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은 26일 인민군 최고사령부 성명을 통해 전략로케트(미사일)군부대와 장거리포병 부대를 포함한 모든 야전 포병군 집단들을 '1호전투근무태세'에 진입시킨다고 발표하며 위협수위를 높였다. ⓒ연합뉴스 |
60여 년 북한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북한은 항상 모든 준비를 철저히 했고 전쟁의 시기에도 전쟁 이후를 위해 대비해왔던 모습을 볼 수 있다. 계획경제체제를 고수하고 있기에 북한의 모든 변화는 사전에 철저히 준비되었고 그 준비는 대부분 과학기술 영역부터 시작되었다. 과학기술적 지원의 뒷받침이 없다면 경제는 물론, 군사적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거둘 수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1947년 2월 북조선중앙연구소 : 1948년 정부 수립 준비
1945년 해방 직후부터 북한 지도부는 경제 정상화를 위해 과학기술자를 확보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한반도 북반부에 집중되어 있던 공업 시설들을 정상화하는 것이 북한 지역의 경제를 정상화하는 것을 넘어 한반도 전체의 경제를 정상화하는 길이라 판단한 북한 지도부는 과거와 국적을 불문하고 과학기술적 능력을 갖추고 있던 사람들을 적극 확보하여 중용하였다. 1946년에 전국적으로 과학기술자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46년 10월 17일에 제1회 과학자, 기술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정책적 흐름은 1947년 2월 북한 최초의 중앙 연구소인 '북조선중앙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아직 충분히 과학기술계가 조직되기 전에 중앙연구소부터 세운 이유는 당시까지 임시 조직으로 운영되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북조선인민위원회'로 전환(1947년 2월 22일)하기 위한 준비였다고 볼 수 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내각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독자적인 경제 운영에 필수적인 중앙 과학기술 연구소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자립적 민족공업 발전 위한 과학기술적 문제를 종합적으로 풀"고 "가장 중요한 기술자재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 해결"하고, "선진과학 기술을 광범하게 섭취 도입"하겠다는 북조선중앙연구소의 설립목적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생산현장들에서 산업부흥에 긴급히 요구되는 연구 과제를 북조선중앙연구소에 의뢰하면 연구위원회에서 연구 과제를 접수한 후 연구계획을 작성하고 해당 연구부서에 연구 과제를 내려보내고 연구계획에 따라 해당 연구부서는 연구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요한 설비나 물자, 재원 등을 마련하는 데 인민위원회 산하 생산국(내각 부처에 해당함)들이 최대한 협조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생산국들도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으므로 북조선중앙연구소 활동에 대한 지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결국 연구소는 불과 몇 개월 뒤에 문을 닫고 말았다. 산업활동에 필요한 과학연구활동을 수행한다는 중요성때문에 임시인민위원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세워졌지만, 북조선중앙연구소는 계획대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결국 김일성종합대학에 연구원이 설립되면서 이곳으로 관련 기능 및 설비들이 이관되고 말았다.
1952년 12월 과학원(국가 과학원) : 전후복구사업 준비
북조선중앙연구소 설립이 무산된 이후에도 북한 지도부는 중앙 과학기술 연구소를 세우기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부족했던 과학기술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남한 지역에 머물러 있던 과학기술자들을 월북시키기 위한 사업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였다. 이는 1950년 전쟁이 일어난 직후 전선이 남한 지역으로 내려온 상황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되어 상당히 많은 과학기술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51년 중반부터 전선은 이전 38선 부근에 고착화되고 정전협상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1952년부터는 정전협상 이후를 위한 준비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전방에 투입된 대학생, 과학기술자를 비롯한 고급 인력들을 후방으로 소환하기 시작하였고 휴교했던 대학들을 정상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1952년 5월 7일 '조선 과학아카데미 창립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 5년 전 무산되었던 중앙 과학기술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1952년 10월 9일에는 '과학원 조직'과 관련한 내각결정이 채택되어 10명의 원사(최고 과학기술자 칭호), 15명의 후보원사 및 과학원 원장, 부원장, 서기장, 부문위원회 위원장 등이 선출되었다. 오늘날 국가과학원으로 불리는 북한 최고의 과학기술 연구기관이자 행정 기관인 과학원은 1952년 12월 1일 평양 모란봉 지하극장에서 개원식을 거행하였다. 북한의 과학기술 관련 행사가 연말에 집중된 이유는 과학원 창립일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과학기술계만으로 구성되었던 북조선중앙연구소와 달리 과학원은 사회과학, 의학, 농학 부문까지 포괄한 말 그대로 북한 최고의 연구집단으로 설립되었다. 장기적이고 전문 연구활동을 위해 설립된 과학원은 북한의 현실에 따라 전후 준비 사업과 경제 재건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 피해 상황 조사 및 복구 계획을 수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개입함과 동시에 '전후 복구 3개년 계획(1953~1956)'을 수립하는 데에도 참가했다.
1956년, 1958년 과학원 지도부 교체 : 1차 5개년계획 준비 및 북한식 기술혁신운동 준비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부터 3년 동안 진행한 전후복구계획은 예정대로 1956년에 일단락될 수 있었다. 북한 자체의 노력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3년 만에 북한 경제는 전쟁 전 수준으로 복구될 수 있었다. 이에 1956년에는 최초의 장기 경제발전계획인 '1차 5개년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과학원은 이러한 흐름에 앞서 1956년 1월에 지도부를 교체하였다. 명망가였던 1대 원장 홍명희에 뒤이어 실질적인 과학원 운영을 담당할 수 있는 백남운이 2대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강점기 때부터 유명했던 경제학자였고 초대 교육상으로서 새로 길러 낸 전문가들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과학원과 유사한 '조선학술원' 설립에 대해 오래전부터 주장했던 사람이라 과학원을 제대로 운영하는 데 적임자였다.
1957년부터 추진될 예정이었던 1차 5개년계획은 1956년 11월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북한 경제 정상화에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던 소련의 원조가 급감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분업체계에 들어오라는 소련의 제안에 대해 김일성이 거부한 것에 대한 항의로 소련은 북한에 대한 원조 계획을 대거 철회했다. 북한이 자체적으로 충당할 수 없지만 산업 시설 복구와 운영을 위해 필수적인 철강재에 대한 지원을 줄인 것이 대표적인 조치였다. 또한 산업현장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과학기술 지원활동을 담당했던 과학기술자들을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부족한 철강재는 현장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보완하였고 소환되어 돌아간 소련 과학기술자들의 자리는 과학원에 소속된 과학기술자들을 현장에 파견하는 것으로 보완하였다. '현지연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과학원의 새로운 정책은 생산현장에서 갈구하던 과학기술 지원활동이 가능하게 한 것뿐만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과 적극적인 협업활동을 통해 북한식 기술혁신활동이 전개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생산현장에서 노동자, 과학자, 기술자 등이 기술혁신을 통한 생산활동의 질적 도약을 모색하는 북한식 기술혁신운동은 1959년 3월부터 '천리마작업반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과학원은 1958년 11월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여 현장 활동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하는 조치를 미리 취했다. 당시 북한 경제는 북한 역사상 최고의 성장률을 달성하였다.
1960년대 국방과학원(제2 자연과학원) 설립 : 국방-경제 병진 노선 강화
1962년 쿠바 사태를 계기로 북한 지도부는 국방력 강화에 대한 비중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국방-경제 병진노선'이라는 이름으로 채택된 변경된 노선은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에 북한 지도부는 국방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과학기술 연구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국방과학원'을 설립하였다. 경제발전을 위해 관련 과학기술 발전을 앞세우겠다는 정책과 같은 논리로, 국방 발전을 위해 국방 관련 과학기술 발전을 앞세우겠다는 정책이 수립된 것이다.
국방과학원은 북한 최고의 과학기술계 대학인 김책공업대학 졸업생들 대부분이 우선적으로 배치될만큼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운영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과학원을 비롯한 민간 부문의 과학기술계에 대한 지원은 많이 줄었지만 국방 부문을 담당하는 국방과학원에 대한 지원은 줄지 않고 더욱 강화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 '제2자연과학원'으로 개명한 국방과학원은 재래식 무기 개발뿐만 아니라 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한 무기 개발에도 집중하여 오늘날 북한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밑천이라 할 수 있는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일반 과학기술계는 1970년대를 전후로 침체기를 겪었지만 국방 과학기술계는 1950년대 과학기술 우대정책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러 독자적으로 개발한 로켓 혹은 미사일 기술과 핵 기술 등을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88년 과학기술발전 1차 3개년계획, 1991년 과학자 대회 : 새로운 경제발전계획 준비
1980년 제 6차 당대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등장한 새로운 지도자 김정일은 경제발전방향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다. 군수 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진 민간 부문의 과학기술력을 높이기 위해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우대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모색 끝에 '공작기계공업과 전자, 자동화 공업'을 중심으로 과학기술 수준을 높이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1988년 '전자자동화과학 분원'과 '전자 자동화 공업위원회'가 새롭게 꾸려졌고 '제1차 과학기술발전 3개년계획(1988~1990)'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기 이전에 과학기술발전 계획이 수립되어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전과 다른 흐름이다. 한동안 중단되었던 '과학자 대회'가 1991년에 새롭게 열렸던 것도 새로운 흐름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 당시 적극적으로 추진된 것이 새로운 공작기계 제작이었다. 오늘날 북한이 자랑하는 CNC공작기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구성-105호'가 처음 제작된 것이 이 당시였고 1988년에는 이를 계열생산하는 전문 분공장이 '구성기계공장'에 세워졌다. 1995년 김정일이 처음 보았다고 한 CNC공작기계는 '구성-105호'를 토대로 발전시킨 '구성-10호 만능선반(4축)'이었던 것 같다. 이를 기반으로 2001년에 개량한 것인 'CNC 구성-10호'였고 이는 동남아 국가와 아프리카 국가에 수출되었다.
비록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경제난과 북핵문제로 인해 이 당시 흐름은 정상적으로 추진되지 못하였지만 1990년대 후반 새로운 경제발전전략으로 이어졌다.
1998년 제1차 과학기술 발전 5개년 계획 : 선군 경제발전 전략의 준비
안팎으로 닥친 어려움으로 인해 북한 경제는 1990년대 중반에 급격히 무너졌다.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던 이 시기를 돌파하면서 북한은 경제발전 전략보다 과학기술발전 전략부터 세웠다. 1998년 고난의 행군 종료를 선언하면서 시작된 '제1차 과학기술 발전 5개년 계획(1998~2002)'은 그 뒤로도 2차(2002~2007), 3차(2008~2012)에 걸쳐 계속 이어지고 있다. 변화된 시대 상황에 맞추어 과학기술을 앞세워 경제발전을 추진하겠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99년 3월 25일에는 '제6차 전국 과학자, 기술자 대회'도 개최하였다.
선군시대 경제발전전략은 2002년 9월에 와서야 정식화되었다. 김정일은 "국방공업을 확고히 앞세우는 것과 함께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켜 인민생활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이라고 경제발전전략을 명제화하면서 1960년대 이후 집중 발전시킨 국방 과학기술을 앞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원천(밑천)으로 활용하겠다는 지향을 나타냈다.
이러한 흐름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1980년대부터 꾸준히 추진된 공작기계 부문이었다. 미사일, 인공위성 발사체와 같은 첨단 기계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초정밀 CNC공작기계를 만들어 실제 생산에 투입하고 수출까지 진행하였던 것이다. CNC공작기계에도 저가형과 고급형이 있는데 북한은 2009년부터 5축 이상의 다계통 CNC공작기계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고 공개하였고 생산에 투입하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또한 2011년에는 공장기계를 생산하는 어미 CNC공작기계까지 개발하였다고 하고 희천공작기계공장은 CNC전문공장으로 개조되었다. 최근에는 중요 생산설비들이 차근차근 CNC기술로 개조되고 있다.
2010년 과학자 기술자 대회, 2012년 교육과정 개편 : 새로운 흐름 준비
사실 과학자 대회 혹은 과학자 기술자 대회는 과학기술 정책과 관련한 모든 흐름의 첫 출발점에 있었다. 첫번째 과학자 대회는 1946년 10월이었고 제2차('52.4), 제3차('63.3), 제4차('81.3), 제5차('91.10), 제6차('99.3)까지 1970년대만 빼고 대략 10년마다 한 번씩 개최되었다. 그런데 제7차는 개최 주기를 당겨 2003년 10월에 개최되었다. 뭔가 새로운 흐름을 준비하면서 개최된 듯하나 북미관계가 안 풀리면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듯하다.
제8차는 또한 주기가 좀 더 짧아진 2010년 3월에 개최되었는데 이는 2012년으로 예정된 강성대국 진입 이후를 대비하는 듯하다. 이 당시부터 2022년 과학기술 강국 진입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2012년에 의미있는 변화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으므로 10년 뒤로 변화의 시점을 미루면서 좀 더 다른 목표치를 제시한 것이다. 2012년 9월에 단행된 '12년 의무교육제'에서 과학기술 관련 기초교육, 컴퓨터 교육이 강화된 것은 이러한 흐름을 준비하기 위한 후속 조치라 할 수 있다.
분명 지금 북한은 전쟁을 직접 치를 수도 있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그것도 최근 1993년 이후 최고 수준으로. 하지만 지금까지 흐름을 보면 북한은 전쟁보다 경제발전을 통한 선진국가로 진입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다. 그것도 10년 이후를 내다보면서 기초부터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으려면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과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호응이 필요하다. 지금의 어려운 상황만 잘 넘길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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