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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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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는...

[김상수 칼럼]<68>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시국선언문을 읽고

이명박 집단은 바로 요 얼마 전까지도 믿을 수없는 여론조사를 들이대고 민심을 혼돈스럽게 몰아갔다. 그러나 바로 며칠 전, 보궐 선거 결과가 말해줬다. 이명박 지지율 50%란 철저하게 위장이고 허수(虛數)라고.

이명박 집단은 금방 드러날 거짓말도 마구 꾸며댄다. 한 국가의 정권이라고 하기에는 졸렬(拙劣)하기가 그지없다. 이명박 집단의 저열(低劣)함은 이명박 스스로의 잦은 말 바꿈과 거짓행각, 국가 공기구와 사설기구를 동원한 거짓행각들에서 일일이 증명된다.

어제 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시국선언문을 읽고 혼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신부님들이 마냥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고 있음에, 신부님들이 가시밭길을 내딛고 있음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선언문은 대한민국을 사는 국민들을 향해 너무나 절실하고 절절한 외침이다.

"죽음을 부르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 불의가 검은 강물처럼 넘실거리고, 죄악의 독버섯은 활짝 꽃을 피웠다. 권력자들의 추악한 거짓과 노골적인 탐욕이 갈수록 당당하고 뻔뻔스러워지는데 허다한 생명들은 무참히 시들어간다. 지난주 두 건의 재판 결과는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 발전에 백해무익한 정치집단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해 주었다. 국민의 보편적 권리를 위해 마련된 갖가지 권능을 특정 자본권력과 극소수를 위해서 그릇되게 남용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국민에게는 가혹한 철퇴를 휘두르고 있으니 도저히 정부라고 볼 수 없고 차라리 강도 집단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바야흐로 신앙과 양심의 이름으로 국민 불복종을 선언할 결정적인 때가 닥친 것이다."

선언문은 가슴을 쥐어뜯는 호곡(號哭)소리 같다.

선언문은 나라가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 낭떠러지에 서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지금 한국의 국가기구와 권력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예각(銳角)으로 선명하게 말하고 있다. 특정 집단인 이명박 집단의 금ㆍ권력을 위해서만 작동하는 국가기구와 권력의 실체란 이제 국민들에게 각개전투의 삶으로, 각자들 알아서 삶을 살 것을 주문하면서 줄곧 파장(罷場)으로 내몰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을 괴롭히는 국가형벌권이라면 그 위임을 철회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라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선언은 그동안 인내와 인내를 거듭하고 거듭하다가 나온 일갈(一喝)이다.

어떻게? 무엇으로? 구속된 용산 철거시민 아홉 명에게 6년 등의 중형을 과연 선고할 수 있나?

그리고 선언문은 말했다.

"과연 누가 나서서 멸절 직전의 민주주의를 살려내고, 파괴일로를 걷고 있는 자연생태계와 아이들의 미래를 지킬 것인가? 오로지 국민 각자의 손에 달렸다. 권력의 주인이 바로 국민이라는 진리를 확고부동하게 만들지 못하면 무참히 얻어맞고 일터에서 쫓겨나 감옥에 갇히는 불쌍한 종살이는 나날이 극심해질 것이다."

선언문은 이제 국민들 스스로가 일어나야만 한다고, 이제 국민들 스스로가 분노를 행동으로 옮길 때라고 절절하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새삼 나는, 이명박이 지난 2일 제33대 조계종 총무원장에 선출된 자승 스님에게 축하의 뜻을 담은 난을 전달했다는 신문기사가 생각난다. " 박형준 정무수석을 서울 종로구 조계사로 보내 축하 난과 함께 "앞으로도 청와대와 불교계가 대화와 협의를 통해 원만한 관계를 쌓아 나가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김은혜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앞서 지난달 30일에는 퇴임한 지관 전 총무원장 스님과도 전화 통화를 해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눴단다."

여기서 말하는 '청와대와 불교계의 원만한 관계'란 대체 무엇일까?

경찰이 촛불집회 수배자를 색출한다고 조계종 총무원장의 승용차 안과 트렁크까지 뒤졌는데, 앞으로는 뒤지지 않을 것이니, 그저 누이좋고 매부 좋게 사이좋게 지내자는 얘긴가? 왜? 무엇 때문에?

나는 아득한 시간 너머 원효(元曉)가 말한 화쟁사상(和諍思想)이 오늘 현실의 동력으로 요청되는 시점이란 말을 새삼 하고 싶다.

화쟁사상은 의사소통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다툼과 대립의 화해라는 의미보다는 모아서 서로(會) 통하게 한다(通)는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이는 이명박이 불교계에 일종의 화해 제스처로 난을 보내면서 같이 잘 지내보자는 '술책'의 차원과는 전혀 다르다.

원효가 화쟁론을 제기한 이유는 불교계만의 울타리를 허물고 일반 서민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기초로 불통(不通)에 맞서서, 민중들의 의지와 소통하라는 메시지가 본질이다. 곧 화쟁의 핵심은 곧 모이게 한다는 '회'이고 소통하다는 '통'이다. 그런데? 정작 누구와? 신임 총무원장에게 난을 보낸 이명박이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원효가 살았던 시대에서 화쟁사상이란 불교 내부나 권력의 나눔이란 문제만을 과제로 삼았던 것이 결코 아니다. 사바 세계에 사는 일반 대중들과 같이 일어나는 '기운 찬 불교'를 말한 것이다. 이 세상을 벗어날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고, 비켜 갈 수도 없는 이 세상을 사는 구체적인 대중들에게, 고통을 구원하고자 서로 부둥켜안고 힘을 모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바로 화쟁의 정곡(正鵠)이다.

원효는 중생과 부처를 나누지 않았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일방으로 희생당하는 민중의 고통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부처를 맞이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또한 사회의 모순 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민중들의 삶에서 종살이를 혁파시켜야 한다고 했다.

전국에 있는 절간에서 석가모니 부처 사상의 뿌리가 일체 만물이 본래 평등하다는 석가모니의 자각에서 시작되었음을 다시 거듭 일깨움이 원효의 화쟁이다.

따라서 중생(衆生)을 위난(危難)에서 구함이, 이를 실천하는 노력이, 곧 불교임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이 행하고 가르친 자비와 구제의 대상을 바로 오늘의 시대와 사회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자비와 주제의 그 대상은 바로 민중이고 대중이었음이 부처의 입장이 아니던가. 그래서 불교가 이타(利他)의 종교인 것이다.

오늘 나는 신부님들이 마냥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고 있음에, 신부들님이 가시밭길을 내딛고 있음에, 새삼 우리시대의 불교는 어디에 무엇으로 놓여져 있는, 어떤 것인가를 묻게 된다.

이 땅 구석구석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계시는 스님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이제 그 가르침도 대중을 통해, 국민들과 같이 동시에 일시에 '회'하고 '통'할 시각이 바로 이 시점이 아닌가. 바로 오늘 이 시간 말이다.

合掌-

프랑스 파리에서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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