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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섬' 대한민국 위 서울공화국, 그 비극과 극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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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섬' 대한민국 위 서울공화국, 그 비극과 극복에 대하여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I. 근대 서울공화국의 비극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복남(서영희 분)이 옆에서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찬 해원(지성원 분)이가 피리를 불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넌 너무 불친절해…"라는 영화광고 카피의 언어가 인쇄되어 있다.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영화 포스터의 사진이다. "불친절한" 것이 피투성이 살인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코엔 형제(에단 코엔과 조엘 코엔)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8)에서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지대인 텍사스의 무차별적인 살인마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 분)는 단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주유소의 주인을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서 무차별적인 살인을 자행하는 사람은 살인마가 아니라 "무도"라는 조그마한 섬에서 열 살 아이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순진한 복남이다. 그녀는 왜, 단지 "친절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어렸을 적의 친구였고 자신의 이상과 꿈이었던 해원이를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포스터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멕시코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미국의 식민지로 만든 텍사스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전혀 아닌 것처럼,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대한민국의 근대화가 만든 서울 공화국이 "여성(혹은 비정규직)을 위한 나라"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가 보여주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근대 서울공화국의 전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장철수 감독은 "무도"라는 조그마한 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기 위하여 영화 카메라를 들고 "무도"라는 섬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김복남 살인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듯한 서울의 거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목격한 해원이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다시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해원이가 자신이 목격한 살인자들을 경찰에게 정확히 지적해주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무도"에서 일어난 "김복남 살인사건"이 단지 "무도"라는 자그마한 섬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 서울공화국의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김복남 살인사건"은 이미 일어났고, 동호 할매(백수련 분)나 만종(박종학 분), 철종(배성우 분), 득수(오용 분)는 차치하고라도 복남의 어린 딸 연희(이지은 분)는 물론이고 순이 할매(손영순 분), 파주 할매(김경애 분), 개똥 할매(이명자 분)는 이미 죽었다. 해원이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은행창구에서 대출을 받으려는 임대 아파트 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친절했으면, 혹은 해원이가 복남이가 수없이 보낸 편지를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더라면, 혹은 무도에 가서 해원이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대해주는 복남이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귀를 기울였다면, 심지어 자신이 목격한 연희의 살인사건을 섬에 온 경찰에게 정확하게 전달이라도 해주었다면, "김복남 살인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같은 비정규직 동료와 친구, 그리고 연인에게 조금만이라도 친절하게 관심을 갖는다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근대 서울공화국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비극의 사건을 만드는 근대 서울공화국의 이데올로기이다.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중

II. 근대 서울공화국의 식민지 이데올로기

남편과 시동생의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리면서 어린 딸만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죽음과 같은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복남이에게 서울에 살고 있는 해원이는 오매불망 기다리는 구원의 님이다. 복남이의 서울에 대한 갈망과 꿈은 근대 대한민국 서울공화국이 만든 근대적 현실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미군정을 거쳐 한국전쟁과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을 통한 본격적인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모든 근대국가 기구와 장치들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근대 대한민국의 서울공화국을 건설하는 정점에 서울 강남 공화국이 있다.

그러나 서울뿐만 아니라 강남도 결코 파라다이스가 아니다. 근대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적 삶의 방식들이 서울로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서울특별시의 모든 지역적 삶의 방식들은 강남으로 집중되어 있고, 강남의 모든 지역적 삶의 방식들은 미국의 뉴욕이나 워싱턴으로 집중되어 있다. 근대 서울공화국은 대한민국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는 미국의 뉴욕이나 워싱턴을 최고 정점으로 하는 미국을 향한 해바라기 식민지 공화국인 것이다.

근대 서울공화국의 미국 해바라기 식민지 이데올로기는 서울에 살고 있는 해원이의 비정규직 삶에 고스란히 투사되어 있다. 서울의 거리 모퉁이에서 건장한 청년들이 백인과 함께 한 여성을 폭력으로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해원이의 삶은 직장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이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개체로 파편화되어 있다.

그녀는 심지어 직장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비정규직의 그녀가 근대 서울공화국에서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소망은 직장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비정규직 직장에서 정규직 직장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 직장을 얻으면 또 다시 승진하는 것이 소망이 되고, 승진을 하면 원룸 오피스텔에서 자그마한 아파트로 옮기는 것이 목적이 되고, 강북의 아파트는 다시 강남이나 분당, 혹은 일산 신도시의 아파트가 목적이 된다. 삶을 함께 나누며 서로서로의 삶을 즐거워하고 아파하는 직장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이 없는 해원이의 파편화된 삶이 해원이를 근대 서울공화국의 미국 해바라기 식민지 근대인으로 만드는 것이 근대 서울공화국에 내재하고 있는 식민지 이데올로기이다.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중

근대 서울공화국의 식민지 이데올로기 속에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직장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은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미국이거나 미국의 백인, 혹은 마음으로 동경하는 뉴욕이나 워싱턴에 있다고 꿈꾸는 미국적 삶이다.

이것은 마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 등장하는 "무도"라는 섬에 살고 있는 복남이의 동료나 친구, 혹은 연인이 해원이이거나 해원이의 어릴 적 이미지, 혹은 해원이가 지니고 있다고 복남이가 꿈꾸고 있는 해원이의 머나먼 서울의 삶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이러한 근대 서울공화국의 식민지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비극적이고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것인가를 아주 잘 보여준다. 식민지 이데올로기가 만든 마음의 허상이 순진무구하고 생성적인 여성의 몸을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비극의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미국의 부시나 오바마가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이나 비정규직 문제, 혹은 한반도의 분단을 해결해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의 삶에서 찌들대로 찌들은 해원이가 "무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을 해결할 수 없다.

복남이는 서울에 있는 해원이나 해원이의 어릴 적 이미지, 혹은 해원이의 서울의 삶이 아니라 섬에 살고 있는 순이 할매와, 파주 할매, 그리고 개똥 할매를 자신의 삶의 동료로 만들었어야 했으며, 그들을 통하여 어린 딸 연희와 동호 할매뿐만 아니라 치매 할배(유순철 분)를 삶의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친구와 연인으로 만들었어야만 했다.

그들이 함께 동료와 친구, 그리고 연인이 되었을 때, 근대 대한민국의 서울공화국과 마찬가지로 무도의 섬에서 폭력을 일삼고 있는 만종이와 철종이, 혹은 그들과 연대하고 있는 득수나 서 경사(조덕제 분)의 식민지적 폭력이나 자본으로 결탁한 식민지적 남성성은 깨어졌을 것이다. 복남이의 동료와 친구, 그리고 연인이 무도의 섬에서 함께 어우러질 때, 무도는 폭력과 파괴의 서울공화국의 해바라기 섬이 아니라 남녀노소가 함께 어우러지며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희망의 섬이 될 것이다. 해원이는 미국이나 영국, 혹은 일본이나 프랑스가 아니라 무도의 섬에서 휴가를 보내며 근대 대한민국의 서울공화국이 만든 식민지 이데올로기의 폭력과 파괴를 생생하게 경험한 것이다.

III. 대한민국이라는 근대의 섬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중

서울로 돌아온 해원이는 이미 비정규직 직장에서 쫓겨난 상황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찾아가 자신이 목격한 살인자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녀는 무도의 섬이 작은 대한민국이고, 근대 서울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아시아 대륙과 이어지는 반도가 아니라 태평양에 홀로 떠 있는 미국령 섬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섬은 영화의 말미에서 무도의 섬 이미지가 해원이의 몸 이미지와 겹쳐지는 것처럼 근대 서울공화국이 만든 마음의 미국 해바라기이거나 서울 해바라기 식민지 이데올로기가 무도와 대한민국의 섬으로 구성된 순진무구하고 생성적인 몸을 파괴하고 죽이는 섬이다.

해원이는 무도에서 자신이 목격한 경험을 통하여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구성했던 마음의 식민지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생성적인 몸을 파괴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몸의 폭력과 파괴의 절정에서 역설적으로 폭력과 파괴의 화신이 된 죽은 복남이와 피해자의 친구가 될뿐만 아니라 같은 비정규직 직원들과 동료와 연인이 되어 근대 서울공화국의 식민지 이데올로기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경험은 단지 영화감독의 이야기 구조나 주인공의 삶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무도의 섬이 해원이의 몸 이미지와 겹쳐지는 것처럼 영화가 보여주는 스크린 이미지의 세계는 나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적 세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지닌 무도의 섬이 폭력과 파괴의 섬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과 여성, 비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식민지인과 식민지인이 동료와 친구, 그리고 연인이 되어 그 폭력과 파괴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서울공화국이 미국 해바라기 식민지 섬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과 여성, 비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서울공화국의 식민지인과 식민지인이 서로 동료와 친구, 그리고 연인이 되어 식민지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비정규직법이나 국가보안법, 행정수도법, 그리고 오직 미국만을 해바라기하는 근대 서울공화국의 모든 국가장치와 기구들을 해체하거나 다원화해야 한다. 해원이처럼 영화의 경험이 현실의 경험으로 승화되었을 때, 무도의 섬은 사람이 사는 섬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은 태평양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이 아니라 아시아인들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공유하는 아시아 대륙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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