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산업연수생에게는 퇴직금을 주지 않았다. 산업연수생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07년 8월 30일 대법원에서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산업연수생도 노동자다. 퇴직금 줘라."
이런 획기적인 조치로 그 날 이후 퇴직하는 노동자는 산업연수생 시절을 포함한 퇴직금을 다 받았다.
07년 말까지 <산업연수생 퇴직금>은 노동계 최대의 화두였다.
08년에도 <산업연수생 퇴직금>은 중요한 화제였다.
하지만 09년 들어 <산업연수생 퇴직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돈 받을 사람이 거의 다 받은 데다가, 산업연수생 제도 자체가 없어졌으니까.
2010년 산업연수생 퇴직금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노동부 감독관으로 발령나고, 우리 센터의 간사가 되었다. 불행의 씨앗은 여기서 싹튼 것이다.
04년에 산업연수생으로 온 베트남 노동자 레다(가명)는 연수생 시절의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인 07년 11월에 퇴직했기에.
00노동부에 진정했다.
노동부에 가는 날, 우리 센터의 막내인 J간사가 동행했다.
나는 노동부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다.
00시에서 최고로 공장이 밀집되어 있고 복잡한 민원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XX면 담당으로 20대 여성감독관을 배치하다니?
가장 힘든 곳에 가장 경륜이 풍부한 고참을 배치하는 게 원칙일 것 같은데, 오히려 가장 서열이 낮은 신참이 보내지는 건 아닐까?
M감독관은 갓 발령난 햇병아리 공무원이었다.
또한 나는 내 자신의 처사도 이해할 수 없다.
산업연수생 퇴직금이 뭔지도 모르는 신입사원 J간사를 아무 생각도 없이 노동부에 보내다니?
나는 또한 레다의 행동마저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뒤늦게나마 산업연수생도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리고 그 돈을 받으려면 발안으로 가보라는 충고도 들었다. 그러기에 시흥에 사는 사람이 먼 발안까지 찾아왔지. 그러면 사람이 좀 야무지고 악착같은 면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니올시다다. J간사의 말 한마디에 그리 쉽게 퇴직금을 포기하다니?
사건은 꼭 이런 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감독관이 말했다.
"연수생 퇴직금은 못 받아요. 대법원 판결 이후에 퇴직한 사람은 받고, 이전에 퇴직한 사람은 못 받는다는 건 형평에 맞지 않거든요."
감독관은 형평이란 단어를 내세우면서 결과적으로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J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감독관 말이 그럴 듯하게 들렸으니까. 저 감독관 똑똑하네! 형평에 맞지 않는 건 나도 참을 수 없거든.
신인들은 딱딱한 법이나 무미건조한 사례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멋진 단어에 심취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어 J간사가 레다에게 말했다.
"감독관님 말이 맞아. 자, 레다 여기 취하서에 사인해."
어리벙한 레다는 별 저항 없이 사인했다.
왜?
그는 발안센터가 잘못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 사람이니까.
줄줄이 바보 사탕이다!
레다의 퇴직금 230만 원이 날아갔다.
취하서에 사인했으니 다시 진정할 수도 없다.
덕분에 나도 잠을 못 이루었다.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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