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북동부 카프르엘메셀하에서 출생한 무바라크는 194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공군사관학교에 다시 입학, 비행학을 전공했다. 공사 졸업 후 구소련으로 유학해 고급 비행 폭격 훈련을 받았다. 1964년 구소련을 담당하는 이집트군 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었고, 1966년 공군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무바라크는 1969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이스라엘과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참패한 이집트 공군을 재건했으며, 1973년 10월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 초기 이스라엘군을 압도적으로 몰아붙여 이집트의 전쟁영웅이 됐다. 그 명성을 바탕으로 1975년 안와르 사다트 정부의 부통령으로 임명됐고, 1979년에 집권 국민민주당(NDP)의 부의장에 선출됨으로써 사다트의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
1979년 아랍권 국가 중 최초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했던 사다트가 1981년 10월 6일 이슬람주의자 장교의 총탄에 암살되자 당시 부통령으로 총격을 가까스로 피한 무바라크는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 영국 일간 <가디언>이 전하는 이집트 혁명 상황 ⓒ<가디언> 홈페이지 캡쳐 |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암살 이후 불안정한 정국을 비상계엄법으로 통제했다. 30년간 효력을 발휘한 비상계엄법은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는 정권 안보의 도구로 활용됐다. 영국 <가디언>은 그가 국민들을 사랑한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는 국민들을 믿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비상계엄법을 유지해왔다고 설명했다.
무바라크는 여당 후보의 출마를 사실상 봉쇄한 선거법을 바탕으로 5차례 연임에 성공하며 30년간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2002년에는 차남인 가말을 국민민주당의 핵심 요직인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해 권력세습을 꾀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작년 3월 독일에서 담낭 제거 수술을 받은 뒤 한때 건강 이상설에 휘말렸던 무바라크는 82세의 고령에도 주변국뿐 아니라 미국까지 방문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올 초 튀니지에서 불어온 민주화의 폭풍에 끝내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
제왕적이면서도 술·담배를 하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무바라크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는 것은 이집트인들의 행운이라고 주장해 왔고, 자신이 없다면 이집트는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18일 동안 들끓었던 민심은 이집트의 혼란은 권좌를 지키는 무바라크 때문임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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