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 정상회의를 카나다와 공동으로 유치한 후 우리가 G20에 들어갔다는 것에 도취되다 보니까 막상 G2가 누군지를 잠깐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오늘은 중국의 전통적 국제질서관 맥락에서 오늘날 중국이 자기 위치를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북중관계와 한미관계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소위 '천안함 외교'와 6자회담 외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짚어 보겠습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보다 중요한 '화이관'
우선 중국의 국제질서관에 대해...제 개인적인 얘기를 해서 좀 그렇지만,.. 1981년 말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받고 있을 때의 얘깁니다. 논문 제목은 '모택동의 대외관 전개에 관한 연구'였어요.
나는 모택동이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용어를 써가면서 국제정치를 분석하고 외교관계에 대해 많은 연설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바탕에는 명나라 청나라 이래의 '화이(華夷)개념에 입각한 천하관'이 깔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중화(中華)는 천하의 중심이고 상국(上國)이며 주변의 사이(四夷)는 중국 아래에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드리고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모택동의 저작을 읽다 보면 그걸 느낄 수 있는 언급들이 군데군데 있어요.
그래서 나는 논문의 결론에서 중국이 지금은 경제적으로 낙후됐고 외교적인 발언권이 별로 없지만, 앞으로 세월이 흐른 후 언젠가는 전통적 화이개념에 입각한 천하관에 따라 외교를 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한중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할지 생각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우리를 속국(屬國)으로 봤고 조선은 명나라·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스스로 속국임을 당연시하고 살아왔는데, 다시 중국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대하려고 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그랬더니 논문 심사위원들이 그 부분을 빼라고 하더라고요. '중국이 어떻게 다시 그런 자리로 올라가느냐, 근거 없는 전망이다'라고 하면서요. 심사위원들의 생각에는 미국이 영원히 유일 초강국으로 남아있을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던 것 같았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심지어 일본의 경제가 부흥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은 계속 위상이 올라가거나 유지되는 반면, 당시 개방·개혁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역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은 도저히 강대국 반열에 오를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편견이 있었다고 봅니다.
나는 심사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내 주장을 마냥 우길 수만은 없어서, 심사위원들의 지시대로 그 부분을 일단 뺐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봤던 건, 나름대로 현장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73년에 박사학위를 하러 대만으로 유학을 갔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 외교이론인 소진(蘇秦) 장의(張儀)의 합종·연횡론(合縱·連橫論)을 현대 국제정치 이론의 맥락으로 재해석해 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갔었습니다. 대만의 당시 분위기가 옛날 학문을 연구할 수 없는 분위기라서 중간에 유학을 접고 돌아와서 모택동 연구로 바꾸긴 했지만... 대만 유학 시절에 읽은 책에서, 그리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받은 느낌이 있었어요.
국민당 정부를 따라서 대만으로 온 대륙 출신의 부모를 둔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 본토인들까지도 한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보고 중국은 한국의 상국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우리를 낮춰보는 걸 보고 기분이 나빠서 도서관에 가서 중국 사람들이 자기네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고,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좀 뒤져 보았습니다.
학술서적에서 저널리스틱한 책들까지 이책 저책 뒤지다 보니, 중국 사람들은 아시아 역사를 완전히 중국 중심으로 쓰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알고 있더군요. 대륙을 빼앗기고 대만에 쫓겨 온 국민당 사람들마저도 나중에 본토를 회복하면 천하의 중심이라는 뜻인 '중국'의 과거 지위를 되찾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그럼 대륙 사람들, 중공 사람들은 과연 어떤 대외관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한중수교 전인 89년 봄,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 갔어요. 대중투자 조사단의 일원으로 한 보름 동안 여러 군데를 돌아봤습니다. 베이징, 허베이성, 산동성, 랴오닝성 이렇게 4개 성·시를 돌아 봤는데...우리를 융숭하게 대접하면서도 '요즘 어쩌다가 돈은 좀 있지만 작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 혹은 '과거 중국에 조공 바치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은연중에 드러났습니다. 나의 피해의식만은 아니었습니다. 대만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중국과의 외교를 잘 풀어 나가지 못하면, 중국 사람들의 화이개념 때문에 앞으로 속상할 일이 생길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 현인택 통일부 장관(오른쪽)이 장신썬 신임 주한 중국 대사를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
대중 관계 근본부터 다시 고민해야
지난 번 신임 주한 중국 대사가 통일부 장관을 예방하는 자리에서 중국 대사관 참사관이 통일부 장관한테 '발언을 너무 길게 공개한다.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항의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일국의 국무위원이 대사관의 참사관한테 공개적으로 면박을 당한다는 건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자초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중국이 드디어 '화평굴기'를 넘어 '유소작위'의 단계로 들어갔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0∼90년대인 덩샤오핑과 장쩌민 시대 중국 외교정책 기조는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어둠속에서 힘을 기른다)였습니다. 힘이 비축될 때까지는 죽어지낸다는 겁니다. 후진타오 시대,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중국은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롭게 세계속에 산처럼 우뚝선다)와 유소작위(有所作爲. 국제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기 목소리를 낸다)를 외교정책기조로 표방했습니다. 국력에 걸맞게 행세하고 과거 중국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몇 년 전까지 화평굴기(和平堀起)라는 말을 썼었는데, 최근에는 화해세계(和諧世界.세계 여러 나라들과 사이좋게 지낸다)라는 말로 바꿔 쓰고 있습니다. 화평굴기는 외국 사람들한테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재작년 베이징 올림픽 때도 화해세계를 크게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실무급 외교관이 우리나라 국무위원한테 대놓고 항의하는 걸 보면서 '화해세계'는 겉으로만 표방하는 것일 뿐 본심은 '굴기'와 '작위'구나, 그리고 우리가 그 대상이 되었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참사관이 주재국의 장관 면전에서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건 즉흥적인 반응이 아닐 겁니다. 한국의 당국자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응하라는 가이드라인이 이미 다 나왔을 거예요. '당국자' '관계자'라는 익명으로 한국 정부가 은연중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북한 쪽으로 몰아가면서 중국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들이 언론에 이미 나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논리를 다 짜가지고 나왔을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의 책임은 북한때리기에 중국이 동참하라는 거지만, 중국이 생각하는 중국의 책임은 주변 정세를 안정적으로 유지·관리해 나간다는 뜻일 겁니다. 책임이라는 용어의 개념과 차원이 다른 거죠. 그래서 중국 대사가 언론을 상대로 "중국은 대국으로서 책임있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 했을 겁니다.
그런 일뿐만 아니라, 우리 외교부 차관도 중국 대사를 불러서 김정일 방중에 대해 항의를 하니까 중국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고, 중국 외교부 대변인까지 나서서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을 추진하는 건 주권에 관한 문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하루 이틀만에 외교부와 청와대가 불 끄느라고 바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대통령까지 나서서 '중국이 우리를 생각해서 나를 만나고 사흘 후에 김정일이 오도록 조정했다'고 말했어요. 그거 참 구차스러운 모양새였습니다. 김동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에서 주인공 '미스터 M'도 이렇게까지 둘러대지는 않았어요.
이런 모습을 중국이 어떻게 받아들였겠습니까? '아, 우리가 한 마디 하니까 바로 꼬리를 내리는 구나.'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중국 사람들이 한국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명나라 청나라가 조선을 다루듯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할 겁니다. 그걸 우리가 이번에 자초한 겁니다.
중대한 외교 실수이자 과오예요. 그렇게 꼬리를 내릴 거면 뭐 하러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나갔습니까? 기왕에 호기 있게 나갔으면 며칠이라도 좀 버티다가 슬그머니 물밑으로 수습이라도 했으면 국민들 자존심이라도 덜 상했을 텐데, 그게 뭡니까?
어찌됐건 중국이 다시 힘을 잡으면 명·청대에 주변국들을 관리하던 식으로 외교를 할 거라는 전망이 현실로 확인됐어요. 그게 분명히 드러났으니까, 우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대중외교를 어떻게 할 건지 진짜로 심각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안보관리 체제를 재점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점점 커지고 있는 G2 중국, 미국에도 '유소작위'를 하고 나설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건지에 대해 정말로 많은 고민을 하고 여러 가지를 재점검해야만 합니다.
한중관계가 정치·외교적으로는 '협력적 동반자 관계'라고 하지만, 사실 그런 수사적인 표현보다는, 경제적으로 볼 때 우리는 지금 중국을 아주 많이 필요로 하는 상황입니다.
작년 무역 수지 흑자액이 총 404억 달러였는데, 대중 무역 흑자가 324억 달러, 대 홍콩 무역 흑자가 182억 달러였습니다. 중국·홍콩 합해서 500억 달러가 넘어요. 대미 무역 흑자는 86억 달러, 대일 무역 적자는 277억 달러. 중국·홍콩에서 돈 벌어서 일본에 갖다 바치고 나머지로 사는 거예요. 결국 중국·홍콩이 우리를 먹여 살린다는 얘깁니다. 그 돈으로 국방비도 마련하고 천안함 사고 처리도 하고 교육·복지에도 투자하는 거예요.
이렇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중국과의 관계를, 미국·일본과의 관계 못지않게, 잘 끌고 나가야 합니다. 전체 무역 의존도에서 대중무역이 20.5%를 차지하고 대일무역은 10.4%.대미무역은 9.7%입니다. 물론 안보면에서는 대미의존도가 압도적이지요. 이걸 보면 중국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답이 나옵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우리가 마늘 수입을 줄였더니 중국이 바로 핸드폰 수입 규제를 하고 나와서 우리가 결국 손들었어요. 그걸 생각하면 중국을 자극하는 건 국익에 도움이 안 되는 겁니다.
경제 때문에라도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또 국민적 자존심이랄까 국가의 위상을 다시 회복하는 방식으로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대책 없이 중국한테 책임론을 들이대면서, 결국 중국이 우리를 무시하게 만들지 말고, 어른스러운 외교를 해야 하는 겁니다.
최근 중국의 대남·북한 행보는 이명박 정부 외교에 대한 불만과 견제의 의미가 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 지역내에서 국격에 맞게 무시당하지 않고, 손해 안보고 살아가려면, 대미 편향 외교에 몰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이미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경쟁관계에 들어선 현 상황에서, 한미동맹은 강화되어야 한다고 보면서 중국한테 북중동맹을 깨고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무리하게 요구하면 안 됩니다. 전통적인 우방관계는 유지하되 상대측의 입장도 배려하면서 그 속에서 국익을 키워나갈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전통파가 주도하는 중국 외교, 북한 안 버린다
두 번째 주제, 북중관계와 한미관계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가 한미동맹에 매달리면 미국은 '확장된 억지(extended deterence)'까지는 보장해 줍니다. 이명박 정부 첫해에 한미동맹을 강조하니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한미동맹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말을 했어요. 그때부터 아마 중국은 이명박 정부가 한미동맹에 치중하고 남북관계를 도외시하면 한중관계도 좋아질 수 없다는 전망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은 한국전쟁 기간과 종전 후에 북한에 '출혈 원조'까지 했고, 60~70년대 중소분쟁 시기는 물론 그 이후에도 '사회주의 형제국', '조중혈맹(朝中血盟)',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깨지면 이가 시리다)'의 논리로 북한을 끌어안았어요.
지금도 그런 입장에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그렇습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한미동맹은 우리가 주한미군 주둔비를 올려 주고 무기를 많이 사줘야 유지되는 거라면, 지리적으로 딱 붙어있는 북한이 사고를 쳐도 중국의 더 큰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해서 결국은 북한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관계가 북중관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미동맹은 우리가 필요로 해서 유지·강화시키려고 하는 것에 반해 북중관계는 중국의 필요에 의해서도 유지·강화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중국도 북한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가 있어요. 그리고 중국에서는 소위 국제파라고 해서, 중국도 미국과 보조를 맞춰가면서 국제적인 위상을 강화해야 하고 북한 같이 도발적인 행위를 하는 세력을 감싸고 도는건 적절치 못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중국 정부는 전통파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중국 자신을 위해서라도 전통적인 조중혈맹 관계를 절대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전통파의 입장은 북한을 통해 무슨 이익을 보자는 게 아닙니다. 북한을 잘못 관리해서 불이익이 생기는 걸 막아야 한다는 겁니다.
현실적으로 아직도 전통파가 중국의 대외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고 봐야 하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그렇게 나가리라고 봅니다. 우리 언론이 가끔 중국 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중국도 바뀌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는데, 그건 국제파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전통파의 입장에서 조중관계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하니까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 결의 1874호가 나오고, 중국에서 국제파들의 목소리가 한때 힘을 얻었지만, 그러나 곧바로 내부적으로 정리가 됐어요. 그리고 7월 말에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담당 국무위원한테 대북 제재 동참을 요구했는데, 다이빙궈가 '안보리 결의안엔 찬성했지만 대북 제재 적극 동참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 제재 결의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인도적 대북 지원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어요. 중국에서는 여전히 전통파가 한반도·대미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한미관계를 보면, 미국은 때로 자기네 국가 이익을 위해 우리를 버리더라 이겁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94년 미북 제네바 합의가 나올 때 인데, 미국은 우리는 빼놓고 북한과 합의서를 만들고 경수로 건설 경비 중 70%를 우리한테 부담시켰습니다. 미국은 급하면 일본도 버립니다. 2008년 10월, 부시 정부는 일본 아소 내각의 납치 문제 조건화 요구를 무시하고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했습니다.
우리가 미국한테 바둑에서 사석(捨石), 즉 버리는 돌이 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항상 인식해야 합니다. 미국에 잘 하면 영원히 우리 편이 될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6자회담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예요. 방중한 김정일 위원장이 조건부 비슷하게 얘기를 했기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 방중 후에도 6자회담 전망이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도 6자회담에 대해서는 과거에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 과정에서 주고받은 얘기를 토대로 중국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미국도 달라지리라고 봅니다.
중국이 김정일 위원장을 NPT검토회의가 시작되는 날인 5월 3일에 초청한건 경제 지원이나 천안함 물타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6자회담 재개의 모멘텀을 살리기 위해서 타이밍을 맞춘 거라고 봅니다. 미국으로부터도 어느 정도의 암시랄까 물밑교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때를 선택했다고 봐야 합니다.
클린턴 장관과 다이빙궈 국무위원이 4월 29일 6자회담 재개 문제를 논의하고 난 뒤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이 있었다는 걸 따져 보면, 미국이 중국한테 명언적으로 '김정일을 불러서 6자회담 재개 수순을 밟아주시오'라는 얘기는 안 했겠지만, 어쨌건 중국이 좀 움직여 주기 바란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김 위원장을 불러들였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김 위원장의 방중은 오래전부터 양국간에 준비가 되어 왔던 건 우리 모두 아는 바 아닙니까?
그리고 최근 들어서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의 얘기가 이미 6자회담 쪽으로 자꾸 가고 있었어요. 천안함이란 단어도 있었지만, 6자회담도 자주 거론됐고 비중이 점점 더 커지는 기미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미국은 천안함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 결과가 발표되면 좀 더 홀가분하게 움직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일단 우다웨이(武大偉) 한반도 사무 특별대표가 움직이면서 중미가 6자회담 국면으로 옮겨 갈 거라고 봅니다.
한미관계가 아무리 견고해도 북중관계를 능가할 수는 없다는 게 동북아 국제정치에서 움직일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미국도 자기네 필요가 있으면 우리 요구 들어주는 척 하면서 슬그머니 정책을 바꾸어 나갑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사정들을 어떻게 적절히 활용해서 국익을 챙길 수 있을지, 그런 문제에 대한 차원 높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정부는 현미경만 가지고 동북아 정세를 보는 것 같은데, 미국이 어떤 식으로 서서히 움직이는지 망원경적 시각도 필요합니다. 말로는 한국 정부 편을 들어 주는 것 같지만, 거기에 만족하다가 언젠가는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릅니다.
유럽서 '천안함 외교'? 6자회담 외교부터 하라
마지막으로 천안함 외교와 6자회담 외교의 상관관계에 대해 짤막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월요일 아침 신문을 보니까 외교부 장관이 이번에 유럽에 가면서 유럽 국가들한테도 천안함 문제를 설명한다고 하더군요.
천안함을 어뢰가 공격했다고 하면서 처음에는 그 어뢰가 중국제나 러시아제일 수 있다고 하더니만, 독일제라고 했다가 또다시 말을 바꾸어 나가고 있는데...그거 증거도 없이 유럽에 가서 독일제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허허허...
우리 외교부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어리석은 짓은 안 할 겁니다. 보수 언론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몰아갈 뿐이지, 유럽에 가서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으로 밝혀질 경우 우리 편이 되어 달라"는 식으로, 가정을 전제로 한 협조를 요청하고, 유엔 안보리에 갔을 때 찬성해 달라고 하면 정말 나라 망신이 될 겁니다. 외교부도 그 정도는 알지 않겠어요?
나중에 확실한 물증이 나오면, 여기 주한 유럽 대사관들도 다 있고 유엔에도 각국 대표부가 다 있으니까 그런 경로를 통해서 얼마든지 전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조사 결론도 안 나왔는데 그런 외교를...외교부가 그렇게는 안 하리라고 봐요. 이번에 대중외교에서 실수를 해서 그렇지, 곧바로 또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어쨌든 천안함 사고의 시비곡절은 분명히 가려져야 합니다. 6자회담이 열리고 난 뒤에 6자회담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남북대화가 다시 재개되어야 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시비곡절은 분명히 가려져야 하지만...그러나 천안함 사고와 6자회담을 연계시키는 건 매우 현명치 못하다는 말을 꼭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면...6자회담은 천안함보다 훨씬 더 심각한 안보 위협을 가져오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담입니다. 북한이 천안함 사고를 냈다는 말이 아니라...천안함 문제를 미제로 남겨 두고 6자회담도 안 되게 그냥 놔두면 북한이 언젠가는 노골적인 대남 군사행동을 안 한다는 보장이 없어요. 남북관계가 이렇게 악화일로를 걸어 나간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천안함 같은 사고를 예방하는 것과,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국제공조로 막는 것의 경중을 따져보면 하늘과 땅 차이에요. 물론 천안함 사건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비극적인 일이었지만 민족의 장래와 관련된 문제까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북핵 문제를 잘못 다뤄서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행세하고 인정까지 받게 되면, 그 때는 우리 예산구조부터 바꿔야 되는, 정말 어려운 상황이 전개될 겁니다. 통일도 기대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과거 미국 측 대표로 전시작전통제권 반환 문제를 협의했던 리처드 롤리스 전 미 국방부 부차관보가 얼마 전에 전작권 문제를 한국의 국내정치에 쓰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전작권은 반드시 약속된 시기에 돌아옵니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라도, 그 이전에 북핵 문제에 관한 가닥을 잡아야 하는 겁니다.
국내정치적 계산만 해서 북한 때리기를 계속하고, 천안함 외교에 몰입하면서 6자회담 재개를 지연시키는 건 자살적인 선택입니다. 그간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6자회담이 이어지지 않고 대북 제재, 제재를 위한 관련국 협조, 이런 것에나 힘쓰면서 회담을 지연시키면 북한은 그 틈새시간에 핵 능력만 강화할 거예요.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니까 빨리 6자회담을 열어서 평화협정 논의도 시작하던지, 북미수교가 진전되도록 추동하는 게 결과적으로 북핵 문제 해결을 한시라도 앞당기는 현명한 선택이 될 겁니다. 6자회담과 천안함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지 마라. 백대일, 천대일, 만대일로 비중이 다르다. 이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 한반도평화포럼 상임위원)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