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로 취급되는 정상간 대화가 언론에 흘러간 것에는 모종의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NHK>는 지난 8일 밤 방송된 'NHK 스페셜'에서 일본 외무성이 극비 문서로 보관하고 있던 김 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의 2002년 9월 평양 정상회담 녹취록을 입수해 공개했다.
녹취록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고이즈미 총리에게 "북한의 생존권을 위해 핵을 포기할 수 없다"며 "(핵을 포기하면) 이라크처럼 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이는 고이즈미 총리가 "핵을 폐기하면 국제사회가 경제 지원을 해 줄 것"이라면서 이런 기회를 잘 활용하라고 당부한 데 대한 답변이었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은 "러시아와 중국도 (북한이) 핵을 갖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NHK>는 전했다.
당시 관방장관으로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방북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는 이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 위원장은 미국과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NHK>는 "현재 북핵 문제가 교착상태에 있는 만큼 7년 전 전격적인 북일 정상회담을 교훈 삼아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로 비밀문서를 공개했다"고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은 "이라크처럼 될까 두렵다"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국내 언론에 소개됐다.
그러나 <NHK> 보도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김 위원장이 아무 전제 없이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만 말한 것처럼 되어 있는 대목이란 지적이다. 이 발언만 보면 북한이 미국에 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체제 안전이 보장되어도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해석되는데, 김 위원장의 말이 거두절미됐다는 것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고이즈미 총리가 '핵 폐기시 경제지원'만 언급한 것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은 '경제지원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 보장이다. 미국의 적대시 정책으로 볼 때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기 전에 핵을 포기하면 이라크처럼 될까 두렵다.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존을 위해 핵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정 전 장관은 "'조선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김 위원장이 밑도 끝도 없이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걸 보면 발언의 앞부분이 잘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북한 사람들의 말에는 반드시 '조건절'이 들어가는데 그걸 빼 놓고 언론에 흘린 것은 이러나저러나 북한의 최종 목적은 핵보유국이라는 일본 보수층의 주장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세력의 소행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누가 이렇게 '재단된' 발언을 언론에 흘렸을까? 정 전 장관은 결국 새로 들어선 민주당 정부의 유화적인 대북정책을 견제하기 위한 구(舊) 집권 세력의 행위가 아니겠냐고 분석했다.
민주당 내각은 과거 자민당 정부의 대북정책을 당장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그러나 민주당은 내년 참의원 선거에서 과반을 확보해 정권의 안정을 이룬다면 자민당 내각의 '선(先) 납치 문제 해결 후(後) 국교정상화 교섭 시작' 정책을 버리고 두 문제를 동시 병행할 것이라는 것도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전망이다.
따라서 이에 불만을 품은 자민당 세력이 민주당의 구상에 제동을 걸기 위해 김 위원장의 발언을 거두절미한 뒤에 언론에 유출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인 아베 전 총리가 방송에 출연해 설명을 곁들이는 모습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다나카 히토시 전 일본 외무성 심의관 ⓒ프레시안 최형락 |
이와 관련해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전 일본 외무성 심의관은 지난 9일 고려대 일본연구센터가 주최한 특강에서 <NHK>의 보도 내용을 언급하며 "굉장히 비밀스런 문서인데 어떻게 그걸 확보했는지 나도 놀랍다"고 말했다. 다나카 전 심의관은 2002년 북일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던 막후 주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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