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안기부 도청테이프 공개로 시작된 <삼성그룹의 불법로비사건>은 아직 막을 내리지 않았다. 어둠 속의 관련자들이 이제 겨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또 다른 테이프나 녹취록의 공개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밝혀진 사실들만으로도 이 사건의 본질과 성격을 파악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뒤늦게 나타난 엑스트라의 활극에 눈이 팔려 사건의 본질적인 흐름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범죄 수사물이지 첩보 스릴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재벌그룹과 정치권과 언론사와 국가권력기관의 검은 커넥션이다. 삼성그룹의 불법 정치자금 공세가 그 주요측면이고 이를 세상에 드러낸 옛 안기부의 불법도청은 부차적인 측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에 대한 조사와 수사를 국정원과 검찰이 맡는 것은 문제해결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일이다.
국정원은 조사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조사의 대상일 뿐이다. 이미 1999년도에도 이 사건을 봉합하고 은폐한 전과가 있는 기관이다. 검찰 역시 이 사건에 관한 한 신뢰도가 제로 수준이다. 녹취록에 등장하는 두 명의 삼성장학생이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지근거리에 있는데 삼성의 무엇을 수사한단 말인가?
대상그룹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삼성의 사돈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한 검찰 아닌가? 또 대상그룹 부실수사를 엄정히 감찰하라는 법무부장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주요 관련자를 조사 한번 않고 면죄부를 발급한 게 바로 어제의 일 아닌가? 게다가 해마다 지급되던 삼성의 장학금이 98년부터 끊겼다고 볼 어떤 정황도 없으며, 졸업생이 생기는 만큼 그 후 신규 장학생이 새로 생긴 것도 분명할진대 미리부터 공소시효, 감찰시효 다 끝났다고 못 박는 검찰총장이 무엇을 파헤칠 수 있단 말인가?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받는 가장 큰 충격은 낮의 제왕과 어둠의 황제가 동일한 실체라는 점이다. 헌법과 법률과 사회적 관습과 실제 생활 속에서 가장 큰 합법적 권력을 가진 세력들이, 바로 어두운 뒷골목 범죄의 현장에서 헌법을 뛰어넘고 법률을 짓밟고 이권과 청탁으로 연계된 불법행위의 주모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백주 대낮에는 도덕적 권위와 명예와 자긍심이 하늘을 찌를 듯 고귀하고 도도한 존재들이 바로 음모와 배신의 골방에선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나라의 기강을 짓밟고 도덕과 정의를 압살하는 파렴치한 범죄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250억원의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던 삼성그룹의 총수는 97년 10월 개천절 특사로 사면을 받았다. 97년 4월, 9월, 10월의 녹취록에 따르면 이 그룹 총수는 97년 불법대선자금을 나눠주는 일도 총지휘하고 있다.
그리고 녹취록에 등장하는 두 명의 심부름꾼은 당시의 현직 대통령 아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92년 대선자금 문제가 안전한지 걱정하고 있다. 97년에 심부름꾼이었던 이 두 명 중 한명은 2002년 대선에선 자신이 삼성그룹 불법대선자금을 총지휘했다고 주장해 유죄판결을 받은 뒤 지난 5월 대통령 특사를 받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 2002년 대선에서 이 오너도 아닌 심부름꾼이 자금 집행규모와 대상을 직접 정했겠는가? 97년 4. 9. 10월 녹취록에 나오는 액수만도 100억에 이르는데 당시 총 제공규모는 얼마였는가? 1조원에 이르렀다는 92년 YS의 대선자금 중 삼성이 담당한 규모는 얼마였는가? 불법자금의 제공으로 취한 부당이익은 어느 정도인가? 삼성그룹이 불법으로 제공한 정치자금은 분식을 거쳤든 횡령으로 처벌되었든 결국 비용으로 처리되어 소비자인 국민에게 부당하게 전가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국민은 이를 알 권리가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한나라당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의 말은 옳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은 입이 다섯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 국민들의 생각이라는 걸 그는 알아야 한다.
'삼성그룹이 여당 대선후보에게 불법자금 지원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야당 대선후보의 최측근이 협박하고 조르는 광경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모멸감뿐이다. 현직 대통령이 사람을 시켜 국내 유수의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사주에겐 비밀로 하라'면서 여당 대선후보 교체안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편집국장은 이를 사주에게 보고하지 말랬다는 말까지 사주에게 보고하고, 편집부국장은 야당후보에게 줄을 서서 정보보고를 하는데 대선결과가 어찌 될지 몰라 그대로 두고 있다고 사주가 태연히 말하고 경쟁 신문사에선 오너가족회의를 열어 야당후보를 <죽이기로> 했다는 말까지 덧붙이는 장면을 읽으면서 하늘을 바로 쳐다보지 못할 것 같은 부끄러움에 몸을 떨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진실이요 진상이다. 처벌이니 용서니 화해니 하는 말은 아직 이르다. 진실규명 없이 청산은 있을 수 없다. 50년 100년 전의 과거사를 왜 진상규명하려 하는가? 법률 시효가 남아서인가? 역사에는 시효가 없다. 진상이 규명되어야 청산이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치러진 1987년 대선 이래 모든 대통령선거에서 삼성그룹은 막대한 불법지금을 쏟아 부었다. 그 비용은 국민들이 부담했고 그 과실은 그룹총수와 대주주들이 챙겼다. 정치권 외에도 대다수의 입법, 사법, 행정부의 힘있는 세력과 언론 등이 그 떡고물을 나눠먹었다. 이 악의 사슬을 끊어낼 기회가 이제 우리에게 왔다. 삼성그룹으로부터 이 나라를 해방시키기 위해, 부패한 정치세력으로부터 우리 국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국정조사와 특검은 실시되어야 한다.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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