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어디 낯선 땅에 들어 온 느낌이다. 여기가 어딘가? 아수라의 세곈가? 가상의 세곈가?
내가 너 같고 네가 나 같다. 누가 누굴 괴롭히는 것도 같고 서로를 바꾸어 즐겁게 하고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가상이 현실을 패러디하고 현실이 가상을 패러디한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알레고리이고 모든 것이 가상이다.
부당한 해임으로 시작된 이 게임은 계속해서 부당의 부당을 확대 재생산한다. 불법 부당을 시작한 사람은 어느새 이 자리를 빠져 나와 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 즐기면서도 마음은 조마조마하고 한편으론 괴로울 것이다. 이 게임이 자기로부터 시작된 허구의 가상 게임이라는 것이 다 알려지면서, 가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 '불법 부당' 게임의 한쪽 당사자이다. 예술가로서 이런 가상의 세계에 익숙해 있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게임을 마냥 즐기기만 하는 데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여보세요들! 이는 현실 같은 가상이 아니라 가상 같은 현실이랍니다.'
2기 위원장인 나를 부당하게 해임하는 것으로 시작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두 위원장 사태는 당연히 나를 '위법'하게 해임한 유인촌 문광부장관의 책임이다.
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전 정권의 코드인사를 운운하면서 나와 김윤수 당시 현대미술관장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자진해서 사퇴를 하라는 것이다.
그 다음부턴 수시로 국장과 과장들을 보내 자진 사퇴를 압박해 왔다.
아마 이들은 2008년 8월 말에 새로 시작하는 2기 위원들에 맞추어 나를 물갈이하고 싶었을 것이다. 국정감사를 치르고 11월이 되자 장관과 문화부의 공세는 더욱 심해졌다.
11월 중순 당시 문화부 차관이었던 김장실 차관이 문화부로 나를 호출했다. 아마 마지막 통고를 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 부딪쳐 나가기로 했다.
문화부로 막 나가고 있는데 김윤수 현대미술관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미 김관장은 김차관을 만나 통고를 받아, 나와 사퇴문제를 의논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의논은 나중으로 미루고 나는 김차관에게로 갔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빨리 나 보고 자진 사퇴를 하란다. 공식적인 통고였다. 나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이것이 문화부의 공식적인 통고인가를 복도까지 들릴 정도로 큰소리로 따져 물었다. 사람 좋은 김차관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퇴는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선언하고 그 자리를 나왔다.
아 이제 막장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 주에 문화부로부터 '특별조사'가 나왔다. 그들은 위원회 직원들을 압박해 가면서 나에게 불리한 모든 것들을 만들어 냈다. 지금 법원이 대부분 위법하다고 판결한 그 사유들을 만드는 데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다음 주는 해임통지였다. '그 직을 면함' 딱 다섯 글자였다. 해임사유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날 12월 5일 오후에 기자회견을 열고 '이 엉터리 부당 해임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해임무효소송 등 모든 법적인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2기 위원들은 언제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 재빠르게 나의 해임을 지지하고 찬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들은 나의 해임 사유를 알지도 못한 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임 지지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들이 허수아비가 아니고 뭔가?
요즈음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이들 가운데 지금 위원장으로 있는 오광수를 비롯한 6명은 특별조사가 나오기 바로 직전, 11월 14일 (그 당시 위원장인 나도 모르게) 장관 앞으로 '해임 청원서'를 올렸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대로 어설프게 나의 해임 시나리오를 짠 셈이다.
해임청원서(11월 14일)- 차관의 마지막 통고(11월 19일)- 사퇴 거부(11월 19일)- 특별조사(11월 25일 전후)- 해임(12월 5일)-해임지지성명(12월 5일)
어디로부터 지시를 받아 했겠지만 제법 그럴듯한 각본이다.
내가 곧바로 해임무효소송에 들어가자 그들은 아주 큰 실수를 한다.
나의 해임사유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유인 '문화예술진흥기금의 손실' 부분이다. 그들은 이 기금손실의 사유가 내가 기금운용을 잘못해서 손실을 본 것이라고 여기고 여기에 사활을 걸었다.
위원회는 4000억 여 원의 기금을 몇 십 군데의 투자회사에 나누어(포트폴리오 방식이라고 한다) 투자를 해서 거기에서 나온 이익(일년에 2~3백억 원)을 다른 재원과 합쳐 예술계를 지원한다. 투자회사들 가운데 '메릴린치'라는 투자회사에 100억원을 투자 한 것이 60여 억 원 평가 손실(평가된 가치가 하락한 것으로 환매하기 전에는 실현되지 않은 손실임)이 날 가능성이 있는데 여기에 투자를 한 것은 분명히 위원장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매년 기금운용은 금융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금운용심의회'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투자를 하고 또 위원회 내에 펀드전문가가 둘이나 이 기금운용을 담당하고 있어 매년 기금운용을 하는 정부기관들 가운데서는 우리 위원회가 항상 상위에 랭크 돼있었다. 물론 문제의 투자회사는 상대평가를 하면 'c'등급에 해당하여 투자에 위험표지가 달려 있는 회사이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많은 투자회사들이 평가 손실을 보고 있었고, 12월에 난 해임처분무효소송에 대한 1심 판결에서도 재판부는 '경제위기로 인한 주가하락 등을 고려할 때 발생손실이 내부규정 위반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한 바 있다.
더 큰 문제는 문화부가 만들었다. 내가 제기한 해임무효소송에 맞대응하기 위하여 메릴린치에 투자했던 100억원의 투자액을 환매하도록 함으로써 '평가 손실'일 뿐이었던 것을 40억원의 '확정된 손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나에게 이 손실 분 중에 2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왔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메릴린치 회사에 했던 투자를 그대로 놔두었으면 작년에 주가상승 등 상황이 호전되어 60억의 평가 손실을 보전하고도 남을 상당한 이익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100억원 투자가 환매되지 않았다면 120억원이 되었든지 그 이상이 되었든지 한단다. 그러니까 40억원의 손실과 금년에 받을 이익금(원금 100억원은 그대로 묻어 두고) 10-20억 을 합치면 5, 60억원의 기금을 날려 버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문광부로부터 투자를 해지하라고 지시를 받았던 위원회의 펀드매니저 직원은(원래 이 기금운용에는 문화부든 어디든 절대 공무원이 개입할 수 없다) 차마 자기 손으로는 기안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오광수 위원장이 직접 기금해지를 결재했다고 한다.
물론 이 해지로 인해 확정된 손실액을 근거로 나한테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법원은 작년 10월의 1심 판결로 이미 나의 손을 들어 주었다. 당연한 결과다.
이 5, 60억원의 기금 손실은 나중에라도 오광수 위원장과 문화부가 꼭 책임을 지고 갚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각본에 의해 짜여진 나의 해임은 최종 책임자가 유인촌 문화부 장관임에 틀림없지만 해임청원서와 해임지지성명을 낸 2기 위원들, 기금손실을 확정하여 예술계를 지원해야 할 소중한 재원을 고의로 날려버리고 나에게 손배소를 제기한 오광수위원장도 이 책임에서 절대 자유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는 이 가상의 게임을 끝낼 때이다. 이 게임의 끝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 게임이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하면 되니까. 위원장으로서의 나의 출근은 바로 사법부가 판결한 결정을 따르는 법치의 행동이며 동시에 부당한 방법으로 문화예술계를 어지럽힌 유인촌 장관에게 책임을 묻는 상징적 행위이기도 하다.
유인촌 장관에게 다시 한 번 진정으로 권한다. 가상의 무대에서 내려와 나에 대한 잘못된 해임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자진 사퇴하시라. 이 사건은 오래 갈수록 당신만 괴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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