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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정과 최지우의 싸움, 볼 만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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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정과 최지우의 싸움, 볼 만한가요?

[모 피디의 그게 모!]<5>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

다섯 모-연기의 속살

'사람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말을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는지 기억하는가? 아마 감정적 폭주 상태였던 사춘기 시절, 앞뒤 없이 반항하던 때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그 말을 가장 최근에 했는지 기억하는가? 제법 예절 바른 모습을 보이다 다음 순간 돌변하여 부모에게 떼를 쓰는 일고여덟 살 꼬마를 봤을 때였던 것 같다. 즉 우리가 '사람 된다'고 표현할 때는, 상황과 관계에 맞추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잘 통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는 뜻을 지닌다. '사람다워 진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자기라는 탈을 쓰고 스스로를 잘 연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되는 데에 이골이 난 사람들은 결국 배우일 것이다. 자신의 말(대사)과 행동(연기)를 잘 통제하여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만큼 그 방면의 전문가들이 어디 있겠는가. 이재용 감독은 <여배우들>에서 여섯 명의 사람 되기, 여자 되기의 전문가들을 데리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사람이 되세요, 단 시나리오 상의 인물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셔야 합니다. 자신의 얼굴, 자신의 행동, 자신의 말, 그리고 자신이 지닌 사회적 맥락을 포함한 자기 자신이!

▲ 영화 <여배우들>. 영화의 연출 포인트는 고전적인 연기 실습 수업과도 흡사하다. ⓒ프레시안

영화의 연출 포인트는 고전적인 연기 실습수업과도 흡사하다. 현재의 상황, 대화의 간략한 주제, 대체적인 갈등 구도만 주고 배우 간의 즉흥극을 유도하는 것이다. 꽉 짜인 시나리오가 없으니 배우들은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예민하게 개방하여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화에서 묻어나오는 배우들의 말과 행동은 거의가 스스로의 것일 뿐 아니라, 꽤나 진실해 보인다. 관객이 여기서 느끼는 재미와 혼란은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부터가 '리얼'인가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여기서 '리얼'이라고 느끼는 부분이야말로 진짜 연기의 속살이다.

관객이 일반적인 영화나 드라마에서 익숙한 연기는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다. 배우가 철저히 극 중 인물과 심리적으로 하나가 되어 매 순간을 그 인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연인과 이별한 듯, 진짜 자기 자식을 잃은 듯 오열하는 배우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우리는 '내면 연기'가 훌륭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여기엔 상당한 오해가 있다. 도대체 '내면 연기'란 무엇인가. 관객은 배우가 취한 포즈, 안면 근육의 움직임, 안구의 습도 등을 보면서 극의 앞뒤 맥락을 생각하며 인물의 감정을 상상하는 것이지, 배우가 마음 속에 갖고 있는 감정 상태를 그대로 보고 느껴주는 것이 아니다. 배우가 극중 인물과 심리적으로 동화하는 것은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순 있어도 최종 표현 지점과는 별개의 것이란 이야기다.

그런데 <여배우들>에서는 아예 출발지점을 원천봉쇄해버린다. 동일시할 극중 인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배우들은 주어진 상황이라면 자기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까를 연구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대사들은 '입말'다워 지고, 행동은 '리얼'다워 진다. 극의 주 갈등 축인 고현정과 최지우의 화장실 싸움 씬을 보자.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고현정의 싸움 방식과 수세적이고 주저하지만 지기는 싫은 최지우의 싸움 방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실제로 배우들이 감정을 다쳐가며 싸우진 않았겠지만, 정말 이 둘이라면 이런 방식대로 싸웠으리라 믿게 한다. 이것은 극중 인물이라면 어떻게 싸웠을까를 고민하지 않고, 서로 상대방이 내뱉는 말과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내가 지지 않을까'를 고민하기 때문에 나오는 연기의 질감이다.

▲ 메소드 연기의 산실 뉴욕의 '액터스 스튜디오'의 폴 뉴먼. 지난해 9월 타계한 그는 몽고메리 클리프트, 말론 블랜드와 함께 '1세대 메소드 연기 스타'로 꼽힌다.

제작비의 규모가 커지면서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기 위해 정교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도면을 보며 건물을 짓듯 계획적으로 촬영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모범적인 제작 형태이다. 그러나 정교한 시나리오가 놓치기 쉬운 부분은 배우의 생동감이다. 재즈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즉흥 재즈 합주는 꽉 짜인 멜로디와 기승전결을 갖고 있진 않지만, 연주자 간에 주고 받는 호흡과 리듬감, 생동감을 그 매력으로 한다. 꽉 짜인 시나리오를 훌륭한 메소드 연기로 해내는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오케스트라 연주라고 하면, 설정과 상황만 주고 배우들이 자유롭게 반응하도록 두는 <여배우들>의 매력은 재즈 클럽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같다. 평이한 숏이어도 배우들이 서로 어떻게 반응할지 계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늘 긴장감이 유지되고 다음 컷이 기대된다. 계산하지 않는 데서 나오는 에너지다.

연기에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니 촬영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는 카메라도 배우처럼 반응한다.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고 누가 이야기할지 계획되지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이나 상황에 맞춰 초긴장 상태에서 흔들린다. 카메라의 심리 상태는 그대로 관객의 심리 상태가 되어, 별 것 아닌 수다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칼날에도 화들짝 놀라며 다음 대화를 기대 속에 기다리게 된다. 핸드핼드는 극 영화에서 다큐멘터리적 사실감을 주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흔들릴 이유가 없는데 억지로 흔드는 것이 티 나는 작품이 많아져 진부해졌다. 하지만 <여배우들>에서의 카메라는 정말 흔들릴 수밖에 없어서 흔들리고, 카메라 감독 손 끝의 긴장감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배우만 잼 세션(jam session, 재즈 연주자들이 악보없이 하는 즉흥적인 연주 혹은 그런 모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영화가 성취한 형식적 매력은 예능 버라이어티 촬영 형식과 흡사하다. 5대 이상의 카메라로 많은 각도, 많은 사람의 표정을 동시에 찍는 것이다. 일반적인 극 영화에서 개별 반응 숏을 따로 찍는다면, 이 영화에서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실시간으로 찍어낸다. 배우들은 반응을 계산하여 따로 보여줄 필요가 없다. 이처럼 '액션과 리액션' 간에 시간적 지연이 사라짐으로써 연기의 '리얼'함이 성취된다. 예능, 다큐멘터리, 영화, 드라마… <여배우들>은 장르의 꼬리를 물고 자유롭게 춤을 춘다.

<여배우들>은 말 그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 경기를 관전하고 있는 듯한 감흥을 주기도 한다. 다만 보는 사람이 운동 선수의 단련된 신체가 아니라, '피사체'로서 단련된 신체와 언어를 본다는 점이 다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상대적으로 밋밋하고 둔한 반응 대신 작은 자극 하나에도 파르르 일어나는 여배우다운 민감한 반응을 통해 영화를 다채롭게 이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배우들이 사회적으로 지녀온 맥락이다. TV와 스크린을 통해 대중의 연인이 된 여배우들은 성공과 좌절, 이혼이나 스캔들, 시기와 질투, 외로움과 두려움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한다. 동세대 배우들과는 한 발짝 떨어져 나온 듯한 까칠하고 세련된 윤여정, 거침 없는 여성미와 자의식을 뿜어내는 이미숙, 생의 한 가운데에서 좌충우돌하는 것 같은 고현정, 조심스럽게 자신의 한계를 깨려 애쓰는 듯한 최지우,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떠다니는 김민희,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눈이 빛나는 김옥빈… 그들은 하나의 군중을 이루며 욕망의 시선을 감내하며 영광과 오욕의 시간을 오가야 하는 사람들의 고충을 토로한다. 늘 피사체로, 혹은 상품처럼 언급되던 배우들은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사람'이 되어 관객과 스타 사이의 벽을 허물고 공감을 이끌어 낸다.

배우의 '배'자는 사람 '인' 변에 아닐 '비' 자를 쓴다. 파자를 통해 혹자는 배우의 정체성을 두고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는 사람이 아닌 자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혹은 스스로가 원하는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한 길 위에 선 존재들이 아니던가. 늘 다른 사람만 되어 보던 톱스타 여배우들이 자기 자신이 되어 보이며 스스로의 한계를 조금씩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준 이 영화는 그래서 흥미롭다. '사람이 아닌' 그들이 '사람이 된' 영화를 보며, 우리 자신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 지를 새로운 형식과 더불어 즐기며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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