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라 오바마 정부는 이집트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거나, 무바라크의 반항적인 태도에 따라 이제는 별 소용이 없어진 '질서있는 전환'에 계속 매달려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고 <뉴욕타임스>는 진단했다.
뒤통수 맞은 미국, 타르히르 광장 시위대 같은 표정
무바라크의 연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미 정부의 최고위급 인사들은 상황을 낙관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오전 '이집트 젊은이들의 희망'을 치켜세우며 이집트의 혼란이 진정될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리언 파네타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하원 청문회에서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발언, 오바마 대통령이 오전에 했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를 암시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국무부 청사에서 직원들과 함께 무바라크의 연설 방송을 기다리는 모습도 연출했다.
그러나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을 거부하고 더군다나 "외세의 압력에 개의치 않겠다"며 미국을 겨냥한 발언을 함으로써 오바마 정부는 체면을 한껏 구겼다. <뉴욕타임스>는 오바마 정부가 이집트 카이로의 타르히르 광장에 모인 시위대처럼 허를 찔린 듯 보였다고 전했다.
무바라크의 연설을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 원에서 지켜 본 오바마 대통령은 착륙 후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을 뒤로 한 채 백악관에 도착하자마자 안보 관련 참모회의를 주재했다.
회의 직후 내놓은 성명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무바라크가 말한) 권력 이양이 즉각적이고 의미 있으며 충분한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며 "이집트 정부가 신뢰할만하고 구체적이며 분명한 (권력 이양) 경로를 제시해야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기회를 갖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이집트의 비상계엄령 해제를 재차 촉구하며 "이집트 정부가 국민들의 열망에 대해 폭력이나 잔학행위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오바마 대통령이 처음으로 시위대의 편에 서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풀이했다. 영국 <BBC> 방송도 그간 해왔던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 중 가장 강경했다고 평가했다.
▲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무바라크의 사퇴 거부 연설 후 실망감을 드러내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미 백악관 |
오바마 정부, 오락가락 기회주의적 태도 일관
오바마 정부가 이처럼 무바라크에 뒤통수를 맞자 <가디언>은 초강대국 미국의 쇠퇴를 보여주는 뚜렷한 징후라고 분석했다. 이집트가 미국 군사원조의 최대 수혜국이고 무바라크는 아랍·이슬람권에서 대표적인 친미 정치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요구가 묵살됐기 때문이다.
미국이 '질서있는 전환'을 이끌 인물로 믿어온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이 이날 무바라크와 나란히 TV에 출연해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한 것도 이번 사태가 미국의 통제권 밖으로 벗어났음을 보여줬다. <뉴욕타임스>는 이 장면에 대해 무바라크에 대한 술레이만의 충성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며 술레이만이 '성실한 중재자'(honest broker) 역할을 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고 분석했다.
미 브루킹스연구소의 중동 전문가이자 전직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인 마틴 인디크는 "오바마 정부는 '질서있는 전환' 중 술레이만이 '질서있는' 부분을 담당해 줄 것으로 기대해왔다"며 "그러나 술레이만 스스로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느냐에 의문을 던졌고, 무바라크는 그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 내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이 무바라크에 망신을 당한 것은 이집트 사태 발발 후 18일 동안 오바마 행정부가 보여준 오락가락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4일 "권력 이양 작업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며 우회적으로나마 무바라크의 즉각 사퇴를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오바마 대통령이 특사로 보낸 프랭크 와이즈너는 무바라크가 현직을 유지해야 한다며 대통령과 온도차가 나는 태도를 보였다. 같은 날 클린턴 국무장관도 갑작스런 권력 이양의 부작용을 우려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스>는 5일 기사에서 미국은 '점진적인 권력 이양'을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그같은 혼동이 있고 나서 오바마 대통령과 클린턴 장관은 7일 무바라크가 9월까지 대통령직에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다가 오바마 대통령이 10일 오전 다시 무바라크의 사임 가능성은 시사하며 환영의 뜻을 내비친 것이다.
무바라크는 이처럼 모호한 미국의 태도 속에서 살아남을 틈새를 발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은 무바라크에게 뒤통수를 맞은 게 아니라 '맞은 척' 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이 'CIA 카이로 지부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술레이만을 밀었고, 무바라크를 법적으로 지원하는 로펌에 소속된 와이즈너를 특사로 보낸 것도 오바마 정부가 현재의 상황을 자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시위대들의 민주화 열망과 중동 '불안정'에 대한 우려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했던 오바마 정부의 시도가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임 거부 연설로 정면충돌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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