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이집트와 미국, 북한과 중국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이집트와 미국, 북한과 중국

송민순 "중동 상황 북한에 대입하기보다 현실을 보아야"

민주당 송민순 의원은 15일 자신의 홈페이지(☞바로가기)에 올린 글을 통해 이집트 민주화 시위가 북한 문제에 시사하는 바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송 의원은 이 글에서 만약 이집트가 북한처럼 고립과 제재 속에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왔다면 민주화 시위가 발생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며,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남한 정부 주도의 교류 확대가 필수적이라고 주문했다.

송 의원은 외교통상부 6자회담 수석대표와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다. 송 의원 측의 동의 하에 논평의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을 발표한 11일 저녁 한 이집트 군인이 어린이이게 입맞추며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집트와 미국, 북한과 중국

30년 간 파라오처럼 이집트에 군림하던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지난 11일 퇴진했다. 민주화를 향한 이집트 국민들의 열망, 즉 역사의 흐름에 무릎꿇은 것이다. 이번 '나일(Nile) 혁명'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세계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로서는 우선 중동을 넘어 북한의 장래,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를 좀 큰 눈으로 바라보는 계기라고 생각한다.

국제 사회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가이익이다. 왕정이 아닌 입헌국가에서 무바라크가 장기독재의 권좌에 앉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서구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아랍사회의 환경도 있지만, 서방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 미국 등 서방에게는 민주주의, 인권, 반부패, 환경 등 모든 가치에 최우선하는 것이 이집트의 안정이다. 중동의 평화와 석유의 안정적 공급이 그들의 국가이익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무바라크, 그리고 북한과 김일성·김정일 일가는 각각 지정학적 위치를 외치와 내치에 영악하게 이용하는 한편, 급기야는 입헌체제를 내걸고 왕조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의 가치체계상으로는 3대 세습으로 이어가려는 북한 독재권력의 양상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김씨 일가는 권력을 유지해가고 있다. 시대착오적 북한 정권을 지탱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 우리의 비난과 불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이 무바라크의 장기독재가 좋아서 지원한 것은 아닌 것처럼, 중국 역시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좋게 받아들여 지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습은 사회주의 이념으로도 용인하기 어렵다. 굶주린 주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끊임없이 넘어오는 것도 중국을 힘들게 한다. 그 와중에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하면서 중국의 주변지역 정세를 불안하게 한다. 이웃 일본, 한국, 대만으로 이어지는 핵확산까지 야기시킬 수 있기에 위험하고 밉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래도 중국은 다른 마땅한 대안이 없기에 북한정권의 행태를 '울며 겨자먹기'로 참아낸다. 중국 사람들에게 "왜 그런 북한을 그냥 두느냐"고 물으면, "'우리 식'으로 북한을 설득하고 권유한다"고 대답한다. 그 '우리 식'이란 '북한을 설득하고 압박하되, 대책 없이 붕괴될 정도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서방세계가 지난 30년간 무바라크 정권을 대했던 태도처럼, 아직 한반도에서의 중국의 국가이익에는 북한의 안정 유지가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과 유럽이 갖고 있는 이집트의 민주주의와 인권증진에 대한 기준은 중국의 북한에 대한 기준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중국의 대북 설득은 민주화가 아니라 사회주의 근간을 유지한 채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적절히 개방해서 먹고 살 길을 찾아보라는 정도이다. 서방이 이집트에서 걸어온 행적의 표리가 그렇게도 달랐으니 하물며, 중국이 북한에 대해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미국은 이집트에서 '안정'이라는 이름 하에 현상유지를 택해 왔다. 중국 또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 세력이다. 나아가 중국과 미국 공히 한반도와 한국민의 장래를 위한 그 많은 수사들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의 현상유지에 공동의 이익을 갖고 있다.

중동지역은 북한 그리고 동북아 지역보다 훨씬 복잡한 실타래가 얽혀있다. 중동은 미국, 유럽, 러시아, 중국의 세계전략상 핵심이익이 교차하는 곳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멸망 이후 서방은 중동지역에서 자신들의 핵심이익, 즉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와 테러리즘의 방지, 그리고 이스라엘의 안전에 위해가 되는 세력의 등장을 저지하는 데 주력해 왔다.

그 세력이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정부든 독재권력이든 그것은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기준은 철두철미 자신들의 국익이었다. 이란의 모사데크 정부는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지만, 유전을 국유화하고 친서방 노선을 취하지 않았다는 배경 때문에 사주된 쿠데타로 1953년 붕괴했다. 반대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등 중요 산유국이 친서방정책을 견지하는 한 그들 내부의 민주주의나 인권의 가치는 언제나 차후의 문제였다.

아랍에서는 "이집트가 가는 곳에 아랍 국가들이 따라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집트는 중동의 추축(樞軸)이다. 그래서 주 이집트 미국대사관은 미국의 전 세계 해외공관 중에서 최대 규모이다. 1975년 이후 미국의 대(對)이집트 개발원조 총액만 해도 280억 달러나 되고, 이와는 별도로 지금도 매년 13억 달러 상당의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자국의 전략적 위치와 서방의 필요를 교묘하게 활용해 온 무바라크의 장기 독재도 '시민들의 깨어남'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 미국은 이집트가 최대한 안정을 유지한 가운데 민주화로의 전환을 이루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자칫 안정도 민주화도 아닌 또다른 혼란으로 이어지지 않을지 미지수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이집트 발(發) 민주화 운동이 자칫 중동에서의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이나, 자원민족주의의 부활로 이어질까봐 노심초사 중이다.

다시 북한으로 눈을 돌려보자. 무바라크의 축출은 분명 북한 정권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을 것이다. 세습독재를 구축한다는 것이 나라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일족에게도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야 한다. 김정일 일가는 이집트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시각에서 북한을 관찰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는 막연히 이집트와 중동의 사태를 북한과 동북아에 대입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만약 이집트가 북한처럼 고립과 제재 속에 외부로부터 차단되어 왔다면, 이집트 국민들이 이번과 같이 "이제 그만(kifaya)", "물러가라(barra)"는 외침으로 타흐리르(해방) 광장을 뒤흔들 수 있었을까? 무바라크 정권은 언론을 고도로 조작해 왔지만 외부와의 접촉과 교류로 인해 촉발된 이집트 내 정보의 확산을 막을 수는 없었다. 모바일 통신이 이루어내는 정치, 사회적 혁명을 막기에는 이집트가 너무 개방되어 왔고 대외의존도가 너무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다르다. 첫째, 정권 자체가 (북한 주민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지만, 기실 외부의 제재와 고립정책이 김정일 정권의 이런 통제정책을 도와주고 있다. 풍선이나 라디오를 날려 보내는 정도로 이집트 현상을 기대하는 것은 초라한 시도이다.

이집트는 연간 120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나라를 누볐고, 관광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3%에 달한다. 직접 관광업에 종사하는 인구만 200만 명이 넘는다. 무엇보다 8000만 인구 중 인터넷 사용자가 2000만 명(25%)에 달하고, 휴대전화가 5500만대(70%)나 보급되어 있다. 통신과 이동의 자유가 없고, 철저한 감시·통제 속에 사는 북한에게 일회성, 단발성 정보 전파로 이집트에서와 같이 거대한 민심이 깨어나고 조직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실 북한 뿐만이 아니다. 외부의 고립·제재정책을 국내 정권 유지에 역설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로 미얀마와 이란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지만 이를 오히려 국내권력 유지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만약 이들 나라들도 이집트처럼 외부 제재 없이 여행이 자유롭고, 개방되어 있었다면 1인 독재나 소수집단의 장기독재가 가능했을까.

둘째, 북한은 자체 통제와 외부 고립 결과 주민의 의식수준이 이집트 국민들과는 차이가 많다. 이집트인들은 파라오적 통치에 대해 '이제 그만'을 외치지만 북한은 아직 왕조통치에 반기를 들 기류가 조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실제 북한 이탈주민들에게 김정일-김정은 승계에 대해 물어보면, 세습 자체보다는 '왜 장남이 아닌 3남에게 넘기려 하느냐?'는 반응이 더 많이 나온다고 한다. 북한주민들의 의식을 반영한다고 본다.

북한 주민들은 산업사회, 민주사회를 경험하지 못했다. '주권재민'이니 '시민권'이니 하는 개념이 사회 전체에 없다. 권력승계는 당연히 받아들이지만 '그런데 왜 3남이냐'는 왕조국가의 신민의식이 일반 주민들에게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잠시 일제 식민지배를 거친 후 다시 김씨 왕조로 넘어간 역사가 남긴 후유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셋째, 지난 30년 간 무바라크와 군부의 공생은 북한의 선군정치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이집트 군부는 무바라크의 몰락이 군부의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공멸의식이 강하지는 않다. 북한은 다르다. 과거 독일 통일의 경우처럼 정권의 붕괴는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고, 이는 바로 군부 몰락과 동일시되고 있다. "정권교체+체제유지"라는 조합이 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북한은 군부를 포함한 권력 엘리트가 집단적 포위 의식(Collective Siege Mentality)에 빠져 있다. 지금과 같은 북한에서는 무슬림형제단과 같이 조직된 힘을 가진 반체제 세력이 등장하기 어렵다. 또한 김씨 왕조가 붕괴하고 다른 권력 엘리트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집단적 포위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위로부터의 개혁·개방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넷째, 해외 후원세력에 차이가 있다. 무바라크 체제의 마지막까지 저울질을 하던 서방세계는 스스로 표방해 온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를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렸다. 또한 누가 되든 시민세력이 미래 권력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해졌기 때문에, 향후 이집트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시민들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한을 용인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 서방세계의 가치관과는 다르다. 자국의 인종적, 지리적, 경제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을 이유로 정치적으로 여전히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고 있다. 스스로의 가치체계로 인해 태도를 바꾼 서방의 경우를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중동인들에게 있어 서방은 자유와 개방의 표상이었지만 북한에게 중국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 결국 북한에게 있어 진정한 자유와 개방에 관해 체감할 수 있는 모델은 중국도 아니고 바다 건너 미국도 아니다. 언젠가는 통일해야 할 대한민국일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가 북한에 아무리 개혁·개방을 요구해도 정권은 당연히 거부한다. 체제가 붕괴될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고, 나아가 개방을 관리할 능력 자체도 없다. 결국 북한정권도 '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고 어느 단계에 가서는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개방해야 하는 방식으로 이끌어 가는 것만이 우리의 선택일 것이다.

북한의 변화를 끌어내야 하는 책무는 중국이나 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에 있다. 서방이 가치관과 원칙에 맞지 않는 무바라크 정권을 유·무형으로 30년 간 지원했고, 중국이 커다란 부담을 안고도 북한 정권을 받쳐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명분과 도덕이 아니고 국가이익이다. 대한민국의 국가이익은 북한에서 이집트와 같은 해방 현상을 보는 것이다.

그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현 정부가 취하는 정책대로 '고립'과 '압박'을 통해 변화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북한 정권보다는 일반 주민들의 고통을 먼저 가중시킨다. 또한 중국의 대북정책 때문에 북한 정권이 폐쇄정책을 개방정책으로 바꿀 만큼 타격을 주고 있는지, 설사 정권이 무너져도 이후 등장할 권력 엘리트가 다른 노선을 취할지 모두 불명확하다. 지금 정부는 비교적 단기간 내에 효과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 하에 미지의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 민주당 송민순 의원 ⓒ뉴시스
다른 하나는 외부와의 '교류'와 '접촉'을 확대시켜 주민들 스스로의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이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는 문제가 있고, 교류와 접촉을 확대하는 데 소요되는 지원이 독재 정권을 연장시켜준다는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다.

두 가지 모두 결과의 불확실성을 띄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집트의 사례를 보면서 북한과의 접촉과 교류를 늘려 나가는 것이 역사에 입각한 논리적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분노와 비난이라는 감성에 의해 북한정권이 변화될 수 있다면 이미 북한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극에 달했던 냉전시대에 이뤄졌어야 했다. 대한민국의 정서에 맞지 않고 다소간 부담이 되더라도 북한의 닫힌 문을 열어야 한다. 정부가 '모든 것은 북한 정권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말만 반복하지 말고, 북한 주민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환경조성을 하는 탄력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세계사에 있어 많은 변혁의 현장에서 주변 강국들이 찾는 정책결정의 마지막 잣대는 '주민들의 의지'다. 북한 주민의 의지가 결집되고, 그 결집된 힘이 한반도 통일로 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