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말은 'NSS요원'들이 할 이야기가 아니라, 그 요원들을 드라마에 잘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스태프들이 할 말이다. 배우들이 떠먹을 수 있도록 밥상 차려주는 사람들. 조조가 유비에게 관운장이나 조자룡이 있음을 질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드라마 감독들은 좋은 스태프와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신이 유비나 조조쯤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현장이 관우 장비 조자룡과 함께라면 전쟁의 승리(높은 시청률)는 보장 못해도 전투(매 씬을 찍어내는 일)의 수월함과 유려함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스태프의 능력이 결과적으로 감독의 능력이 된 듯한 우쭐함도 더해진다.
뮤지컬 영화 <나인>의 예고편에서 감독은 가장 과대평가된 직업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이 하는 일이란 각 분야의 전문가인 스태프들이 준비해온 일에 '예스 혹은 노'를 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본이 나오고 나면, 드라마 감독은 대본에서 명시된 것을 연기자와 스태프들이 준비해 오는 대로 종합하여 진행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미리 구체적으로 같이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가 대부분이니 그만큼 감독은 스태프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한국 드라마 장르에서 예술적 성취에 대한 찬사는 주로 작가에게 주어지게 마련이고, 그걸 짧은 시간 안에 현실화 시켜내는 방송 스태프들은 그만큼 자존심이 높다.
드라마 스태프들이 영화나 연극 스태프들과 차별적인 지점은 '알아서' 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과 좀더 '방어적'이라는 점이다. 대본에 주인공이 어제 다쳤다고만 되어있을 때, 붕대가 필요한지, 핏자국이 필요한지, 아니면 상처분장이 필요한지, 부상의 경중은 어느 정도로 예상해야 하는지를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연출과의 논의와 협의만 기다리다가는 준비할 수 있는 최소 시간을 놓쳐버릴 수 있다. 미리 계산해 놓은 대로 '예스 혹은 노' 싸인을 받은 후, 재빠르게 현장에 공수해야 한다. '방어적'인 지점은 이런 것이다. 몸에 감긴 붕대는 의상인가 소품인가. 주인공이 신고 있는 슬리퍼는 의상인가 소품인가. 즉 현장에서 준비되어야 하는 것들이 어떤 스태프의 책임인가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사전에 누구의 책임인지를 똑 부러지게 정리할 만한 여유가 없을 때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촬영 현장에 닥치고 보니 무언가 '펑크'가 나는 경우,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지는 무언의 눈빛이 비수처럼 오간다. 물론, 눈빛 이전에 고성이 오가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사실 이런 지점 때문에 연극이나 영화 출신 배우들이 드라마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캐릭터와 인물, 의상, 분장, 소품 등에 있어 차분하게 소개받고 감독과 소통하여 연기를 준비할 여유 없이, 준비되어 있는 대로 자기 몫의 연기를 재빨리 해치워줘야 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알아서' 요구되는 수준의 연기를 하고, 무슨 일이 안 풀렸을 때 '누구의 책임'인지를 빠르게 파악하여 안도하는 방어적인 자세가 배어 있지 않으면 현장에 주눅 들기 십상이다. 항상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적은 분업 현장이 드라마 스태프의 세계라 할 수 있다.
▲ KBS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 현장. 드라마 스태프들이 영화나 연극 스태프들과 차별적인 지점은 '알아서' 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과 좀더 '방어적'이라는 점이다. ⓒKBS |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 현장은 순간순간의 성취감이 높다. 방송일이라는 절체절명의 목표를 향해 한 씬 한 씬 힘을 합쳐 척척 찍어가는 기분은 현장 스태프들의 사기를 높인다. 반면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 현장은 외롭고 허탈한 곳이다. 모두 같이 있지만 엄격한 분업 시스템 아래에서 자기 일만 챙기기도 바쁘다. 며칠 밤을 지새며 같이 있어도, 의외로 소통의 깊이는 얕고 소통의 시간은 짧다. 드라마 스태프들은 방송 결과물에 그리 집착하지 않는 편이다. 방송 시간 중에도 계속 다음 촬영을 진행해야 하는 스케줄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통과 협력의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하는 기쁨보다는, 그 순간 현장에서 필요한 것을 해냈다는 성취감에 일의 초점이 더 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허탈함과 외로움이야 말로 드라마 스태프들이 지닌 멋과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어차피 깊게 논의하여 진행할만한 시간적 여유 없이 알아서 해야 한다면, 스태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그 일에 대한 기준이 준거점이 된다. 여기서부터는 자기 성취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세련된 세트를 짓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디테일한 소품을 배치하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은근한 조명을 설치하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우아한 촬영을 고민하고…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순간 오히려 구차하고 피곤하다. 그들은 묵묵히 자신의 기준에 따라 일을 한다.
이런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주고 소통해야 하는 사람들은 주로 감독 이하 연출부다. 과장된 말투로 서로를 칭찬하며 웃을 때도 있지만, 주로 묵묵히 일하고 묵묵히 알아주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 스태프들은 그렇게 긴 시간을 붙어 있어도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속속들이는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믿을 뿐이다. 서로의 자존심과 책임감을. 드라마 제작 현실이 그런 가치를 시스템으로 보장해주지는 못 한다. 고용과 처우 문제는 항상 열악하다. 하지만 자존심과 책임감은 사람을 멋있게 만든다. 그래서 하릴 없이 밤을 지새고 시간을 죽여야 할 때가 많은 드라마 촬영 현장은, 보기에는 구질구질해도 꽤 멋있는 곳이다. 외로운 촬영 전문가들이 따로 또 같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서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굳이 소리 높여 말하지 않아도,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눈을 빛내며 자신의 분야에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몰입을 하는 스태프들을 볼 때, 그 아름다움이야 말로 이 현장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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