한 분량의 이번 폭로는 위키리크스가 이날 줄리언 어산지의 계정으로 알려진 트위터를 통해 미 국무부 외교전문 10만 건을 추가로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힌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공개된 일부 전문 내용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외교 전반에 걸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미국은 한국의 유엔총회 표결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자신들의 의도와 반대되는 표를 던졌을 때 설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 한국의 유엔 산하기구 회의 참가도 막으려 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개의 경우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수용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전문은 한국을 인도적 지원이나 에너지 협력 등 전방위적 사안에 대해 미국과 '긴밀히 협조'하겠다며 이해와 지지를 구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 위키리크스는 25일(현지시간) 주한 미대사관 작성의 외교전문 886건을 새로이 공개했다. ⓒ위키리크스 홈페이지 화면캡쳐 |
■ 美, 한국에 "왜 유엔 총회에서 그렇게 투표했나" 설명 요구
2006년 11월 20일 작성된 전문에 따르면, 미국은 당시 레바논 전쟁에서 불거진 이스라엘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유엔총회 긴급회의에서 한국의 표결 내용에 불만을 표시하며 '설명'을 요구했다. (☞레바논 전쟁 관련기사)
회의 당일인 11월 17일 미 대사관 관계자는 한국 외교통상부 관계자와 접촉해 곧 개최될 회의에서 이스라엘에 불리한 결의안에 대한 투표에는 기권하거나 반대표를 던지라고 촉구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검토할 것'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이날 유엔총회에서 한국이 레바논 사태 진상파악을 위한 국제 조사단 파견안에 찬성투표를 하자, 20일 대사관 관계자는 외교부에 전화를 걸어 설명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결의안 원안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해'(in consideration of the USG position) 원래 기권하려 했으나, 유럽연합(EU)가 주도해 발의한 수정안이 표결에 부쳐지면서 대세에 따른 투표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외교부 관계자는 EU와 일본도 찬성했지 않았냐고 강조했다.
같은해 10월 25일에도 미 대사관 관계자는 유엔의 이스라엘 관련 결의안이 '이스라엘에게 불리한 편견을 담고 있다'며 한국의 반대 투표를 촉구했다. 외교부는 '검토하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미국은 27일에도 재차 외교부와 접촉해 어떻게 됐냐고 진행 상황을 물었다.
■ 美, 한국 회의 참가까지 막으며 '이스라엘 사랑' 강요
또 2006년 8월 9일자 전문은 이날 대사관 관계자가 한국이 이스라엘 문제를 다루는 유엔인권이사회(UNHRC)에 참석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미국의 입장을 잘 알고 있으나 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모르며, UNHRC 회원국인 한국으로서는 참석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고 답했다.
한국은 11일 UNHRC 회의에 참석하기는 했으나 이날 논의된 레바논 민간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체계적 공격 행위 조사를 위한 위원회 구성안에 대한 표결에서는 기권했다.
같은해 10월 26일 작성된 전문에서도 미 대사관은 한국 외교부 당국자에게 레바논 문제를 다루기 위한 유엔 회의에서 이스라엘에 불리한 투표를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면서 이스라엘 관련 결의안을 "불균형적이고 반(反)이스라엘적"이라고 묘사했다.
미국은 또 2009년 9월에 알려져 파문을 일으킨 '골드스톤 보고서'에 대해서도 한국에 '이스라엘에 대한 편견을 불러일으키는 편향적 보고서'라고 주장하며 한국의 협조를 요청했다. 골드스톤 보고서는 이스라엘의 2008~09년 가자 공습에 대한 UNHRC의 보고서로 이스라엘이 가자 공습에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규정했다.
2009년 11월 4일 캐슬린 스티븐스 당시 미 대사가 작성한 외교전문에 따르면 미 대사관 측은 외교부 당국자를 만나 "골드스톤 보고서에 기반한 어떤 결의안에도 반대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한국도 유사한 우려를 갖고 있다면서 보고서는 중동의 평화 프로세스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전달 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도 "편견이 들어간 보고서에 '예스'라고 말할 수는 없다"며 미국에 맞장구를 쳐줬다.
■ 미국이 알지도 못하는데 '자진납세?'…'알아서 긴' 한국정부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 미 대사가 2007년 5월 8일 본국에 보낸 전문은 미국이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한국이 '오해하지 말라'며 서한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2007년 4월 14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리비아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한국이 리비아 원전 수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문제를 놓고 논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리비아 정부 관계자는 미국, 러시아, 프랑스, 아르헨티나, 한국 정부와 협의 중이라면서 "우리는 곧 한국과 협력할 것이고, 다음은 러시아, 프랑스"라고 말했다.
약 3주 뒤인 5월 7일, 미 대사관은 한국 외교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외교부 담당 국장 명의로 된 이 편지는 "핵에너지 분야에서 한국이 리비아와 협력하고 있다는 것과 관련해, 한국 정부는 원전 플랜트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며 "한국 외교부는 이 기사 내용이 긴밀한 정치적 군사적 동맹국인 미국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까 우려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사실 리비아 정부는 지난해 스마트(SMART) 원자로와 원전 플랜트 수주 등의 건으로 한국에 협력을 제안해 왔다"며 "(그러나) 관계 당국의 의견과 리비아의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외교부는 시기상조라는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스마트 원자로는 한국이 수출형으로 개발한 일체형(System-integrated Modular Advanced ReacTor) 원전 모델이다.
한국은 리비아와의 원자력 협력이 핵의학이나 공동 연구 등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더 선호한다면서 "이상의 설명이 귀관과 귀국 정부가 이 사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명확하게 알게 하기를 희망한다"고 편지에서 밝혔다. 편지를 작성한 담당 국장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추가적인 협의도 환영한다"며 "외교부를 대표해 본관은 핵에너지 및 기타 관련 영역에 있어 삼가 귀국의 협력과 지지를 바란다"는 인사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대사관은 "우리는 한국이 인도네시아 및 베트남과 핵에너지 관련 협력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들은 바 있지만 리비아 관련 소식은 금시초문"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 美 "쿠바랑 놀지마"…韓 "당연하지!"
2008년 5월 15일자 외교전문에 따르면, 이용준 당시 외교차관보는 미 대사관 차석대표(DCM)와 만남을 가졌다. 차석대표는 미국 정부가 앞장서 참여하고 있는 카스트로 정권 반대운동인 '쿠바인 연대의 날' 행사를 한국에서도 추진해 줄 것을 외교부에 당부했다.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5월 21일 백악관에서 '쿠바인 연대의 날' 행사를 가졌다.
이에 대해 이 차관보는 쿠바에 대한 한국의 입장은 미국과 매우 가깝다면서 한국은 절대 쿠바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한국과 이스라엘, 미국만이 쿠바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나라들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차석대표의 요청에 대해서는 '상의는 해보겠지만 국민들의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답했다.
2006년에도 4월 24일 만남에서도 미 대사관 측은 외교부 관계자에게 한국과 쿠바 간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외교부 관계자는 한국은 쿠바에 전혀 투자를 하고 있지 않으며 두 정부는 어떤 무역 조약도 체결한 바 없다면서, 한국 정부는 미국이 주도한 쿠바 제재안을 1989년부터 변함없이 지지하고 있으며 쿠바와 한국 간에는 지난 6개월 간 어떤 고위급 외교접촉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날의 접촉은 같은해 3월 크리스틴 샤네 유엔 인권위 쿠바 담당 특사가 보고서를 통해 미국의 쿠바 제재조치를 비판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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