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집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15살 때 방콕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처음엔 신발공장에서 2년 일했다. 여기서 모은 돈으로 오토바이를 사서 오토바이택시를 2년 몰았다. 좀 더 여유가 생기자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서 택시 기사가 되었다.
그는 5년 동안 택시를 운전했다. 결혼한 것이 이때다. 처자식이 생기자 더 벌 생각에 택시 운전을 그만두고 외국으로 나갈 꿈을 꾸었다.
처음 간 곳이 대만이다. 2년 반 동안 제사공장에서 일했다. 한 달에 60만원에서 70만원을 받았다.
그 다음 온 것이 한국이다. 처음에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컴퓨터 수치 제어) 공장에서 쇠를 깎았다. 일감이 없어서 월급도 적을 뿐 아니라 허리를 다쳐 고생했다.
몸을 다친 후 전화기 부품 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여긴 일이 많아서 월급도 많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위험하지 않아서 좋았다.
삭차이가 한국에 온 지 1년 만에 그의 아내 역시 노동자로 한국에 왔다. 당장 기숙사 생활을 때려치우고 월 30만원에 방 두 개짜리 집을 얻었다. 방 하나는 부부가 쓰고 나머지 방 하나는 친구에게 월세 10만원에 빌려주었다. 아내와 같이 사니 살맛도 나고 살림에 짜임새가 잡혔다.
아내는 CNC 공장에서 품질검사 일을 해서 남편보다 잘 번다. 한 달에 120 정도. 삭차이는 110만원. 둘이 합해서 230 정도를 버는데 아이들 교육비로 고향에 40만원을 보내고, 부부의 식비로는 30만원을 쓰며, 임대료와 전기세 등으로 30만원을 지출한다. 이렇게 이것저것 다 쓰고 한 달에 100에서 110 정도를 저축한다. 부부는 그 동안 2천만원을 저축했다. 이 정도면 부자라 삭차이는 행복하다.
▲ 삭차이ⓒ한윤수 |
하지만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 같은 그에게도 두 가지 불안이 있다. 하나는 재입국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그는 3년 기한이 다 되어 태국으로 갔다가 한 달 후 다시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그때 과연 들어올 수 있을까? 사장님 말로는 들어올 수 있다지만, 갔다가 못 들어온 사람도 있다는 얘기가 들리니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는 돈을 떼였을지 모른다는 불안이다. 그는 전에 다니던 CNC 회사에서 허리를 다쳐 치료비로 180만원을 썼다. 나중에 산재 처리가 되었다는데, 통장에는 요양급여비로 45만원밖에 안 들어왔다. 그래서 나머지 135만원을 떼인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에 흔들린다.
그는 이 두 가지 불안 때문에 나를 찾아왔다. 우선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처리 경과를 알아보고 두 번째 문제에 먼저 대답했다.
"요추 3, 4번이 아픈 것은 산재처리 되었어요. 일해서 아픈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인정했으니까. 하지만 요추 5, 6 번이 아픈 것은 산재 처리가 안 되었네요. 의사 선생님이 일 때문에 아픈 게 아니라 전부터 아팠던 거라고 본 거예요. 한국 사람도 요추 5, 6번은 흔히 아프거든요. 그리고 물리치료 받은 것은 본인이 치료비 내야 해요. 알았어요?"
"예."
그걸로 산재 문제는 처리되었다. 그는 돈을 떼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음은 재입국 문제. 서류를 훑어보니 재입국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나는 그를 불렀다.
"삭차이!"
"예."
"괜찮아!"
"괜찮아요?"
"괜찮아! 틀림없이 들어와."
삭차이는 15살 때 고향을 떠나 36살인 지금까지 타향을 떠돌고 있다. 이런 방랑자는 세파에 시달려서 그런지 까닭 없는 불안에 흔들린다.
불안을 씻어주려면 위로의 말 한 마디가 필요한데, 내 경험으로는 "괜찮아!"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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