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많은 이들로부터 일본 드라마 역사의 가장 눈부신 성과로 평가 받고 있는 '오싱'은 사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많은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던 <NHK>'연속 TV 소설'시리즈의 전작들이 밝고 상쾌한 아침 드라마의 틀을 유지했던 것에 비해 '오싱'의 내용은 매우 무겁고 어둡기까지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시청자들은 이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에 순식간에 매료되었고, 지독한 가난 때문에 6살 때부터 더부살이를 시작해야 했던 한 산골소녀 오싱이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에 걸친 격동의 시대를 살며 쉴새 없이 닥쳐오는 온갖 고난과 시련에 꿋꿋이 맞서는 모습에 온 열도가 매일 아침 눈물을 흘렸다.
▲ '오싱'의 한 장면 ⓒNHK 화면 캡쳐 |
한 달 만에 50%를 가뿐히 넘어버린 시청률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디어는 물론이고 각계각층에서 '오싱론'을 쏟아냈다. 경단련(일본경제인단체연합)의 회장이 '오싱 인내학'이라는 걸 들고 나왔는가 하면, 교육계는 시청 운동, 독후감과 백일장 등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할 방법들을 개발하느라 분주했다. 국회에서는 '오싱 후원회'가 생겼고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 康弘) 총리는 '오싱 국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오싱'의 작가 하시다 스가코(橋田 壽賀子)는 자신의 작품이 정·재계 인사들에 의해 이용되는 것에 불쾌해했지만, 오싱의 이용가치는 끝이 없어 보였다.
수많은 '오싱론' 속에서 오싱은 '인내'와 '노력', 그리고 '긍정'의 상징이었다. 무엇보다 일본의 근현대사를 통해 부와 명예를 거머쥔 이들은 자신 혹은 자신의 부모 세대의 삶과 오싱의 삶을 동일시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그들 스스로 '인내'와 '노력'의 상징, 즉 오늘날 일본의 풍요로움을 가능하게 한 '근거'가 되고자 했다. 그러니까 노골적인 '국민 훈육'이었던 그들의 '오싱론'은 동시에 오싱과의 동일시를 통한 '자기 면죄부'였던 것이다. 실제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전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남자 오싱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오싱 신드롬'은 '오싱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3년은 눈부신 고도성장기를 거쳐 버블경제의 절정기를 향해 치닫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일본의 경제가 10년도 안 되어 곤두박질 치게 될 거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의 일본 사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엔(yen) 더미 속에서 허우적거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러니까 '오싱의 눈물'은, 고난과 시련을 꿋꿋이 견뎌낸 과거를 흐뭇하게 돌아보면서 현재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잃어버린 10년'이 '울고 싶은 20년'으로 늘어난 지금, 그래서 '오싱의 눈물'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필요한 건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본 사회는 수많은 '남자 오싱'들이 지배하고 있다. 일년에 단 하루도 쉬지 않는다는 '오싱'이, 자신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오싱'이 미디어에 등장해 마치 일본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 영어 공부도 안 하는 젊은 세대 때문이라는 듯 호통을 친다. '인내하라. 그리고 더 열심히 일하라. 강한 일본을 일으켜 세운,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 오싱'의 한 장면 ⓒNHK 화면 캡쳐 |
아무리 뜯어 봐도 일본보다 더 나을 게 없어 보이는 한국 사회 역시 사정은 비슷해 보인다. 여전히 군림하고 지배하고 있는 '남자 오싱'들. 그들은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들의 힘들었던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기꺼이 눈물을 흘리지만, 그리고 나서 내미는 방법은 그 경험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인내하고 더 노력하라. 국가를 위해, 기업을 위해'. 그러니, 그들의 눈물이 공감을 얻지 못하는 건 그 눈물이 거짓이어서가 아니다. 단지 시대와 상황이 변했을 뿐. 일본도, 한국도, '오싱'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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