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 짓기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이 요즘 즐겨 쓰는 소재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의 '우애(友愛)'다. 총리 취임 2개월여 만에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하토야마지만 그의 정치 슬로건은 여전히 일본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다.
오자와 사키히토(小澤銳仁) 환경상은 지난 2일 우애의 뜻을 10초 내로 설명해 보라는 야당 의원의 추궁에 "자유, 평등, 박애에 나오는 박애 정신"이라고 답했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외상은 "아시아 속에서의 가교, 혹은 아시아와 서구, 혹은 아시아와 미국 사이의 가교"라고 말했고,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 금융·우정개혁 담당상은 "배려"라고 했다.
▲ 지난 9월 한류스타 이서진을 만난 하토야마 총리 부부. 외교를 중시하는 것은 우애정치의 근간이다. ⓒ뉴시스 |
이처럼 각기 다른 버전으로 설명되는 우애사상의 뿌리와 그를 토대로 한 하토야마 내각의 정책 방향을 조망할 수 있는 학술회의가 현대일본학회와 서울대 일본연구소의 공동 주최로 27일 서울대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특히 일본 지성계에서 우애사상에 대해 가장 정통하다고 알려진 도자와 히데노리(戶澤英典) 도호쿠(東北)대학 교수가 '하토야마 유키오의 정치철학과 일본의 개혁'이란 주제로 발표를 하면서 우애정치를 심층 분석해 주목을 끌었다.
유럽 통합 철학서 유래한 정치사상
도자와 교수에 따르면, 우애정치는 하토야마 가문의 일종의 가업이다. 자민당 일당지배 체제를 일컫는 '55년 체제'를 구축한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전 총리에 의해 현실 정치에 적용됐고, 그의 손자인 하토야마 현 총리에 의해 다시 주창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이치로가 우애사상을 접한 것은 유럽연합(EU) 형성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쿠덴호프 칼레르기(Coudenhove-Kalergi) 백작으로부터다. 쿠덴호프는 1923년 저서 <범유럽>에서 세계를 범유럽, 범아메리카, 소비에트 러시아, 대영세계제국, 범아시아의 5개 블록으로 구분해 통합한다는 구상을 밝히며 '우애'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의 책을 번역하며 감명을 받은 하토야마 이치로는 '우애'를 일본 정치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보수층 청년들을 모아 '우애청년동지회'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 아타나베 고조(渡部恒三) 현 중의원 부의장 등을 배출하며 사회적 지위를 구축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토야마 이치로의 손자는 '우애'를 내걸며 54년 자민당 시대를 마감하는 역설을 연출했다.
도자와 교수는 "쿠덴호프의 사상은 지정학과 문명론에 의거한 것으로 국내정치는 2차적인 의미"라며 "하토야마 정권에 관해서도 외교를 우선 살펴보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하토야마 총리가 동아시아공동체와 동북아비핵지대화를 말하고 외교 문제에 유난히 신경 쓰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미국엔 '애증' 러시아엔 '호감'…한반도에는?
하토야마는 시사일간지 <VOICE> 9월호에 게재한 '나의 정치철학'이란 글에서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밝혔다. 도자와 교수는 이 구상이야말로 쿠덴호프 백작의 영향이 뚜렷이 보이는 것이라며 "하토야마 유키오의 미국에 대한 태도에는 애증이 뒤섞여 있다"고 설명했다.
하토야마는 이 글에서 미국의 시장원리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대등한 미일관계'를 강조했다. 도자와 교수는 "이러한 외교 방침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미국식 세계화에 대한 비판이며,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은 미국을 아시아 지역에서 밀어낼지 모른다는 두 가지로 모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재팬 패싱(Japan Passing)'이 재현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도자와 교수는 지적했다. 재팬 패싱은 1990년대 클린턴 미 행정부가 일본을 제쳐두고 중국을 더 중시했던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중국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고, 민주당이 집권한 일본과는 마찰을 빚는 지금의 상황에서 나올법한 얘기다.
반면 하토야마가 러시아 외교에는 무게를 실을 것이라고 도자와 교수는 전망했다. 할아버지 하토야마 이치로가 총리 시절 소련과 국교를 회복했던 일을 '금자탑'으로 여기고 있고, 현재 장남 일가가 모두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등 러시아를 보는 눈이 남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자와 교수는 "따라서 (러시아와 영유권 다툼을 하고 있는) 북방영토 문제의 해결이 우애 외교의 가장 주요한 과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도자와 교수는 "한반도 정책에 대한 하토야마 정권의 입장은 분명하지 않다"며 "자민당·공명당 연립 정권 시대의 정책에서 크게 변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주간아사히>가 보도한 하토야마 총리의 12월 방북설에 대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대북 관계 개선 같은 외교적 목표를 달성키 위한 움직임은 아닐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2002년) 전격 방북해 지지율을 회복했던 것과 같은 효과를 노린" 선거 전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도자와 교수는 "내년은 한일병합 100주년이기 때문에 선거 전략이 아니라 우애외교의 일환으로 한반도 외교의 기본 자세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본격적인 움직임은 7월 참의원 선거 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거의 모든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열도개조론' 이후 최초의 미래 비전"
외교뿐만이 아니다. 도자와 교수는 우정사업 재고, 외국인 지방참정권 문제,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포함한 미일 안보체제의 재편 등 하토야마 앞에 놓인 거의 모든 내외적 과제는 참의원 선거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다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연립정권 해소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국민신당과 사회민주당이 내정·외교상에 이견을 보이는 연립 파트너로 있으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에 우애정치를 본격적으로 전개할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하토야마가 현재 정치자금 문제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자금법을 위반했거나 탈세를 했다는 의혹에 어설픈 해명까지 겹치면서 그는 점차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는 미국과의 묘한 갈등이나 디플레이션 상황과 더불어 하토야마를 궁지로 몰아 넣고 있는데, 12월이나 내년 3월에 사임할 것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다고 도자와 교수는 전했다.
그는 이에 대해 "선거제도 개혁을 달성한 뒤 행·재정 개혁과 국민복지세 구상으로 좌초하고 미일관계의 동요에 따른 압력에 노출되어, 결국에는 사가와큐빙(佐川急便) 의혹이라는 정치자금 문제로 퇴진에 이른 호소카와 내각의 복제판이 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자와 교수는 "하토야마 총리는 '열도개조론'을 주창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 이래 본격적인 미래 비전을 세상에 내놓은 정치가"라며 "하토야마가 우애정치라는 중요한 시도를 지속적으로 추진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지지율 낮아져도 공약 밀어붙일 것"
한편, 일본 도카이(東海)대의 김경주 교수는 '민주당의 개혁정책과 일본 여론의 평가'라는 주제 발표에서 하토야마 내각이 최근 지지율 하락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공약을 밀어붙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인 최초로 일본 뉴스 프로그램(<아사히 뉴스타> '뉴스의 심층')의 진행자가 되어 이름을 날리고 김경주 교수는 이 같은 전망을 하는 근거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그는 우선 "민주당은 고이즈미 정권 이래 '일본형 포퓰리즘 정치'가 만연함으로써 국민의 신뢰가 조직(정당)의 수준에서 개인의 수준으로 하향 이동시킨 것을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어 "(지난 8월 중의원) 선거 승리가 민주당의 승리가 아닌 자민당의 패배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민주당은 선거 당시의 공약 실행 이외의 유연한 현장 대응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며 "따라서 우선은 공약에서의 구상을 실행에 옮김으로서 여론의 신뢰와 지지를 획득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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