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일제는 왜 통영에 '해저터널'을 팠을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일제는 왜 통영에 '해저터널'을 팠을까?

[강제윤의 '통영은 맛있다']<21>

김삿갓, 통영에 출몰하다

이 땅 구석구석 방랑시인 김삿갓의 자취가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 통영에도 김삿갓이 다녀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역시나 시 한 편을 남겼다. 김삿갓이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사라진 곳은 '착량묘'다. 착량묘는 충렬사처럼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 후기 착량묘 앞뜰에는 호상재라는 작은 초당이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때로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기도 하는 장소였다.

어느 날 통영 선비들이 호상재에 모여 창꽃 지짐(진달래 화전)을 부쳐 먹으며 시회를 열었다. 시회가 무르익을 즈음 허름한 입성의 나그네 하나가 나타났다. 나그네는 자신에게도 화전과 술을 달라고 청했다. 선비들은 나그네를 조롱했다. 시를 한수 읊어야 먹을 자격이 있다 했다. 그러자 나그네는 자신은 글을 쓸 줄 모르니 시를 읊겠다고 했다. 선비 하나가 나그네가 읊은 시를 옮겨 적기로 했다. 시를 읊은 나그네는 화전과 함께 거푸 몇 잔의 술을 얻어 마신 뒤 훌쩍 떠나버렸다. 한자로 옮겨 적은 시를 찬찬히 읽어 본 뒤에야 선비들은 깜짝 놀랐다. 나그네가 그 유명한 김삿갓인 것을 알아챈 것이다. 다들 뒤늦게 가슴을 쳤지만 김삿갓은 이미 자취를 알 수 없었다. 그때 김삿갓이 남겼다는 시다.

"작은 시냇가에 솥관을 세워놓고,
흰 가루 푸른 기름으로 두견을 익히도다.
두 젓가락으로 집어 드니 향기가 입안에 가득,
한해의 봄빛이 뱃속에 퍼지네."

정관탱립소계변(鼎冠撑立小溪邊) 백분청유자두견(白粉靑油煮杜鵑)
쌍저협래향만구(雙努狹來香滿口) 일년춘색복중전(一年春色腹中傳)


▲최초의 이순신 장군 사당, 통영 착량묘. ⓒ강제윤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잇는 해저 터널의 통영반도 쪽 입구 오른쪽 골목으로 30미터쯤 가면 언덕에 착량묘가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착량묘 입구에 서면 통영운하와 서호바다, 미륵산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밤에 이곳에서 보는 통영운하 풍경은 통영 8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절경이다. 착량(鑿梁)이란 뚫어서 다리를 만든다는 뜻이다. 통영 말로는 판데목이라 한다. 판데목은 지금의 충무교 자리였다. 착량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불려온 이 부근 지명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함대에 쫓겨 왜군이 떼죽음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판데목은 '송장나루'라 부르기도 했었다. 왜군이 그만큼 많이 죽었던 데서 연유한 이름일 것이다.

그 판데목(鑿梁)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모신 사당이어서 착량묘다. 이순신 장군을 모신 수많은 사당 중 최초의 사당이다. 1598년(선조 31년) 노량해전에서 장군이 전사한 이듬해 장군을 따라 종군했던 수군들과 이 마을 주민들이 뜻을 모아 초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린 것이 시초다. 착량묘에서는 장군이 전사한 날 제사를 모시는 기신제와 설, 추석 두 번의 제사를 모신다.

이충무공 장계에는 장군의 함대가 미륵도 당포에서 왜적을 격파한 날(1592년 7월 10일) 당포 앞바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와 이곳 착량 앞바다에서 합류해 하룻밤 진을 치고 유숙한 뒤 고성 당항포로 가서 왜적을 격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인연으로 이 자리에 사당이 세워진 것이 아닐까 싶다. 착량묘 바로 아래로는 해저터널이 뚫려있다.

미륵도, 운하를 판 뒤 섬이 되다

▲용문달양, 용문를 지나면 밝은 세상이 나온다. ⓒ강제윤

오늘도 나는 동피랑 작업실을 나서 해저터널로 간다. 강구안 해변을 지나면 통영 여객선 터미널 앞부터 해저터널 입구까지는 해변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오늘은 미륵도에 있는 통영도서관에 다니러 가는 길이다. 늘 그렇듯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 뒤 나는 다시 해저터널을 지나 동피랑으로 돌아갈 것이다. 바다 아래로 뚫린 터널을 빠져나가면 미륵도다. 미륵도는 산양읍과 미수동, 도천동 등의 마을이 있는 큰 섬이다.

해저 터널 위를 흐르는 좁은 해협은 통영 운하다. 통영의 야경은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통영 야경의 명성은 상당 부분이 통영운하에서 비롯된다. 미륵도와 통영을 잇는 통영대교와 충무교 두 다리 아래의 바다가 통영운하다. 여행자가 밤에 통영운하를 보고 있으면 어느 먼 이국땅에 온 듯한 노스텔지어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마력이라 할 만큼 강렬하다.

오랜 옛날 통영반도와 미륵도는 하나로 이어진 땅이었다. 미륵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였다. 그런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수로를 만들기 위해 미륵도와 통영 사이의 좁은 목을 파냈다. 그래서 미륵도는 섬이 되었다. 안면도와 같은 경우다. 안면도는 본래 육지였는데 조선 인조임금 때 세곡선이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을 만들기 위해 운하를 팠다. 그래서 안면도 또한 섬이 되었다.

고려 말 왜구가 통영운하를 따라다니며 노략질을 일삼자 운하를 막아버렸고 미륵도는 다시 육지가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 장군에게 쫓기던 왜군 함대가 도망갈 길을 찾다가 야음을 틈타 좁은 목을 파고 물길을 뚫어 달아났다고 전한다. 그래서 물길을 뚫은 곳을 판데목 혹은 폰데목이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군이 운하를 다시 팠다는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전설이다. 이순신 함대에게 쫓기던 급박한 상황에서 왜군이 운하를 팔만한 여유가 어디 있었겠는가. 임진왜란 이전에도 판데목이란 지명이 있었다. 사실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사실이라고 믿을 근거도 전혀 없다.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일 것이다. 아무튼, 이 운하의 폭이 넓어진 것은 일제하에서 새롭게 공사를 한 뒤부터였다.

▲착량(판데목)위를 흐르는 통영운하는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상희

해저터널은 통영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가 된지 오래다. 해저터널을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더러 그냥 육지의 터널이랑 차이가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이들도 있다. 해저터널이라 하니 바닷속 물고기들 모습이라도 볼 수 있으려니 상상하고 왔던 모양이다. 해저터널은 그저 바다 밑으로 난 길이지 아쿠아리움(aquarium)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되묻곤 한다. 육지의 산속으로 난 터널에 가면 산이 보이나? 나무와 꽃과 숲이 보이나?

해저터널은 1931년 7월 26일 착공하여 1년 4개월 만인 1932년 11월 20일 완공됐다. 길이 438미터,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이다. 용문달양(龍門達陽). 해저터널의 양쪽 입구의 현판 글귀다. 일제 강점기 당시 통영읍장이었고 해저터널 건설을 주창했던 야마구찌 세이가 지은 글귀를 타까시마 주우타가 쓴 것이라 한다. '용문을 지나면 밝은 세상이 나온다'는 뜻인데 용궁인 해저를 통과하며 산양(미륵도의 산양면)에 이르니 그 뜻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의문에 봉착한다. 어째서 일제는 해저터널을 파기로 한 것일까. 그 당시에도 미륵도와 통영 사이에는 나무나 돌로 된 다리가 있었다. 그것들을 대체하고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면 될 터인데 굳이 해저터널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동양최초 해저터널이라는 수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가 토목 기술력을 과시하거나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설득력 있어 보이는 것은 야담 쪽이다.

해저 터널 부근 바다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수없이 빠져 죽은 곳이다. 일제는 이곳에 다리를 놓게 되면 그들 조상들의 영혼을 밟고 다니게 되는 형국이기 때문에 터널을 파기로 했다 한다. 터널을 파고 바다 밑으로 다니면 오히려 자기 조상들의 영혼을 받들고 다니는 모양새가 되는 까닭에 다리를 놓지 않고 해저 터널을 팠다는 것이다.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물론 앞선 이유들과 이 이유가 뒤섞인 복합적인 이유로 팠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설득력이 있다.

저승길 같은 해저터널

▲해저터널 속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상이 나올 것만 같다. ⓒ강제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도 해저터널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남쪽 바닷가, 통영 읍에서 서편으로 빠져나간 곳에 해저터널은 있었다. 저승길 같은 그곳을 지나갈 때 노인들은 소리 내어 염불을 했다. 해조음이었는지 억겁 피안에서 업을 전하는 사자의 목소리였는지 임진왜란 때 그 목에서 몰살을 당했다는 왜병들 원혼의 신음이었는지, 바다 밑의 울림소리를 헤치고 밖으로 나오면 한려간의 가장 좁은 수로를 볼 수 있었다."

길이란 의미를 알고 걸으면 의미가 새롭다. 현재 이 터널은 자동차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사람과 자전거는 다닐 수 있다. 역사유물이면서 여전히 생활의 길인 것이다. 관광객뿐만이 아니다. 해저터널을 지나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도 있고 직장을 오가는 사람들, 산책이나 운동을 나온 주민들도 많다. 오늘도 한 아주머니는 터널을 몇 번씩 오가면서 걷기 운동을 한다. 한여름에는 더위를 피하기도 안성맞춤이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에게는 시간을 아낄 수 있는 지름길이다. 아이들도 더러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기도 한다. 오늘도 나는 해저터널을 지나 도서관으로 가지만 실상 온갖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는 이 해저터널 같은 것이야말로 진정 살아있는 도서관이 아니겠는가!

□ <통영학교> 5월 답사 안내

강제윤 시인이 이끄는 인문학습원 <통영학교>가 5월 17일(석가탄신일), 18일 통영 일대로 답사를 떠납니다.

☞ 자세한 답사 내용 보기 :"청보석 바닷길 따라...제철 해물천국으로"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