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원망하지 않는 사람도 있더냐.
- 마지막 회, 대길이 철웅에게
업복이는 호랑이 사냥꾼이다. 그는 관군도 쓰지 않는 방포술을 익혀 능히 사용한, 시대를 앞서갔던 사람이다. 그러나 노비로 신분이 굴러 떨어진 후, 방포술을 사용할 길을 찾지 못한다. 신나는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호랑이와의 대결을 전해줘야 했을 이 강원도 사나이는 광에 처박혀 새끼를 꼬다, 양반을 쏴 죽이는데 그가 배우느라 일생을 바친 방포술을 쓴다.
태하는 조선 최고의 무장이다.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고 부하들을 핏줄처럼 아끼며 올바른 세상을 염원한다. 그러나 그의 검술은 국가를 보호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 혹은 올바른 세상을 세우는 데에 쓰이지 못한다. 도망 노비 신세가 된 자신을 간신히 지켜낼 뿐이다. 그는 스승도 지키지 못한다. 부하도 지키지 못한다. 자신을 쫓는 적조차 같은 나라 백성이라는 이유로 죽이지 못한다.
대길은 노비 사냥꾼이다. 저자에서 배운 싸움 실력으로 조선 최고의 추노꾼이라 불리는 어둠의 사나이. 그가 그렇게 살았던 데는 이유가 있다. 양반, 상놈 구분 없는 세상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악귀처럼 익힌 싸움의 기술은 사랑하던 여인을 안전하게 떠나 보내기 위해, 스스로의 죽음을 재촉하는 데에 쓰인다.
<추노>의 주인공은 세상에 의해 날개가 꺾였다.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고자 희망을 가지고 익혔을 기술은 제 용도로 쓰이지 못한다. 대길의 칼은 언년이와의 사랑을 지키는 데에 쓰이기는커녕 오히려 언년이의 목을 겨눈다. 업복의 총구는 호랑이 대신 사람을 향하며 그를 끊임없이 번민하게 한다. 전장 대신 도망 길에 휘두르는 태하의 월도는 같은 백성을 차마 죽일 수 없어 허공을 벤다.
그러나 그들이 칼춤을 추고 총을 드는 모습만큼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이 <추노>를 보는 이유였다. 좌절한 꿈도 꿈이요, 꺾인 날개도 날개일진대, 제 자리에 있지 않더라도 그 성실한 움직임의 순간순간은 전율이 일었다. 사람이 삶으로 몸에 익힌 어떤 경지. 그리고 그 경지가 제 자리에 쓰이지 못하는 처연함. 살아남겠다는 몸뚱이의 의지들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은 <추노>를 걸작의 문턱까지 데리고 온다.
동의할 수 없는 시대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추노>는 다른 드라마의 몇 배나 될 법한 등장 인물을 통해 이 질문을 짜놓는다. 이 가슴 뛰는 질문에 대답을 얻는 과정을 어떻게 풀어나가는가가 <추노>가 가진 숙제였다. 그러나 이 새벽 찬물 같은 질문에 <추노>가 내놓은 대답은 <추노>를 걸작의 반열 바로 앞에서 멈춰 세운다.
▲ <추노>의 마지막 회에서 주제를 담은 장면은 업복의 궁궐 진입이다. ⓒKBS |
<추노>의 마지막 회에서 주제를 담은 장면은 업복의 궁궐 진입이다. 노비당의 동지들이 양반에게 이용 당해 몰살당한 후, 업복은 혈혈단신으로 총 네 자루를 짊어지고 삼보방포의 약점을 스스로 보완하며 궁궐에 진입한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추노>의 악의 축, 좌의정 이경식을 마주치고 그를 사살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관군에게 붙들린 업복의 눈빛은 패배주의와 냉소에 찌들어 있던 다른 노비에게 분노와 자각을 전이한다.
드디어 노비가 권력의 핵심을 무너뜨렸다는 감격은 잠시 제쳐두자. 좀 이상하지 않은가? 업복은 안중근이 아니다. 악한 권력의 핵심을 계획적으로 제거한 것이 아니다. 그는 궁궐에 진입한 후 눈 앞에 보이는 첫 벼슬아치를 사살했을 뿐이다. 만약에 그 벼슬아치가 노비 추쇄를 금지시키려던 사람이었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비극이 되었을 것인가.
업복의 테러는 노비들의 연대를 통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원래 업복은 그 정도의 테러가 가능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업복이 행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예시라기보다, 그동안 난공불락이었던 좌의정 이경식을 노비의 손에 떨어뜨린 통쾌함을 위한 서비스였다.
그렇다면 주인공 대길의 죽음은 어떠한가. 대길은 스스로를 위악 속에 가두고 살다 간 마초적인 순정남이다. 끝끝내 마음 한 번 제대로 내비치지 않고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그의 남자를 동료로 맞아들이며 제 발로 죽음 길로 찾아들어가다니 이렇게 슬플 데가 있는가.
그렇다면, 대길이 몸부림치며 살았던 인생은 무엇인가. 그가 '매력적'인 것과 그의 인생이 '무엇'인가는 별개의 문제다. 대길은 자신을 마음의 감옥 속에서 꺼내지 않고 의리의 싸움꾼의 매력을 뽐냈지만 그 에너지는 결국 간 곳이 없다. 대길이 한 것이 있다면, 대길만큼 매력적인 인간이 더 이상 '개죽음' 당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준 것일 뿐. 그런데 그 '개죽음'마저 드라마적으로 대길의 매력을 완성하는 요소가 아닌가. 이 역시, 동의할 수 없는 시대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비껴난 결말이다.
물론 업복의 통쾌한 거사와 대길의 장렬한 죽음은 <추노>가 시청자를 위해 준비한 가장 뜨거운 선물이고, 충분히 즐길 만하다. 즐겁기에 <추노>는 수작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추노>가 애당초 던졌던 걸출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감상적인 해소일 뿐이다. 추노가 그려내는 생생한 인물들과 아름다운 미장센들은 이 질문에 치열하게 녹아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이 시대에 이렇게 처연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감상 속에서 머문다.
▲ 추노가 그려내는 생생한 인물들과 아름다운 미장센들은 이 질문에 치열하게 녹아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이 시대에 이렇게 처연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감상 속에서 머문다. ⓒKBS |
이렇듯 <추노>는 막강한 감상주의 안에 시청자들을 끌어안는다. 흩어진 이야기들은 흩어진 채로 남는다. 그리고 생생한 캐릭터와 아름다운 이미지는 그 가능성을 못다 펼친 채 아쉽게 접힌다. 이는 <추노>의 중반부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추노>의 주제곡, 임재범의 '낙인'은 <추노>의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다. 후렴구의 클라이막스 한 소절. '하루가 일 년처럼 길구나.' 악다구니 같은 삶을 살아가는 대길의 정서를 너무나 잘 드러낸 가사.
그러나 이 노래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주야장천 쉴 새 없이 드라마에 흘러나온다. 어떤 시청자는 이를 빗대 이렇게 비꼬았다. '노래가 일 년처럼 길구나'. 그리고 이것이 <추노>가 택한 길이었다. 대중성을 위한 감상주의. 그리고 <추노>는 2010년 대한민국 드라마 판이라는 저자거리에서 오래 기억될 승리를 거머쥔다.
<추노>는 눈 닫고 귀 막고 주인공이 부러진 날개를 퍼덕이려 애쓰는 모양을 한껏 즐기고 싶었던 매력적인 드라마였다. 하지만 이제 드라마는 더 이상 신화가 될 수 없다. 2010년은 <모래시계>가 방영될 때처럼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본방송으로 드라마를 보고 각자의 감상을 가슴에 품고 지인들과 사적으로 몇 마디를 나누는 세상이 아니다. 본방송 이외의 경로로 드라마를 접하고, 익명의 그늘에서 작가와 연기자를 신랄하게 공개적으로 인신공격하며 낄낄거리는 웹 상의 저자거리가 펼쳐진 세상이다. 그리고 <추노>는 그 징글맞은 저자에 제대로 낙인을 찍었다.
나는 주인공들이 이루지 못한 꿈이 슬프다. 그들이 제대로 써보지 못한 삶의 기술들이 처연하다. 그리고 상업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추노>가 아쉽게 멈춰선 걸작의 문턱이 안타깝다. 걸작의 탄생은, 꿈이자 희망의 탄생이다. 그리고 그 탄생의 기회가 한 번 오기도 무척 어렵다. <추노>는 한국 드라마의 미래를 열어젖혔으나, 아쉽게 걸작에 못 미친 수작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오늘 나는 우리의 나쁜 세상을 대면한다. <추노>의 비장한 감상주의가 제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충분히 나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를 충분히 비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울분을 감상으로라도 풀지 않으면 못 견디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는데 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인가. 그래, 원래 이런 대답은 드라마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안 인물들의 생생함과 이미지를 마음의 동력으로 삼아, 오늘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동의할 수 없는 시대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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