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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 세력이 세운 군대로 나라를 장악해 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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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 세력이 세운 군대로 나라를 장악해 보겠다고?

[이웅현 '비극의 아프가니스탄'] 소련의 실패, 미국의 망상

주객전도(主客顚倒)

아프가니스탄에도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근대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려는 통치자가 있었다. '철혈군주' 압두르 라흐만(1880-1901년 재위)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와 상비군을 보유하려고 했다.

그의 칙령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영토 내 모든 종족은 남성 8명 가운데 1명꼴로 젊은이들을 아미르(군주)의 군대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다양한 종족들이 험준한 산악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나라에서 이와 같은 유사 징병제는 실행될 수가 없었다.

결국 상비군 체제를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군주는 민병대 혹은 기병대와 비슷한 지방 무력조직을 형성했고, 종족의 지도자들이나 봉건지주들로 하여금 보유 토지에 비례하여 병력을 갹출케 하는 방법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압두르 라흐만
그런 한계 속에서도 이 철혈군주는 중앙정부의 상비군에 대해서는 정기적으로 봉급을 지급하거나, 유럽식 군복을 제공하는 등 근대화된 군대를 형성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1880년대 중반,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약 5~6만 명의 상비군을 보유할 수 있었다. 압두르 라흐만은 당시로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이 병력을 가지고도, 아프가니스탄이 여전히 외부로부터의 침공에 취약하다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100만 군대를 양성, 보유하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미르에게는 재원도, 훈련된 장교도, 기술 고문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군대가 외국의 이익에 봉사하려 들지 모른다고 생각한 군주는 군대 양성과 훈련을 위해 필요한 아프간인-유럽인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도 통제했다. 야심은 있었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단이 없었고, 열정은 있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체계적 계획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본디 군대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자국민과 정부를 보호하고,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면, 압두르 라흐만이 형성하려고 했던 것은 그런 본연의 의미의 '아프가니스탄 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극적 전쟁과 내전 그리고 다시 전쟁이 되풀이되어 온 지난 3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세력이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건설해 주겠다고 나서는 기묘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30년 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직후부터 '아프간 군(軍) 건설'이 절실하다며 팔을 걷어붙였지만 실패했고, 10년 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 역시 지난 해(2009년)부터 종전과 철군을 위한 선결과제로서의 '아프간 군(軍)의 건설'에 관해서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지만(NATO ISAF, "Commander's Initial Assessment," Aug. 30, 2009), 그 전도는 밝지 않다.

'한정적 분견대'

1979년 12월 하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투입병력을 '한정적 분견대'라고 칭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5개 사단 5만 명 정도의 병력이라면 소련군 전체병력 가운데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분견대' 수준이었고, 투입 이후 이 분견대의 역할도 지극히 한정적일 것이라 믿고 있었다.

즉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무슬림 반군과의 교전은 10만 명 정도의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및 경찰, 민병대에 일임하고 '분견대'는 주요 도시와 공군기지를 장악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도로들을 장악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침공 이후 6개월 동안 소련군은 카불과 바그람에 3개 사단, 잘랄라바드에 공정부대 1개 사단, 칸다하르, 헬만드 등 남서부에 2개 사단, 발흐, 쿤두즈, 바다흐샨 등 북동부에 2개 사단을 배치했고, 이란 및 파키스탄과의 접경지역에는 병력을 집중시키지도 않았다. 소련군의 출현 자체만으로도 잠재적 반군은 공포를 느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련의 적은 믿었던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안에 있었다. 1980년 1월 초 아프가니스탄 북부 나흐린의 제4포병연대의 반란을 시작으로, 무슬림 반군이 아닌 아프가니스탄정부군의 이탈과 저항이 확산되어 갔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집권 공산당 내의 두 파벌 가운데 파르참('깃발')파의 지도자 바브락 카르말을 옹립하며 개입해 들어왔지만, 약 9만여 명의 정부군 병력 가운데 90% 이상은 (소련이 침공과 동시에 사살한) 하피줄라 아민을 추종하던 할크('인민')파였다. 외국군을 등에 업은 파르참의 부상(浮上)은 정부군 내 할크파의 이반(離叛)을 부추겼다.

기계화된 소련군은 말을 타고 산악을 종횡무진 누비는 반란군들을 제압할 수 없었고, 결국 정부군의 반란은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 바브락 카르말
출병 직전까지도 소련 지도부의 머릿속에는 아프간군의 이반 가능성에 관한 고려가 없었다. 할크파를 중심으로 한 정부군의 이반현상이 동남쪽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지역의 토착부족세력과 연대하는 과정에도, 소련군 지도부는 이것이 "이슬람의 이념적 세력들이 DRA(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혁명정부와 민주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조장하며 농민대중을 맹렬하게 교란하는 것"이라며 그 성격을 오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슬람세력이 아니라 '아프간군의 이탈자들'이었다. 침공 후 6개월 동안 소련군이 조우해야 했던 불측의 적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반정부 세력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내의 뿌리 깊은 내홍의 폭력화였고, 무기와 정보를 보유한 이들 할크파 이탈세력은 곧이어 무슬림 반군(무자헤딘)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도로(徒勞)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소련은 이후 10년 동안 초기의 이 오판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소련은 즉각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건설을 시도했다.

1981년에는 강제징집, 복무기간 연장, 예비군 동원 등 정부군의 해체를 막기 위한 제도적 개선을 카르말 정권에 강요했고, 소련군도 5000명을 증파했다. 1982년부터는 중립적인 인사(압둘 카디르)를 국방장관에 기용하고, 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을 장교단에 충원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할크파 장교들의 반역모의는 증가했고, 1984년 말 정부군 병력은 침공 직전의 수준에서 절반 이하인 4만 명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감소추세는 소련군이 철수한 1989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내에 상존하는 분파주의와 아프간인들의 외세 혐오는 소련군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강제 징집된 아프간 젊은이들은 공격을 받아야 총을 쏘았고, 기본적으로는 무자헤딘과 싸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기회가 주어지면 탈영을 했고, 저항군은 이들이 체포되면 석방하여 귀가시키거나, 저항군에 편입했다. 사실상 정부군에게는 국가를 지켜야겠다는 열정도 능력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부군을 신뢰하지도 않았다.

결국 소련은 1989년 2월까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에 대해서 약 10년 동안 훈련을 시키고, 적에 대항해 함께 싸우고, 또 이러 저러한 충고와 지시를 하면서 힘을 소진했다. 소련군 철군 시까지도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소련이 희망했던 것 같은 '정부를 지킬 능력'을 구비하지 못했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의 군대 건설에 투여한 정신적, 물질적 지원은 열려 있는 배수구로 계속해서 빠져 나가고 있었다. 아프간군은 소련군의 힘이 되기는커녕, 어깨에 올라탄 보이지 않는 귀신처럼 소련의 힘을 빠지게 했다. 결국 소련의 패주에 기여한 일등공신은 무자헤딘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의 분열과 태업 그 자체가 소련군 최대의 적이었던 것이다.

침공 전부터 반군과의 전투에 직접 가담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소련은 교전에 말려들어가면서도 줄곧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의 훈련, 양성에 전념하다시피 했지만 결국 그 모양이었다.

과부하(過負荷)

아프가니스탄의 군주에게나, 침공 후 안정을 도모하려는 점령군에게나, 중앙정부의 통제가 미칠 수 없는 산악의 편재(遍在) 그리고 복잡다기한 종족의 분포는 국민군대 건설 최대의 장애물이었다.

한 때 아프간 국민 절반 정도인 파슈툰인들의 환영을 받았던 탈레반이 집권했던 1990년대에도 아프가니스탄 군은 국민적 지지기반 위에 존재하지 않았고, 국가 기구로서의 행정적 효율성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육군, 공군, 국경수비군, 경찰, 민병대 등이 국가의 방위와 질서를 전담하는 무력으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는 사실상 다양한 분파적 그룹들이 공존하는 것이었고, 충성심과 기능 그리고 조직의 정도가 각기 다른 무장세력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2001년 미국이 탈레반 정권에 대해 손쉽게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와 같은 탈레반 정부군의 비조직적 무기력이 한 몫 했다. 충성심이 한 곳에 집중되는 일사불란한 조직체로서의 군대다운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국가건설에 필수적인 아프가니스탄 정부군(ANA)을 만들어야 했다. 있는 것을 유지만 하는 데에도 급급했던 소련의 경험에 비하면, 미국의 대 아프가니스탄 정책에는 없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 엄청난 과부하가 걸려 있는 셈이다.

침공 후 5년이 경과한 2006년경부터 미국은 참전 연합국들과 업무를 분담하여, 아프가니스탄의 군대 건설을 시작했고, 2009년 여름, 아프가니스탄 주둔군 사령관의 교체와 전술 변화에 즈음하여 ANA 양성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소련의 장애물이 이탈하는 할크파였다면, 미국의 장애물은 협조하지 않는 파슈툰족이었다. 미국은 2006년 이후 현재까지 충원된 12만 명의 ANA에 대해, 주둔군의 철수 개시 시점으로 고려하고 있는 2011년 중반까지 17만 여명으로의 확충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센서스가 행해진 적이 없고, 또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종족들은 자신들의 삶이 노출되는 통계수치의 작성에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통계는 없다. 그러나 대략 300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되는 인구의 이 나라의 대내외 안보가 17만 명의 병력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병력을 양성하는 데에만 미국은 260억 달러를 투입했고, 그의 유지를 위해서 지금도 매월 10억 달러씩 소요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NA 내의 파슈툰족 비율은 3%를 넘지 않고 있다. '국가의 군대'가 되기 위해 아프간 군 장교단에는 인종적 구성비율이 할당되어 있다. 즉 장교들은 파슈툰인 40-45%, 타지크인 30-35%, 하자라인 10-12%, 그리고 우즈베크인 8-10%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인구분포와 비슷하지만, 군은 실제로 이러한 구성을 따르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형성되어 있는지도 확인할 방법도 없다. 병사들에게는 그러한 할당비율조차도 없다.("Afghan army struggles with ethnic divisions," AP, Jul. 29, 2010) 파슈툰족이 주력인 탈레반에 대한 동정심 아니면 공포심이 파슈툰족의 ANA 참여를 가로막고 있기도 하다.

전도다난(前途多難)

파슈툰족은 처음부터 ANA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2001년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축출하면서, 미국은 타지크인, 우즈베크인, 하자라인 등 (탈레반의 주력인) 파슈툰족에 적대적인 종족들의 협력을 받았고, 이 결과 아프가니스탄 과도정권과 현 카르자이 정권에는 북부동맹 출신들이 대거 포진하게 되었다.

ANA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불과 한 달 전까지만해도 국방장관 압둘라힘 와르닥을 제외한 군 내의 주요인사들은 파슈툰족이 아니었다. 군 내에서 와르닥보다 더 많은 충성심을 확보하고 있는 육군참모총장 비스밀라 무함마디 한은 타지크인이었고, 경찰병력을 관장하는 내무장관 암롤라 살레 역시 타지크인이었다.

▲ 압둘 라힘 와르닥
6월 말, 비스밀라 무함마디 한이 총선을 앞두고 하원에 의해 내무상으로 지명되자, 대통령 카르자이는 셰르 무함마드 카리미 중장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그리고 모함마드 이크람을 참모차장으로 임명했다. 이 밖에도 아나야툴라 나자리(전 난민성 장관)를 제1국방차관으로 앉히고, 무라드 알리 무라드를 북부 군단장으로 임명하는 등 파슈툰인을 중심으로 군 지도부를 구성했다.

금년 2월 이후 마르자의 공세를 필두로 헬만드와 칸다하르 등 아프가니스탄 남부 지역에서 전개되는 미군-ANA의 연합작전에 대해서, 남부의 파슈툰인이 북부동맹 중심의 ANA를 '아프가니스탄 군'이 아니라 미군과 같은 '침략군'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편견을 불식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다른 종족인 파슈툰족을 토벌하러 왔다는 불만이 퍼지면 곤란했던 것이다.

▲ 비스밀라 한 (왼쪽)
그러나 ANA 병사들의 주력은 여전히 비파슈툰족이다. 여전히 아프간 군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북부의 소수파 종족들이며, 이들 북부인 중심의 군대와 남부 파슈툰 사이의 이격(離隔)이 범상치 않다. 미국이 앞으로 남은 1년 동안 전개해야 할 작전은 주로 파슈툰족 중심의 남부와 동부지역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 미군과 함께 합동작전을 전개하게 될 ANA가 비파슈툰인 중심의 편향된 종족구성을 하고 있어, 종족 간 갈등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 셰르 무함마드 카리미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면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내전에 휩싸일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은 무엇보다도 ANA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기초한다.

ANA에 대한 파슈툰족의 선입견, 군 내부의 인종적 불균형, 병력충원의 부진은 물론 철군 후에도 유지를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재원확보의 문제 등, 아프가니스탄 군 건설이 안고 있는 과제는 한둘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진정한 의미에서 강력한 통일국가였던 적이 없었다.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강력한 상비군을 보유한 적도 없었다. 원래 없었던 것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있었던 듯, "좋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바람직한 '아프가니스탄 군'의 모델 즉 지향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일세를 풍미했던 '근대화론'에 의하면 근대화를 지향하는 국가의 군대는 국민통합의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에는 군대가 통합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낙관하기에는 극복해야 할 장애요인이 너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발적인 국민군대 건설의 동인 내지는 유인을 제공하는 일일 터인데, 현재 미국에게는 시간도 별로 없고, 문제 해결을 위한 상상력도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다. 카불 정부 역시 군 내부의 종족 간 불균형에 대해서는 거의 속수무책이다. 혼란과 불안, 즉 비극은 당분간 지속될 아프간 국민의 운명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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