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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사회의 학교이자 정신의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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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사회의 학교이자 정신의 사원

[김상수 칼럼]<74> 독일의 연극 프로듀서, 톰 슈트롬베르크와의 대화

독일의 연극 프로듀서 톰 슈트롬베르크(Tom Stromberg)와의 이 대담은 필자가 지난 4월 20일 베를린에 있을 때 나눈 대담이다.

독일의 연극계에서 독일의 고전주의 연극양식의 전통을 잇는 프로듀서로 유명한 톰 슈트롬베르크는 그가 제작하는 연극들이 반드시 전통의 틀에 갇혀 있는 형식만은 아니다. 그는 전통을 새롭게 실험하고 해석하는 다양한 연극들을 제작해왔다.


특히 2000년 독일 하노버엑스포 문화행사에서 예술감독을 맡아 그가 제작한 피터 슈타인 Peter Stein(필자 주-1937년 독일 베르린 출생인 피터 슈타인은 피터 브룩 Peter Brook, 아리안느 무슈킨 Ariane Mnouchkine 등과 더불어 현재 살아있는 가장 대표적인 현대 연극연출가) 연출의 2부작 '파우스트'(Faust) 무삭제 전작(全作) 공연은 세계 연극사상 유례가 없는 21시간 최장 공연시간 기록으로 유명하며 밀레니엄 대축제의 오프닝 공연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바 있다.

이처럼 그가 제작하는 연극들은 오늘날 연극의 존재방식이 과연 어떠해야하는가를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정면에서 문제 제기하고 환기하는 식인데, 이런 태도는 독일의 연극정신이 지닌 창의적인 실험정신에 그의 연극 제작방식이 맞닿아있다고 하겠다.

최근 톰 슈트롬베르크의 관심은 연극의 제작만큼이나 독일 연극의 정체성, 그리고 연극교육의 실천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 대담의 통역과 번역을 맡아 수고해준 이수은씨는 베를린 연극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무대 미술가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이다.

▲ 독일 연극 프로듀서 Tom Strombergⓒ김상수

김상수 : 베를린에 도착해서 제일 처음 만난 연극인이 민중극장(Volksbühne Berlin) 극장장이자 연출가인 프랭크 카스트로프(Frank Castorf)이다. "고발한다, 비판한다, 이것이 연극의 역할이다"-'베를린 민중극장' 프랭크 카스토르프 극장장과의 만남(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222214344&Section=04)-오늘은 독일의 연극계에서 '혁신적'인 프로듀서인 당신과의 만남을 통해, 독일의 연극 제작현실과 연극예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자 한다. 당신을 만나기 이전에 내가 만난 독일 연극인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프로듀서 '톰 슈트롬베르크'를 만나보라는 얘기들을 했다.

톰 : 아, '혁신적'이라? 아마 그 '혁신적'이란 얘기는 내가 지금까지 단순히 연극을 제작하는 프로듀서에서 탈피하여 '프로덕션시스템'을 구상하고 실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김상수 : '프로덕션시스템'?

톰 : '프로덕션시스템'의 시작은 1980년대 후반 프랑크푸르트에서부터였다. 그 때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는데, 대부분 기존의 독일 연극계가 연극 텍스트, 즉 희곡문학 중심의 연극작업이었다면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새로운 예술작업을 시도하던 젊은 예술가들을 연극계에 끌어들이고 여러 예술영역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을 모이게 하여 보다 다른 연극형식, 새로운 연극언어를 만들고 소개한 것에서 연유한 것 같다.

80년대 후반 당시 그때 뉴욕에서 막 건너 온 우스터 그룹(the Wooster Group), 폴란드 출신 예술가, 일본예술가 등, 여러 예술가들과 같이 연극과 미디어테크놀러지가 결합하는 국제적인 예술작업들을 펼쳤다. 그 때 만나진 각 분야의 예술가들과는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내가 극장장으로 일을 했던 함부르크 국립극장(Deutschen Schauspielhauses in Hamburg)에서의 작업으로까지 줄곧 이어졌다.

같이 일했던 연출가들은 지금 독일어권 연극계에서 중추적인 역할들을 하고 있는 인물들인데, 나는 극장장을 그만두고는 본격적으로 프로덕션시스템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년 전에 여기 베를린에 사무실을 차렸다. 이 사무실에는 독일에서 연극작업을 하고 있으면서 몇 년 전부터는 무용 안무작업도 같이하는 프랑스 연출가 라우랑 체토우네(Laurent Chétouane)와 팔크 리히터(Falk Richter)라는 연출가가 가세를 했고, 이들은 지금 독일에서 확고한 기반을 잡은 연출가들이라 말할 수 있는데, 비엔나 부르크극장, 쮜리히 샤우슈필하우스, 쾰른, 함부르크 그리고 베를린의 극장 등에서 일하는 연출가들이다.

이들이 극장에서 일을 할 때는 내가 그들의 대변인으로 극장 측과 상대한다. 에이전시와 같은 입장을 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는 아주 중요한 형식인데, 그들의 예술 작업에 나도 같이 동참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형식이나 일의 형태를 갖춘 '프로덕션시스템'은 아직 독일에서는 보편화 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아주 젊은 연출가들과도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 내 사무실에는 막 예술대학 과정을 마친 세 명의 젊은 연출가들도 있다.

김상수 : 당신의 작업이력을 보자면 독일의 전통적인 연극양식을 충실하게 이어가는 측면과 그 양식 자체를 오늘의 현실에 맞게 실험하고 제안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97년에 있었던 '카셀도큐멘타 엑스'(Kassel Dokumenta X)에서는 미술 전시회 큐레이터로도 일을 했는데 연극 프로듀서의 경험이 미술 전시회에서의 전시기획자로 확장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인가?

톰 : 그렇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연극작업을 할 때에도 나는 회화, 영상 등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류작업을 많이 시도했다. 그런 이유로 '카셀도큐멘타엑스'에서 전시기획에 참여한 건 나에게는 자연스러웠다. 나는 97년의 그 미술전의 전시 컨셉이 다큐멘터리(documenta)라는 주제였기 때문에 나와 같이 작업을 하는 연극 예술가들 중에 작가들, 연출가들, 배우들을 다 한데 모아 그들의 일상과 그들이 예술 작업을 하는 모습들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시기획을 했다.

김상수 : '카셀도큐멘타엑스'에서의 당신의 작업 내용은? 무대 밖에서의 연극 예술가들의 일상과 그들이 연극 작업에 참여하는 과정, 이런 것들을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예술과 일상의 새로운 형식과 접점(接點)들을 찾아보는 하나의 시도라고 이해하면 될까?

톰 : 그렇다. 정확하게 봤다.

김상수 : 당신의 프로듀서 작업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경험이 하노버엑스포 2000에서 문화예술감독으로 일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때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연극 '파우스트' 제작 작업이 있었다. 그 공연의 제작 배경과 동기는 무엇이었나? 그 당시 파우스트 공연시간이 연극 공연사상 최장시간인 21시간이라고 들었다.

톰 :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그때는 내 생애 최악의 시간이었다. 물론 그때는 평생 경험하기 힘든 대형프로젝트를 만들어보는 기회였고 평소에는 만나거나 초대하기 힘든 세계의 예술가들을 초대하고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는 했다.

김상수 : 그 때 어떤 경험들이 당신에게는 최악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나?

톰 : 한편으로는 예술을 위한 일을 하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엑스포, 즉 박람회라는 프로젝트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도 동시에 이루어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많은 압박감을 느껴야만했다. 이런 의도는 사실은 불가능한 기획이었다. 세계박람회라는 건 단추, 토마토, 와인, 세제(洗劑) 등, 마치 여러 잡화(雜貨)가 한곳에 모여 있어서 모든 것을 다 구입할 수 있는 잡화점 같은 방식이다. 그런 잡화들을 분류하고 이리저리 연결하여 전시하는 게 당시 내가 수행했던 많은 프로젝트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세계박람회 행사의 제안들 중에는 예술적으로 탁월한 제안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예술 자체로 보여주는 성과로는 만들지 못했다. 박람회 프로젝트들을 보다 예술적인 행사로 끌고 가기 위해서 엑스포 기획자들과 싸워야만 했던 일들도 결국은 싸움을 위한 싸움이 되어 버렸다. 피터 슈타인이 연출한 연극 '파우스트' 프로젝트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시간의 마라톤공연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매일 매일 싸워야 했던 그때를 회상해 보면, 그때의 일들이 나에게 반드시 좋은 경험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김상수 : 그 당시 연출가 피터 슈타인, 그에게 '파우스트'를 연출할 의사가 있는지 당신이 직접 그에게 연출을 제안하고 그의 의도에 대해서 질문을 했나?(필자 주-피터 슈타인은 고전 연극을 혁신적으로 연출하는데 탁월하다는 평을 얻고 있다.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체홉의 '세자매'와 '갈매기', 아에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등을 연출하였다. 1987년에는 유진 오닐의 'The Hairy Ape'로 로렌스 올리비에 연출상을 수상하였고 베를린 샤우뷔네(Schaubuhne) 극단을 유럽 최고 수준의 극단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유년기 시절 겪은 나치 독일의 경험으로 인해 정치적인 작품들을 많이 연출했다.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1956, 에드워드 본드 Edward Bond, 1934~, 페터바이스 Peter Weiss 1916-1982, 등의 희곡들을 연출하면서 관객들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톰 : 피터 슈타인은 '파우스트' 1, 2부작을 각색 없이 무삭제로 전작을 연출하고 싶어 했다. 내가 엑스포 문화예술 감독 자리를 맡았을 때, 독일에서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규모의 공연을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엑스포는 세계적인 규모의 행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피터 슈타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와 같이 연극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개성이 강한 예술가와의 작업은 너무나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세계 박람회 오프닝 행사로 원작 '파우스트' 1, 2부를 그대로 공연한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김상수 : 내가 한국과 독일의 연극계 상황을 비교해 보자면, 독일은 당신의 탁월한 능력을 잘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나 사회적 뒷받침이 잘 마련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톰 : 나는 내 의지로 작업할 수 있는 행복한 프로듀서다.

김상수 : 당신과 나는 나이가 비슷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한국에서 연극작업을 할 때마다 작품을 만들고 오직 연극 제작에만 열중할 수 있는, 예술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작품을 만드는 시간보다는 제작비를 만든다거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항상 소요해야만 했다. 그러나 당신의 경우를 보자면 당신은 독일에서 공연제작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배경으로 연극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는데, 특히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톰 : 예술가로서 연출가로서 일을 하느냐, 그 예술가과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드라마투르거(Dramaturg, 필자 주-연출가와 함께 작품의 해석 및 각색 작업에 참여하며 공연의 문학적인 조언과 레퍼토리 선정에 관여하는 역할) 혹은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을 하느냐는 서로 다른 것이다. 나는 다행히 연극제작자로 프로듀서로 행운이 따랐다.

김상수 : 프로듀서로 당신은 연극 사회를 조직하는 역할을 했는데, '프로덕션시스템' 일 말고도 이즈음 역점을 두는 일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나?

톰 : 그렇다. '프로덕션시스템' 일은 내가 하는 일의 일부분이다. 요즘 내가 집중하고 있는 다른 일은, 연극계 예술가들의 세대 간의 교류를 장려하는 일이다. 얼마 전 타계한 피터 차덱(Peter Zadek, 필자 주-도이체스 테아터Deutsches Theater의 연출가로 전통적 고전연극을 중심으로 유럽정통연극의 맥을 고수한 연출가) 세대와 그 다음 세대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는 것에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이로 보면 지금 나는 40대 후반이니 이 두 세대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피터 차덱이 작고하기 전에 나는 그와 함께 재능 있는 젊은 연극인들을 위해서 '연극아카데미'를 만들었다. '연극아카데미'는 세대 간 격차 없이 같이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보는 것이었다. 이건 보수적인 독일의 연극계에서는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본디, 차덱 등 성공한 연출가들이 집약한 연극 세계와 지금 젊은 연출가들 사이에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 우리 '연극아카데미'는 아직까지는 뚜렷하게 성과를 거두고 있진 못하지만, 세대를 뛰어넘는 '연극언어'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아카데미'의 시도는 매우 중요하다.

김상수 : 며칠 전에 파리에 잠시 체류하다가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왔다. 파리보다 베를린이 문화 예술 활동이 더 활성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연극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고, 오늘 독일의 연극현실을 어떻게 보나? 관객들은 꾸준히 극장을 찾고 있는가?

톰 : 지금처럼 베를린에서 연극작업을 하기가 좋은 시기는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베를린은 현재 세계 모든 예술의 포커스가 집중된 곳이다. 미술 영역과 영화, 그리고 연극분야까지 아주 활발하다. 일 년 전쯤에 다른 도시에서 페스티벌 예술감독으로 초대를 받아간 적이 있었다. 주말에 그 도시로 갔는데, 마침 그때 베를린의 한 일간지에서 배포한 금, 토, 일요일의 연극공연정보지를 가지고 있어서 그 도시의 연극 관계자들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베를린의 공연프로그램은 다양한 장르, 외국초정공연 등, 무척 다채롭다. 베를린의 주말공연 수는 보통 유럽의 한 도시의 두 달 동안 열리는 페스티벌 수준이다.

김상수 : 나는 일본 도쿄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도쿄는 하룻밤에 무대공연예술이 수 백 개가 매일 열리고 있었다. 베를린도 그 규모를 능가하는 것 같다.

톰 : 베를린도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김상수 : 나는 연극예술이 '사회의 학교이자 정신의 사원'이란 생각을 하면서 연극작업을 하고는 했다. 당신의 경우에는 당신의 인생에서 연극이란 과연 무엇인가?

톰 : 현재 나에게 중요한 순간은 사람들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같이 모이는 가에 일차적인 의미를 둔다. 축구경기든, 팝 콘서트든, 연극공연이든, 이 점은 나에게 항상 중요한 지점이다. 그러나 좋은 연극이란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내가 당신들 보다 좀 더 많이 알고 있다'라는 식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런 느낌을 주는 연극들은 대개 두, 세달 리허설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어 낸 다음에, 관객들에게 가르치듯이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 반복해서 공연되어지는 '레퍼토리시스템'의 연극들이 대개 이런 오류를 자주 범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연은, 지금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공연에서 한 줄의 대사, 한 명의 배우, 하나의 색, 하나의 음(音)이나 노래가 어떤 준비된 반복행위가 아닌, 순간순간 독창적인 요소들로 꽉 차서 관객들의 뇌리에 명징(明徵)하게 어떤 이미지를 전달하는 그 순간이 비로소 예술이 무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중요성을 의식한다.

김상수 : 조금 더 이야기를 진전시켜보자, 오늘날 새로운 연극을 하고, 실험연극을 하고, 새로운 기법, 전위적인 방법으로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고, 이런 차원의 연극들을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제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아주 젊었을 때는 연극예술에서 기대하는 그런 효과들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연극작업이란 쇼비지니스나 오락이 아닌, 인간 영혼의, 인간 신경의 언어로, 과연 어떻게 무엇을 인생에서 체험할 수 있게 하는가 하는, 이는 현대인들의 걱정과 불안과 조급함에 연극이 도리어 맞서서 영적(靈的)인 에너지, 거대하고 웅장한 세계의 경험, 공연 현장이 비록 작은 공간이고 소극장의 초라하고 낡은 협소한 곳이라고 해도, 인간임을 자각하고 인간임을 일으켜 세우는, 그런 입장과 역할에 연극예술이, 연극이, 예술로의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는 많이 한다.

톰 : 내 생각과 비슷하다. 그래서 나 역시 센세이션을 의도하는 연극이라면 당연히 흥미가 사라진다. 반복하는 얘기이지만 '레퍼토리시스템'의 기계적인 반복 공연이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 독일에서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갖는 요소인데, 고전작품 작업에서 오늘날 세익스피어나 몰리에르 작품을 공연하자고 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청중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형식부터 먼저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텍스트에 충실한 작업이 아니라, 또 센세이션에 집착하지 않고, 어떤 새로운 형식의 시도를 찾는 연출가의 작품을 나는 항상 관심을 기울여 보게 된다. 이런 것은 레퍼토리시스템 연극들과는 다른 차이점이 있다.

좀 더 명확하게 음악분야로 예를 들어보자, 세계에는 아주 유명한 밴드의 노래들이 많이 있다, 비틀즈, 롤링스톤즈 등, 이 밴드가 유행하던 노래들을 다시 부르는 '커버 밴드(cover band)들도 많이 있다. 연출가나 배우들이 마치 이런 커버밴드라면 재미가 없다. 비틀즈 노래를 40번씩 똑같은 창법으로 부른다면 그 밴드에 무슨 흥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똑 같은 텍스트를 기본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새로운 창법(唱法)을 보여준다면, 이건 새로운 멜로디를 작곡한 것 이상의 흥미진진한 현상이다.

김상수 : 나는 연극이 산업은 아니고 가내수공업적인 예술로써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레퍼토리시스템'도 어쩌면 산업적인 발상으로 시작된 것이고... 나는 연극 공연이 반드시 준비된 책, 준비된 배우, 준비된 스텝, 준비된 극장... 이런 것들 위주로 동원하는 게 과연 연극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연극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눈 뜨는 게 아니고, 그저 삶을 모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또 어떤 입장에서 본다면, 연극은 돈벌이에 치이고, 엔터테인먼트에 치이고, 이런 입장에서 볼 때 구체적으로 당신은 오늘 연극예술의 가능성을 무엇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가?

톰 : 나는 생생한 경험,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는 과정에서 겪는 경험이야말로 연극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영화와 여러 미디어와 인터넷이 생겼지만, 현재 독일에서는 연극관객 수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관객 연령이 어느 정도 고령화 된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사회의 자본주의 심화, 경제문제의 획일화 등이 사회를 부조리하게 만들고 있듯이 반대급부로 사람들이 그런 영향이나 환경에서 벗어나 다른 지향과 목표를 찾는 노력들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나는 본다. 극장, 박물관 혹은 콘서트 장, 교회, 축구장까지, 이런 장소들에서 사람들의 연극적 경험은 확장될 수도 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상수 : 연극은 인간의 존중과 인간의 위엄과 인간의 예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극 작가나 연출가란 나름대로 세상에 부지런하고 자신에 엄격하며 정직한 언어로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나 연극을 할 수도 없다. 숙명적으로 가난과도 마주해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극을 한다는 사실은 삶의 안일한 도피처일수도 없고 무기력하게 연극 만들기의 되풀이가 일상사 일수도 없다. 시대정신이랄까,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정신 같은 것들을 구현하는, 그래서 극장이라는 공간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끊임없이 인생을 배워나가는 장(場)이기에 나는 사회적학교이고 또 연극은 혼신의 치열함이나 진지함으로 정신의 사원일 수 있다고 나는 되풀이 말하는 것이다. 나는 2003년 일본 도쿄에서 공연한 섬(島. isle)이후 극작이나 연출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내가 쓴 텍스트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배우들과 작업을 시도하고자 한다.

톰 : 나는 이즈음 들어서 우리나라 독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이 안에서 어떤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가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연극은 언어를 기본으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요즘 나는 일부러 독일영화를 많이 보고, 독일 문학, 독일 예술작가들과 많은 작업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국제적인 일을 해 왔고, 그 동안 나는 많은 여행을 다녔다.

예전에는 직업적으로 또 개인적으로도 다른 문화권과의 작업을 즐겨했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아프카니스탄에 관심이 많았고, 거기에서도 연극페스티벌까지 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 독일과 내 언어인 독일어로 무엇이 지금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지켜보고 싶다. 그렇다고 내가 국수주의자라고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지금 현재 나는 다만 이 독일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독일에서 작업하는 게 너무 좋다. 그것도 여기 베를린에서. 물론 이런 내 관심이나 상황이 몇 년 뒤에는 어떻게 바뀌어 질지 나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김상수 : 자국에 대한 관심과 자국의 언어에 대한 열중을 국수주의자로 보지는 말아 달라고 강조했는데, 거기에 관해 좀 더 얘기를 해 줄 수 있나?

톰 : 그 얘기를 하기위해서는 먼저 내 얘기를 해야만 할 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배우이자 연출가, 또 극장장이었다. 내 어머니는 무용수였고. 나는 13살 때부터 무대 위에 섰다. 내 모든 인생이 연극 안에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항상 국제적인 연출가와 배우들과 같이 작업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대체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지켜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김상수 :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가?

톰 : 독일어권 연극페스티벌 책임자인 내 직업과도 직접 관련이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독일 연극의 발전을 위해서 뭔가 일을 제대로 하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내 인생의 근거에 대한 확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앞서 말한 의미는 이런 뜻이었다. 그러나 5년 뒤에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또 내 상황은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프카니스탄 어딘가에서 마주칠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내가 전혀 외국예술가들과 작업을 안 하겠다는 건 아니다. 현재도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있다.

김상수 : 통일 이후 20년간 독일은 많은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연극계에선 어떤 변화가 있었나?

톰 : 내 생각에는 베를린에서는 옛 동독과 서독의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한다고 본다. 하지만 베를린을 벗어나서 구동독 쪽으로 가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차이는 엄청나다. 삶에 대한 지향이라든가, 가치관등, 시각은 아직도 동 서독간에 큰 차이가 있다. 언어가 가까워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서독사람들과 동독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다르다고 본다. 정치인들은 서독과 동독이 벌써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곤 하는데, 구동독의 조그만 지방을 한번 가볼 것을 권하고 싶다. 거기는 완전히 다른 삶이 있다.

김상수 : 경제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인가?

톰 : 경제적인 차이는 당연한 것이고 일생생활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시간이 되면 구동독지역을 한번 돌아보라고 정말 권하고 싶다. 드레스덴이나 라이프찌히 같은 유명한 도시 말고, 게라(Gera), 알텐부르크(Altenburg) 같은, 정말 작은 도시들을 말한다. 일상생활이 다르고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다르다.

김상수 : 연출가 프랭크 카스토르프(Frank Castorf)를 만나 얘기했을 때, 그가 말하기를 통독 이후 많은 동독인들이 지니고 있던 정체성이 많이 사라졌고 상실감을 얘기했는데...

톰 : 옛 동독사람들이 느끼는 상실감에 대해서는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서독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내 여자 친구가 동독출신인데 내가 항상 느끼는 점이 있다. 어떤 특정한 요소들은 서독출신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다. 그런 것들은 정말 그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극작가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가 통독이후에 얘기한 유명한 말이 있다. '제기랄, 더 많은 독일인이 생겼군!'

김상수 : 연극과 정치는 현실에서 어떻게 상관한다고 생각하는가?

톰 : 독일에서는 연극과 정치를 접목시키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나는 본다. 폴커 로쉬(Volker Lösch)의 작업을 예로 들어보겠다. 그 사람의 작품에는 실제로 실업자가 합창단으로 무대에 선다. 그것이 실업자 현실에 대한 하나의 직접적이고 저항적인 액션이라 취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의 정치적인 액션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다. 하지만 정치적인 의견을 바탕으로 컨셉과 텍스트에 반영하여 작품에 스며들게 하여 작품 안에서 정치적인 견해를 발견하게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러나 거리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무대에 세우고는 이것이 특별히 정치적인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김상수 : 나는 베를린에 와서 연극 두 편을 보았다. 두 편 다 민중극장에서 공연된 것이었는데, 독일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대사가 많았고, 각기 다른 연출가가 연출 한 작품들인데, 스타일이 아주 비슷했다. 관객들은 공연 내내 끊임없이 웃고. 웃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너무 한 흐름으로 만 가고 있는 건 아닌지, 그 극장의 스타일이 그런 건지, 지금 독일의 연극경향이 어떤지 알고 싶다.

톰 : 어떤 작품들을 보았는지?

김상수 : 고트쉐프(Gottscheff)의 '우부왕' 그리고 르네 폴리쉬(René Pollesch)의 작품이었다.

톰 : 르네 폴리쉬(René Pollesch)와는 1987년에 작업을 같이 했다. 나하고는 15작품이나 같이 했다. 그 두 작품이 비슷한 성향을 띠었던 모양인데, 각양각색의 베를린의 연극을 알고 싶다면 피터 슈타인이 연출한 공연을 권하고 싶다. 그가 베를리너 앙상블에서 클라이스트(Kleist)의 '부서진 항아리'를 연출했다. 200년 전의 작품을 고스란히 그대로 전달한 느낌이 들것이다. 또 그것에 반대되는 경향의 작품을 보고 싶다면 프렌쯔라우어 베르크(Prenzlauer Berg)에서 활동하는 인형극단 헬미(Helmi)를 보기를 권하고 싶다. 헬미는 고전작품을 트래쉬(trash)하게 보여준다. 또 샤샤발츠(Sasha Waltz)의 작품은 고도의 미학적인, 하나의 완결된 예술조각 같은 느낌이 들 어있다. 이렇듯이 베를린은 한 도시 안에 마치 남극과 북극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은, 아주 상이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김상수 : 어떤 연극들을 자주 보는가? 즐겨 찾는 극장이 있나?

톰 : 베를린에서 말인가? 나는 시립, 국립극장에 대해선 항상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민중극장(Volksbühne)에서 하는 공연이 제일 관심이 간다. 고르키 극장(Gorki Theater)에서도 좋은 작업들이 있다. 도이치 극장(Das Deutsche Theater)은 올 시즌 새로운 극장장이 취임했다. 많은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무엇보다도 미래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극장들을 자주 찾는다. 시, 국립극장 이외에도 오프씨어터(Off-Theater)가 있고 소피엔젤레(Sophiensaele)와 헤벨테아터(Hebbeltheater), 짧게 표현해서 하우(Hau)라고 하는 데가 있다. 발하우스 오스트(Ballhaus Ost) 극장에도 당연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혹시 올 11월 말에 독일에 계속 머무는가? 베를린을 벗어나면 '임풀즈(Impulse)'라는 연극축제가 있는데, 마티아스 폰 하르츠(Matthias von Hartz)와 내가 쾰른, 뒤셀도르프에서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2년마다 모든 오프 씨어터에서 선보인 작품 중에서 우수한 작품들을 선정해서 초대하는데, 올 해 그 축제가 다시 열린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독일어권의 연극작품들을 초대하고 있다.

김상수 : 독일어권 연극을 묶어서 공연하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

톰 :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도시들에서 작품을 제작하곤 했다. 나는 언젠가는 이 독일어권 연극들을 한 자리에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고, 그래서 페스티발을 만들었고, 그 페스티벌 총책임자이면서 또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2년 동안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가장 좋은 작품들을 선별한 것인데, 당신이 그 기간 중에 독일에 있다면 이번 페스티벌에 초대를 하고 싶다. 작품들이 그렇게 실망스럽진 않을 것이다. 기간은 11월 25일부터 12월 6일까지다. 장소는 쾰른, 뒤셀도르프, 보훔, 뮐하임/루어등 이다.(필자 주-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기간 중에는 일정상 그가 추천하는 연극들을 볼 수가 없었다)

김상수 : 초대 고맙다. 당신이 주관하는 교육아카데미인 '연극아카데미'에 관해서 좀 더 설명해주기 바란다.

톰 : 이 '아카데미'는 일종의 대학원 같은 곳이다. 이미 학위를 마친 사람들을 위한 학교인데, 1년에 6명에서 10명 정도를 입학시킨다. 학생들은 새로운 '연극 극형식'을 찾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우리는 연출가, 영상예술가, 연극 이론가들을 초대해서 워크샵을 연다. 같이 공연탐방도 하고, 가르치는 사람들과 학생들이 함께 두개의 작품을 제작한다. 이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공개된다. '연극아카데미' 건물은 브란덴부르크 주에 있는데, 베를린 서쪽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그곳에서 한 작품을 하고, 또 한 작품은 베를린이나 함부르크에서 공연한다.

김상수 : 당신의 '연극아카데미'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교육내용은 무엇인가?

톰 : 우리가 뽑는 학생들은 배우나 연출 지망생뿐만이 아니라, 모든 연극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을 선별한다. 그리고 우리는 연극에서의 직업분류 범위를 벗어나 앙상블 팀으로써 일할 수 있는 형식을 추구한다. 극장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입장과 역할에서 서로 만나고 대화를 해야만 한다. 배우는 배우로써, 의상디자이너는 의상디자이너로써 서로에게 각인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우리의 '연극아카데미'가 추구하는 것이다.

김상수 : 당신의 작업에서 신념이나 철학은 무엇인가?

톰 : 근본적으로 얘기하자면, 지금까지 나는 30년 동안 아주 실용적으로 사실적으로 일을 해왔다. 당연히 연극작업에 관해 어떤 좌우명을 가지려고 노력을 했지만 나는 나름의 철학적인 정신이나 이론은 세우지 못한 것 같다.

김상수 : 장기적으로 세우고 있는 계획이 있는가?

톰 : 나는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장기적으로 추구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이 교육아카데미인 '연극아카데미'만큼은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아닌가 생각한다.

김상수 : 일이 즐거운가?

톰 : 매일매일 새롭고 즐겁다.

김상수 : 요즘은 무엇을 많이 생각하는가?

톰 : 작년부터 죽음에 관해 생각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김상수 : 죽음을?

톰 : 죽음 이후에는 어떤 세상일까, 그런 생각말이다.

김상수 : 앞으로 계속해서 얼마나 더 일을 하고 싶은가?

톰 : 지금부터 40년간은 더 일하고 싶다.

톰 슈트롬베르크 Tom Stromberg


1960년 빌헬름스하펜 출생.

1980년 쾰른대학교에서 연극학과 독문학 전공, 재학당시 WDR 라디오 방송국에서 PD로 일함.

1982/83년 프랑크푸르트 투름극장(Theater am Turm (TAT) in Frankfurt)에서 드라마투르기 어시스턴트로 재직.

1983/84, 1984/85년부터 담슈타트 시립극장에서 드라마투르거와 조연출자로 재직.

▲ 독일 연극 프로듀서 Tom Strombergⓒ김상수

1986년부터 드라마투르기 총책임자로 승격, 추후 극장장으로 재직.

1990년에 페스티벌 '엑스페리멘타 6(Experimenta 6)' 기획 총 책임자

1995 - 1999 라이프찌히 공연 페스티벌 '유럽-씬 라이프찌히(euro-scene Leipzig)' 예술자문위원으로 활동

1996 - 1998년 세계적인 안무가인 윌리엄 포어스테(William Forsythe)의 예술자문 활동

1996년 하노버 엑스포 예술 총기획책임자로 발탁, 엑스포 문화행사의 하나인 공연 축제 '테아터포름(Theaterformen)' 자문위원 대표, 탄츠테아터 인터네셔널 축제(TANZtheater INTERNATIONAL) 부 예술감독으로 활동.

1997년 그가 연출한 라디오 청취극 'Will it be a likeness' 올해의 라디오청취극 수상.

카셀 도큐멘타 엑스(Documenta X) 미술전에서 공연부문의 큐레이터로 7년간 재직

2000년 엑스포에서 피터 슈타인 연출 파우스트1, 파우스트2 공연 제작

▲ 2000하노버 엑스포 오프닝 공연 Faust 포스터

이후, 7년간 함부르크 국립극장(Deutschen Schauspielhauses in Hamburg) 극장장 재직, 재직기간 함부르크 국립극장이 2004/5년 올해의 극장으로 수상.

2005년부터 '십이야 프로덕션 회사(wasihrwollt PRODUCTIONS GmbH)' 를 페터차덱, 안티에 랑스호프엘러만과 설립, 2006년부터 브란덴부르크 w.i.w.아카메미 운영.

2006년 마티아스 폰 하르츠(Matthias von Hartz)와 함께 오프 씨어터 페스티벌 '임풀스 Impulse' 진행.

베를린에서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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