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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 가장한 자기기만의 나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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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 가장한 자기기만의 나라, 일본

[프레시안 books] 권혁태의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기자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일이다. '평화 연구'라는 제목의 수업의 첫 시간, 교수가 앙케트 질문지를 돌렸다. 질문은 '평화로운 상태, 평화롭지 않은 상태란 어떤 것인가', '일본은 평화로운 상태인가 아닌가',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인가' 등이었다. 모두 익명으로 답한다는 전제였다.

다음 수업 시간, 교수는 회수된 답변을 들고 왔다. 그는 설명 중 기자의 답변을 인용하면서 "일본인에게선 절대 나올 수 없는 답변이다. 유학생 중 한 명이 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실 교수는 그런 반응을 노리고 있었다. 대다수 일본인 수강생은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이므로 일본은 평화롭다'고 썼다. 기자는 이렇게 썼었다.

"움직이지 않는 사회, 의견이 대립하지 않는 사회를 평화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본은 평화롭지 않다."

평화로운 일본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권혁태 지음, 교양인 펴냄)를 읽고 당시의 장면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평화라는 말을 듣고 그런 '이상한 답'을 써낼 정도로 위화감을 느낀 건 왜 나 뿐이었을까?

권혁태는 이렇게 일본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들을 파고든다. 그는 10년 이상의 일본 체류 경험과 연구를 토대로 평화헌법부터 스시까지, 후지산부터 오키나와(沖縄)까지 일본의 '평화로운 것', '아름다운 것'들에 서린 분열과 트라우마, 불안과 자기기만을 읽는다.

평화가 싫다는 나라가 어디 있겠냐마는 전후 일본에선 그 인기가 유별났다. 패전 직후 공모한 복권 교환용 담배 이름이 압도적인 표차로 'PEACE'로 낙점됐을 정도로 최대 유행어였고, 피폭지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거리에는 아직까지 평화 공원, 평화 거리 등 평화투성이다. 물론 앞서 떠올린 일화에서도 드러났듯 지금도 많은 일본인은 현대 일본의 상태를 평화롭다고 여기며, 저자 역시도 "현대 일본을 드러내는 열쇳말은 여전히 평화"라고 말한다.

일본은 항상 '전쟁 상태'였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늘 '전쟁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과 무장을 포기하는 헌법9조(평화헌법), 핵무기 제조와 반입을 금지하는 비핵3원칙으로 평화를 제도화시키기도 했다. 사회·문화적으로 일본은 평화로운 시절을 누려왔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적은 피를 흘리고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으며, 1990년대 이전까지는 경제적 양극화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평화 뒤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군사력을 보유했음에도 '자위를 위해 필요한 전력'에 불과하다는 자위대와 '일본의 군사력이 아니다'라는 명분을 가진 주일 미군이 존재한다. 그 평화는 주일 미군 기지의 75%를 강제로 끌어안은 오키나와와 한국전쟁으로 반공의 전투기지 역할을 했던 한국의 희생을 먹고 자랐다.

또 일본이 북한의 핵실험을 가리키며 자국의 핵보유를 역설할 때, 그들이 이미 미국의 핵우산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이 주변국들에 '유사 핵무기'로 작용할 수 있을 가능성은 망각한다. 평화주의의 명분이자 원동력이었던 피폭 경험도 관광 상품처럼 되어버린 지 오래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평화 공원으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면 군사 기지, 군수 산업 시설이 즐비하다.

이러한 모순에 대해 저자는 "일본의 헤이와(heiwa·平和의 일본어 발음)는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의미에서는 실체적이지만, 그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실체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실체에 대해서는 자각하지 못하는 셈"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일본에 평화주의를 가져온 주체가 외부, 즉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의 집단적 자기기만에 있다. 일본이 기만하는 실체란 바로 오키나와와 한반도, 그리고 역사다.

▲ 피폭도시 나가사키의 평화 공원 내에 있는 평화의 상 앞에 비둘기가 날고 있다. 나가사키 평화 공원에서는 올해도 1945년 8월 9일의 원폭 경험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행사가 열렸다. ⓒ로이터=뉴시스

움직이는 일본, 움직이지 않는 일본

기자가 앙케트에 '움직이지 않는 사회'를 적어내며 얘기하고자 한 것은 사실 일본인들의 우경화였다. 2000년대의 일본인들은 점점 정치에서 멀어지고 개인적 안위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자위대복을 차려입은 우익 아저씨들의 퍼레이드는 있어도 격렬한 데모대는 없는 사회였다. 일본은 사회·정치적 쟁점이 집단 간의 격렬한 대립으로 비화되지 않는 '조용한' 나라였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당시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때 일본은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존 연공서열형 장기 고용 체제가 능력주의 단기 계약형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변화에 내몰렸고 관료제, 공공사업, 공기업 등은 운동량이 적다며 경쟁의 칼날을 맞게 됐다. 정체된 사회가 아니라 유동성이 점점 격해지는 사회였다.

한때 일본은 스스로를 '1억 총중류(總中流)'라고 불렀다. 일본 국민 모두 중산층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신문 지면에서 그 자리를 대신하는 용어는 격차(양극화), 프리터, 니트, 워킹푸어 등이다. 이렇게 일본 사회가 안정에서 불안정으로 바뀐 것은 대략 1990년대부터인데, 이는 '개혁'이란 말이 유행한 시기와 일치한다. 1989년 우노 소스케 내각이 '개혁 전진'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후 '대화와 개혁'(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 '성역 없는 구조 개혁'(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 등 내각부터 적극적으로 개혁을 외쳤다고 저자는 전한다.

저자는 사회 양극화로 인한 불안이 변화와 개혁이라는 강박을 갖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일본에서 개혁은 결국 우경화를 추동해왔다는 것이다. 일례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파벌 정치, 공공 사업, 공기업 등 기존 자민당의 정권 기반을 파괴하는 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교과서 왜곡을 방치·주장하며 내셔널리즘을 북돋았다. 북·일 정상회담을 하긴 했지만 북한을 만능에 가까운 공포의 기호로 만드는 데에도 성공했다.

개혁이란 과거를 파괴하는 것이고, 일본에서 그것은 전후 민주주의 체제로부터 탈피하는 일, 전후 사회를 극복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체로 비핵 3원칙 폐기, 평화헌법 개헌, 자위대의 군대화 등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여기에 중앙으로부터 지방이 소외되고, 잘사는 사람으로부터 못사는 사람이 분리되는 현상도 우경화를 밑으로부터 끌어올렸다. 결과적으로 정치인들의 개혁이 추동한 '움직이는 일본'과 그 안에 포섭된 일본인들의 '움직이지 않은 일본'은 모두 우경화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책임

▲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권혁태 지음, 교양인 펴냄). ⓒ교양인
권혁태는 들어가는 글에서 애국심과 전쟁 위기, 북한·중국·한국 때리기 등 우경화의 공기가 만연해진 200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전후 체제의 탈피'를 외치는 우경화 흐름에 맞서 우경화 이전인 전후 공간으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그곳은 과연 어디인가를 묻는다.

1956년 일본 경제기획청은 1945년부터 10년간을 전후로 규정한 바 있다. 전범 재판, 평화헌법 제정, 반인권적 제도 철폐, 전쟁 피해국들과의 관계 회복 등 개혁이 이뤄졌던 시기이다. 여기엔 한국전쟁 발발로 정반대로 바뀐 미국의 대일 정책이나 1953년의 전격적인 전범 사면 등은 포함돼 있지 않다.

그러니 사실 일본의 전후란 "미군이 만들어놓은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축에 냉전 질서라는 또 하나의 축이 얽히는 과정과 기간"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 민주주의가 역행하는 과정을 두고 일본은 쉽게 미국과 냉전이라는 외부에 책임을 돌릴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일본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어쩔 수 없는 문제' 혹은 개개인의 문제로 귀결되는 경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폭은 전쟁을 종결시켰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는 2007년 당시 방위청 장관의 발언과 2004년 이라크에서 인질로 붙잡혔거나 살해당한 젊은 일본인들에게 꽂혔던 "스스로 구명해라"라는 비판은 무엇을 공통적으로 말하는가. 2008년 도쿄 아키하바라(秋葉原) 거리에서 십수 명을 살해한 범인이 범행 전 파견 사원으로서의 울분을 밝혔음에도, 언론은 그의 비정상성에만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 사회에서 '책임'의 시스템이 어딘가 고장이 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 시스템은 전체가 모여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감각의 제국>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 전공투 출신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는 전성기에 <일본의 밤과 안개>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다. 영화는 1950년대 무장 노선을 취했던 일본의 구(舊)좌파와 그 노선을 포기한 1960년대 신좌파 간의 대립을 중심으로 좌파 운동의 몰락에 관한 격렬한 비판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생소한 내용보다는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에 더 주목이 되는데, 장소가 다름 아닌 결혼식장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자 지난 일은 덮어두는 곳이다. 그러나 영화는 한 가정의 화평을 빌어줘야 할 자리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집단 토론과 판이 깨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치 그렇지 못했던 일본의 전후를 비유하는 듯하다.

물론 일본 내부에서도 결혼식의 흥을 깨려는 시도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책에서도 자주 인용되지만 일본의 평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히려 재일조선인이나 오키나와 사람들처럼 그 평화에 희생된 자들의 몫이었다. 일본 정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책임을 방기하고 있지만 2010년 오늘날에도 매주 수요일이면 종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문제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권혁태의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역시 같은 작업의 일환이다.

나아가 '일본에 책임을 묻는 책임'은 종군 위안부 피해자, 재일조선인, 권혁태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책 속에서 저자는 한국은 식민 피해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해방 이후 일본의 평화가 한반도 상황과 비대칭적으로 이어져 왔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반도에 전쟁이 찾아오자 일본은 미국의 반공 기지가 돼 경제 발전을 누렸으며 남북한이 가까워질수록 일본에선 핵무장론이 득세했다. 한국이 일본 사회의 변화와 관련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그건 주변국으로서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과 일본이 미국이라는 커다란 동맹을 축으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한·일이 과거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면서도 의뭉스럽게 미래를 논하는 것은 미국의 움직임에 따라 서로 간의 끈을 늘이기도, 줄이기도 하는 관계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마침 아시아 중심 외교를 외치던 총리가 미군 기지 이전 문제의 역풍을 맞아 퇴진하고, 일본 해상자위대가 한·미 연합훈련에 참관하는 등 동북아 냉전 구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시기다. 그래선지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속에서 한국의 불안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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