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은 최고의 진통제다. 원더걸스의 '텔 미'가 막 뜨던 시절, 밤샘 작업으로 모두 떡이 된 기분으로 일을 하던 특수 영상실의 어떤 날. 방송 시간에 쫓겨 급하게 작업하던 CG전문가들이 TV에 '텔 미'가 나오자 약속한 듯 일제히 손을 멈추고 시선을 TV로 돌린다. 잠시 흐뭇한 침묵 속에 오고가는 격한 공감. 노래가 끝나자 낮은 탄식과 함께 저마다 자신의 모니터에 도로 얼굴을 박는다. 과연 아이돌은 피디가 응원 차 사간 커피가 무색할 정도의 각성제이자 진통제였다.
최근 가장 뜨거운 진통제라면 2PM일 것이다. 연말 시상식에 바쁘게 돌아다니며 'Heartbeat'를 부르는가 하더니 단기간에 3곡 연속 음원 차트 1위를 달성했다. 2PM이 안무하는 '뛰는 심장'은 카라의 '엉덩이 춤'만큼이나 아이돌의 어떤 정수를 표현한다. 넘치는 에너지와 뜨거운 심장, 그 생기와 매력. 네가 짓밟고 떠난 심장이 아직도 뛰고 있어. 삼촌들이 카라의 엉덩이 춤에 맞춰 턱을 돌렸듯, 2PM이 가슴에 갖다 댄 주먹에 누나들의 심장도 터질 듯 뛴다. 끓어 넘치는 '짐승돌'의 에너지가 애절한 노래와 안무를 만나고 여기에 팬들의 함성이 합쳐지면 절정의 순간이 완성된다.
▲ '2PM. 아이돌의 운명과 수명은 어떻게 되는가. ⓒ뉴시스 |
그런데, 우리는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이것은 나의 질문이 아니라 G.O.D가 4집의 도입부에 삽입했던 질문이다. 아이돌의 운명과 수명은 어떻게 되는가. 김규항이 10년 전에 썼던 표현을 빌리면 아이돌은 '공산품'이다. 기획과 시스템을 통해 철저하게 계획되고 통제된 문화상품. 유통 기한이 지난 상품은 팬들의 눈물을 뒤로 하고 해체하거나 군대에 간다. 벌써 2PM은 '한국 비하 파문'에 폭력적으로 대응한 대중과 언론에 의해 리더인 재범을 잃었다. 그들 개인은 물론 재능을 지닌 각각의 사람으로 삶을 이어가겠지만 '2PM'이란 이름으로 기획된 상품의 수명은 당연히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돌 산업의 판도와 대중의 수요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까지 위로받을 수 있을까.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서 끊임 없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던 마츠코가 모두에게 배신당한 후, 비대해진 몸집으로 마지막으로 마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 아이돌의 팬 노릇이었다. 아이돌이 전하는 달콤한 사랑의 언어들과 아름다운 모습, 에너지는 잠시 잠깐 몸 속에 생기를 주입한다. 하지만 그 뿐, 아이돌은 마츠코의 일생을 전혀 바꾸지 못한다. 언제나 위로산업, 진통산업으로서의 대중문화는 각광을 받아왔다. 그러나 대중에서 비롯되는 대중 문화는 문화 산업으로 포섭되면서 정작 그 대중을 소외시킨다. 지루하도록 명백한 이야기다. 우리는 아이돌의 소비자이지 아이돌의 생산자가 아니다. 일상이 지칠 때 생기와 매력으로 가득 찬 젊은이들의 춤과 노래를 들으며 잠깐 진통 주사를 맞을 뿐이다. 아이돌 자신들 또한 문화 산업의 결과물에 가깝지, 자신의 춤과 음악의 온전한 주인이라고 볼 순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고 받는 절정과 위로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대중 문화 상품은 정말 마약에 불과한가. 사람의 마음을 구하기는커녕 더 깊은 소외를 가져오는 것은 아닌가. 아이돌의 생기와 매력은 어디까지 유효한가.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중 한 장면. 마츠코가 모두에게 배신당한 후, 비대해진 몸집으로 마지막으로 마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 아이돌의 팬 노릇이었다. 언제나 위로산업, 진통산업으로서의 대중문화는 각광을 받아왔다. 그러나 대중에서 비롯되는 대중 문화는 문화 산업으로 포섭되면서 정작 그 대중을 소외시킨다. |
다시, 2PM. 그들에게는 최초에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있었으니 그것은 리더 재범이 순식간에 탈퇴해버리고 미국에 가버린 일이었다. 아이돌도 사람의 일이라, 남은 멤버들과 팬들은 리더의 부재에 엄청난 감정을 토해냈고, 1명이 빈 상태 그대로 다음 앨범을 준비함으로써 그 결핍과 그리움, 빈자리를 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2PM의 무대는 원래 존재하던 남성미와 에너지를 넘어서는 간절함과 진정성을 갖추게 되었다. 공산품 아이돌이 사회적 맥락 안에서 새로운 의미와 위치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대중이 만들지도, 스스로가 기획한 음반을 내놓은 것도 아니지만 2PM은 대중과 언론의 폭력을 증명하면서 그 부재를 무대에서 드러내는 새로운 형태의 아이돌이 되었다. 사람들은 'Heartbeat'의 무대를 보며 감탄과 동시에 탄식한다. 그 소년이 있었더라면. 누가 그 소년에게서 무대를 빼앗을 권리가 있었던 것인가. 2PM에게는 '이야기'가 생겼다. '해피엔딩'을 노래하고 예쁘게 웃어주는 아이돌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포함한 아이돌이 된 것이다.
아이돌이 진통제라면 현재 우리 사회는 진통제가 정말 많이 필요한 것 같다. 우후죽순으로 아이돌이 쏟아지는데도 사람들이 질릴 줄을 모르고 아이돌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진다. 하다못해 과거의 아이돌까지 다시 소환해 그 시절의 이야기를 계속 묻고 떠든다. 아이돌이 보여주는 생기와 매력은 어쩌면 그 사회의 생기와 매력에 반비례하는지도 모른다. 현실이 무채색일수록 사람들은 TV속의 반짝반짝 빛나는 기획된 젊음에 가망 없이 마음을 기대는 것이다. 그러나 생기발랄한 위로가 아무리 달콤해도 혐오스런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추락의 느낌은 무척이나 쓰다. 그래서 깨닫는다. 대중 문화가 보여주는 해피엔딩은 시청자와 계약된 기만이라는 것. 현실을 잊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2PM은 의도치 않게 시궁창 같은 현실을 팀 안으로 끌어안게 되어 버렸다. 근본적으로 깔끔한 해피엔딩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2PM은 대중문화가 보여줄 수 있는 작은 희망이다. TV 속에 해피엔딩은 너무 많고 TV 밖의 해피엔딩은 너무 적다. 그러나 현실의 비극을 반영하는 훌륭한 비극은 현실을 잊게 만드는 이상으로 더 큰 쾌감을 줄 수 있다. 진실을 직시하는 쾌감, 통쾌함이라는 쾌감, 슬플 때 오히려 슬픈 음악을 듣는 것과 같은 카타르시스. 지금의 대중 문화, 혹은 문화 산업에서는 그러한 위대한 비극이 필요하다. 의도하지 않은 결핍을 앓고 있는 2PM이 그래서 반갑다. 팀을 복원하려는 에너지와 한 사람의 부재는 아이돌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지우지 못할 불편함과 안타까움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과 안타까움은 현실을 느끼고 사고하게끔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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