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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월 27일이 밝았다. 날이 바뀌었지만 악몽은 밤을 날아서 쫓아왔다. 쌍굴에 든 빛이 시신들을 비추었다.
낮에도 간헐적으로 소총 난사가 계속됐다. 피난민들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기다렸다는 듯 총알이 날아왔다.
총격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여름, 시체들은 빨리도 썩어갔다. 또 살아남은 이들은 극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시체 썩는 냄새가 고약한 핏물을 들이키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16세였던 박희숙은 피인지 물인지 모르는 그 액체를 허겁지겁 마시다가 입으로 물컹한 것이 들어오는 끔찍한 경험을 해야 했다.
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희숙은 생각했다. 조심조심 밖으로 나온 희숙은 개울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건 눈의 흰자뿐이었다.
"헬로야! 헬로야!" 희숙은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이 아는 유일한 영어를 외쳤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 있던 미군이 희숙에게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산 위로 올라간 그녀는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팔짝팔짝 뛰며 미군을 때렸다. 아버지 어머니 다 죽었는데 혼자 어떻게 사느냐며 울부짖었다.
서울에서 고향 주곡리로 피난을 왔던 은용의 가족을 기억하는가. 참사가 일어나기 전 남편을 먼저 남쪽으로 보낸 아내 선용도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향 집에서 심부름을 하던 홍기라는 소년에 등에 어린 아들 구필이를 업혔다. 딸 구희는, 어젯밤 울음을 터트린 나머지 할머니 등에 업혀 굴 밖으로 나갔다가 총에 맞아 다신 돌아오지 못했다.
세 사람은 숨을 죽이고 모래사장과 풀밭을 기었다. 간간이 총소리와 조명탄이 날아올랐다. 얼마 후 세 사람은 굴에서 제법 떨어진 곳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한참을 헤매다 골짜기를 찾아 올라갔다.
탕, 타아앙, 탕 또 어디선가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총알이 마구 날아왔다. 머리 위와 몸의 좌우로 핑핑 날았다. 총성도 귀가 찢어질 듯 컸다. 정신을 차려보니 심부름 소년 홍기는 저 멀리 도망친 뒤였고, 구필은 허벅지에 총을 맞아 고통스럽게 울어댔다.
얼마 후 총성이 멎고 새벽이 밝아오자 선용은 아이를 업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흘렀을까. 다시 산기슭에서 총을 겨눈 미군 병사와 마주쳤다. 선용은 있는 힘을 다해 쏘지 말라고 외쳤다. 그때.
…선용이 정신을 차렸을 때 구필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들의 자그마한 가슴에서는 피가 솟아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절망하여 눈물을 흘렸다. 두 생명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선용은 조용히 기도문을 생각했다. 구희가 죽고, 구필이가 죽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풀을 헤치는 소리가 나더니 두 명의 미군 병사가 다가왔다.
두 백인 병사는 구필이를 고이 묻어주었다. 그리고 탈지면에 붉은 액체를 듬뿍 적셔 선용의 상처를 틀어막았다. 선용은 아이를 잃은 마당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부상을 치료해주는 손에 저항할 힘도 없었다.
선용은 들것에 실려 등성이와 고개를 넘고 계곡을 건너 도로를 지나, 앰뷸런스에 태워졌다. 앰뷸런스는 단숨에 김천까지 달려 미군의 야전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는 계속 목숨을 거둬 달라고 기도했지만 용납되지 않았다.
2.
7월 28일. 황간면 노근리 일대에 다시 장대비가 쏟아졌다. 철로 위에도 비가 내렸다. 하지만 아무리 내려도 26일과 27일에 벌어졌던 학살의 핏자국은 조금도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쌍굴 속 총격은 거의 잦아들었지만 아직도 가끔씩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여덟 살이었던 구학은 사촌누나 구옥과 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또 다시 총격을 당했다.
구학은 계속 물을 퍼마셨지만 왠지 자꾸만 옆으로 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잠시 뒤 소년은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 본 기사에 쓰인 삽화는 박건웅의 <노근리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며 저작권은 출판사 '새만화책'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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