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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당위, 그러나 너무 깊고 투명한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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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당위, 그러나 너무 깊고 투명한 슬픔

[김상수 칼럼] 프랑스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의 아틀리에에서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의 아틀리에가 있었던 17세기에 지은 집과 내가 머물고 있는 '파리 예술가 마을'(Cite International Des Arts)의 내 아틀리에는 직선거리로 약 130여 미터를 두고 정면으로 딱 마주 있다.

그녀의 아틀리에는 프랑스 파리 시내를 흐르는 세느 강 안에 있는 생 루이((Île Saint-Louis)섬에 강을 끼고 있는 돌집이고, 내 아틀리에는 섬 바깥 강변에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서있다.

그녀의 아틀리에가 있었던 섬을 가자면 돌다리를 건너야만 한다.

1614년에서 1635년, 이십일년 세월이 걸려 세워진 퐁 마리(Pont Marie)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으로 강을 따라 이십여 미터, 육중하고 완고한 짙은 초록색 나무문이 강을 향해 굳게 닫혀있다. 나는 그 문을 열고 들어섰다.

▲ 카미유 클로델의 20세 모습
▲ 파리 생 루이 섬, 카미유 클로텔 아뜰리에 문
▲ 카미유 클로델 아뜰리에 표식판
▲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

카미유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을 처음 만났을 때가 열아홉, 당시 로댕은 마흔 네 살로 한창 최고의 조각가로 막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열아홉의 카미유에게 세상은 아직 낯설게 보였지만 살롱전에 자기 조각을 첫 출품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큼 자기의 미술 표현세계만은 확실하게 지니고 있었다.

불과 4년 후 '사쿤탈라'(Sakuntala)로 프랑스 예술인 살롱전(Salon des Artistes)에서 최고상을 수상하기까지, 그 이전에 로댕의 조수로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 '칼레의 시민'(Les Bourgeois de Calais)등을 로댕과 같이 제작하면서부터 그녀의 조각가로 천재성은 로댕에게는 사뭇 위협적이었다. 차라리 거침이 없었다. 조각의 표현에서나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나.

로댕의 조각 '입맞춤'(1888~89)은 전체 구성과 모양에서 카미유의 '사쿤탈라'를 베끼다시피 한 것이다. 사랑의 기쁨과 고통이 두 작품 나란히 그대로다. 물론 이는 내 주관의 확증이다.

로댕 박물관 전시실에 놓여있는 카미유의 '사쿤탈라'를 보자면 로댕 박물관 전체를 흔들고 박살내고 있음이 이를 말한다.

▲ 카미유 클로델의 조각 '사쿤탈라'(Sakuntala)
▲ 카미유 클로델이 조수를 한 로댕의 조각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
▲ 카미유 클로델이 조수를 한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Les Bourgeois de Calais)

▲ 카미유 클로델 아뜰리에 입구
▲ 빛과 그늘의 음영(陰影), 카미유 아뜰리에 본관 건물
로댕이 카미유를 그저 젊은 매력적인 한 여성으로만, 또 자신을 돕는 조수나 모델로만 여기기에는 그녀의 장인(匠人) 정신은 냉철했고 또 불처럼 뜨거웠다. 로댕은 카미유를 만나자마자 일찍 얼어붙었고 그리고 화상(火傷)으로 데이기까지 했다. 두렵고 무서웠다 카미유가.

그러나 이게 카미유 인생 내내의 슬픔이다.

한 여성의 재능과 넘치는 활력을 그만 그 시대는 아직 수용할 수 없었다. 로댕의 사회적 권력은 이미 예술 그 이상이었고, 한 여성의 재능과 비교되는 자기 몰골이 너무 참담하게 여겨졌으며 무엇보다도 '여성'을 이해하는 수준이란 세속적이었다기보다는 심지어 천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프랑스 사회 분위기가 파리의 미술학교 에꼴 드 보자르(Ecole des Beaux-Arts)가 여학생을 받지 않는 실정이었으니, 뭔 말을 더하랴.

그러나 카미유는 자신의 시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예술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불가피 로댕의 미술권력과 일대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이미 시작도 하기 전에 승패가 갈렸다. 로댕과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카미유에게 자기가 입신하여 설 자리는 너무나 비좁았고 로댕과 겨누기 위한 카미유의 미술전시는 이내 실패로 끝났다. 이는 그녀의 재능과는 하등 무관했다.

카미유가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시대의 벽, 이 버거운 벽을 한 여성이 혼자서 넘어서기에는 겨웠다. 카미유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죄다 부셔버렸다. 로댕에 대한 피해의식과 편집광적인 증상이 곧 찾아들었다.

카미유는 돌집 안에서 14년간이나 서성이면서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물 같은 여자가 되기로 수없이 기도를 했지만 그녀 내면의 불덩어리는 끝내 다스릴 수가 없었다.

▲ 카미유 클로델 아뜰리에를 나와서 보는 반대편 세느 강 건너 '예술가마을' 정경
▲ 카미유 클로델 아뜰리에 앞, 세느강을 끼고 있는 길
▲ 퐁 마리 다리
▲ 세느강의 물

카미유의 네 살 아래 남동생인 시인 폴 클로델( Paul Claudel, 1868∼1955)은 어릴 때부터 누나가 조각을 할 때면 진흙을 퍼다 날랐다. 진흙을 퍼온 어릴 때부터의 동생의 작은 손은 그러나 누나를 수발하기엔 친누이의 광기가 너무 벅찼다.

1913년 3월 어느 날, 집에 있던 카미유 클로델은 갑자기 들이닥친 서너 명의 장정 간호사들에게 이끌려 구겨지듯 마차에 태워졌다.

카미유의 영혼이 종내는 정신병원으로 실려 나갈 때, 저 돌집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마차는 안개를 헤치고 강을 거슬러 끼고 달리다가 이내 왼편으로 꺾어져 퐁 마리 다리를 건넜다.

이처럼 그녀의 존재는 한사람 예술가로 당위의 존재였다.

하지만 두꺼운 시대의 한계와 그녀의 생은 마주했다. 이에 투명한 그녀의 슬픔은 너무나 깊었다.

그러나 생애를 뛰어넘어 그녀의 조각은 점점 빛을 더하고 있다.

그녀의 아뜰리에를 나와 다리를 건너 내 아뜰리에로 돌아올 때 나는 세느강을 내려다보았다. 강의 물빛은 차게 부시게 시리게 내 눈에 찼다.

파리에서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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