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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다시 '꿈틀'거립시다

[김봉준의 '한국미술 다시 중심잡기'] <하>

평화와 예술

한국에서 평화운동이 시작된 것은 오래지 않습니다. 인권탄압이 심각하던 독재시대는 인권을 탄압하는 폭력의 근원을 직시하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의 경우 극심한 국가주의 폭력, 제국주의 폭력에 기인한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의 평화운동은 전쟁과 식민지로부터 희생된 사람들의 인권운동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피해자 저항운동인 식민지지배, 전쟁 희생자 피해보상운동, 국가폭력 희생자 인권운동입니다. 이것의 가치적 저항인 제국주의 군사 주둔 반대운동, 분단극복 통일운동, 반전반핵 평화운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외부로부터 받는 폭력에 보호받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애국이 폭력을 정당화 했을 때 그 애국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되묻게 하였습니다. 인권침해, 독재권력으로 유지하는 국가의 폭력을 애국이란 미명으로 정당화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애국의 위선에서 국가주의 평화론의 한계를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침략전쟁, 국제분쟁, 핵확산 분쟁 등 그 어떤 폭력도 반평화 일뿐 결코 미화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자기 내부로부터의 평화까지 주목해야 하는 시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일상이 행복과 안정에서 멀어져 생활양식마저 위태로운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반응하는 삶의 평화, 문화적 평화를 갈망하게 됩니다. 시민의 행복추구권이 도시 광장에서 외쳐지며 촛불시위까지 만들어낸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산업평화, 가정평화, 건강과 내면의 평화 등 생활평화에 주목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심리적 관계, 문화적 성격이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생존경쟁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각종 스트레스가 만연하고 심인성 질병이 창궐하고 실업이 일상화되고 심지어는 싸이코 패스가 나오는 반평화적 생활환경이 우선 당장 발등의 불처럼 다가왔습니다. 이제 시민에게는 생활의 행복이 절실합니다. 거기다 산업시장이 국제화 되면서 노동시장이 개방되어 다민족다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농촌에 이주여성주부가 늘어나면서 원주만 해도 6000명의 이주민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민족다문화가 공생하는 평화문화는 다급한 현실과제가 되었습니다. 이것들은 한국에서 그전에는 미처 주목하지 못한 새로운 생활평화의 흐름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명평화라는 근원적 평화론이 등장합니다. 시국평화는 국가주의 한계, 생활평화는 개인주의 한계에 갇히기 쉽다는 점에서 평화의 근원적 접근을 찾게 됩니다. 현대문명의 모순을 직시하고 모순의 해결을 문명전환적 대안으로 바라보아야 진정한 평화의 도래를 희망할 수 있습니다. 뭇생명계의 우주적 순환과 순리를 거역하지 않고 우주적 질서,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평화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근원적 평화운동입니다. 생명계의 평화입니다. 십이십년 전만 해도 먹고 살기도 힘든데, 반독재 민주국가 수립도 어려운데 무슨 생명평화냐, 거들떠보지도 않던 평화론입니다. 생명평화론이 이제는 시민운동의 한 영역으로 형성될 만큼 커졌습니다. 행복한 생명권보장 요구가 거리로 터져 나왔습니다. 이 생명평화운동은 나로부터의 평화를 중시하며 국가주의 제도폭력을 반대하면서 생태공동체적 삶의 대안까지를 제시합니다.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국토개발사업을 국가권력 대리자들의 자의적 판단에 맡길 일이 아니라 시민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는 여론 형성운동과 토목건설개발 위주의 발전에 반대하며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삶의 기준을 제시하는 시민운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연파괴의 배경에는 생명과 자연을 자원으로 보는 국가와 자본의 폭력적 지배논리가 있습니다. 생명의 평화 없이 내 삶의 평화가 없고 나로부터 평화 없이 세계평화 없다고 강조합니다.

아무튼 사회평화이든, 생활평화이든, 생명평화이든 평화에 대한 갈망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다차원적 평화의 갈망이 동시진행적으로 일어납니다. 어느 가치를 우선시 하는가에 따라 같은 평화라도 다르고 평화의 스펙트럼은 넓어졌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어디에 가치중심을 두고 사는 것이냐에 따라 평화의 관점은 넓고도 깊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가치를 지향하는 평화에 대한 갈망이 방법론이 다르다고 하여도 평화는 최상위의 가치입니다. 인간도 생명도 모두 평화롭게 살고 싶어 태어났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는 인간만의 가치가 아니고 범생명의 본성적 질서입니다. 그러나 범생명계는 모두 자기욕망을 100% 충족시키지 못하며 종의 경쟁과 조화를 이뤄야 하는 역동적 질서 속에 있습니다. 범생명의 평화는 곧 우주적 질서입니다. 내 몸 안에 생명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내 몸 속의 자연을 발견하는 것이고 우주적 질서를 따르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는 근대적 이성주의로 이해되는 협소한 개념이 아닙니다. 이성 감성 영성이, 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작용하는 내 몸 안의 자연, 우주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 평화입니다. 내 안의 자연을 발견하는 것은 곧 평화의 내면이고 내 밖의 사회에서 본성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은 평화의 외면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평화는 내 존재의 질서, 혈연공동체의 질서, 사회적 질서, 자연 생태계 질서, 우주적 질서를 모두 함의하는 것입니다. 에너지 파동, 식량위기, 쓰나미 현상만 보더라도 자연과 사회는 한 지구별의 일로 자연의 평화가 사회와 결코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사회적 평화와 자연의 평화는 우주만물평화의 양면입니다.

가장 중심적 질서는 우주적 질서입니다. 생명평화의 질서도 우주적 질서의 내포 개념입니다. 생명은 무생명으로부터 나와서 잠시 살다가 다시 무생명으로 돌아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존재는 비존재의 자식입니다. 있음(生命)은 없음에서 잠시 나왔다가 없음(無生命)으로 돌아가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생명이 무상하다 함은 이를 두고 말합니다. 꽃은 피면 지고 달도 차면 기운다는 시적 감회가 생기는 것도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려는 평화의 자각입니다. 우리가 조금 후면 비존재, 무로 돌아간다는 자각 없이는 참 평화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생명의 존재론적 집착은 타생명에 대해 배타적으로 나타납니다. 본래 생명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 공생하다가 다른 생명에게 살 자리를 양보하며 자리를 비워주는 유한 존재입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누워야 하는 것이고 살 자리를 보고 자기 자리인가 확인하고 때되면 떠나는 것이 생명의 질서입니다. 생명의 자리를 파괴하고 생명의 거처인 무생명계 마저 파괴하려는 산업문명주의는 결국 모든 평화를 파괴할 것입니다. 생명평화론은 무생명과 생명의 순환적 질서를 늘 염두에 두지 않고는 존재론의 한계에 빠지고 맙니다. 생명존재의 질서가 평화가 아니고 무상(無常)의 순환질서가 평화입니다. 무생명계를 인류는 '어머니 대지'라고 은유적으로 부르며 생명이 돌아갈 자리로 본 것은 인류의 오랜 위안이고 지혜였습니다. 무왕불복(無往不復), 없음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거듭나지 못합니다.

예술의 진수도 무상의 질서인 평화를 미적으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예술의 정수는 인생이 무상하기에 지금이 더 없이 소중한 아름다움의 자작입니다. 때로는 슬프고 후회되고 초월적이고 싶고 생명에 대한 연민이 생기는 감정들은 무상성을 자각하며 이를 미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예술입니다. 예술의 정수는 인류가 평화를 갈망하며 평화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상징형식입니다. 종교, 언어, 통과의례, 예술, 놀이는 인류가 만든 상징형식들인데 이중에 가장 영혼과 감성의 도그마를 갖지 않으려 노력 해온 것이 놀이와 예술입니다. 갈등의 사회에서 우리가 자꾸 놀이와 예술에 기대를 거는 것도 갈등을 융합하고 대극을 통합하는 사랑과 화해의 힘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빛> 1995년 과슈 160x210cm @김봉준

<야행> 1993년 유화 190x120cm @김봉준

<살림평화> 세계생명문화포럼 상징화 2005년 @김봉준

<짚 한오라기> 1998년 목판화 @김봉준

<숲 넘어 가는길> 1998년 붓그림 @김봉준

평화의 자각, 영혼의 빛

시장만능주의를 일찍이 경고 했던 칼 폴라니는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유토피아"라며 "그런 제도가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가 마를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경제사적으로 볼 때 자유방임시대 역시 국가에 의한 계획의 산물로서만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시장경제가 지구촌을 대표하는 유일한 경제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탓에 시장경제에 이로운 것이라면 사회에도 이로운 것이라는 일종의 등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시장은 사회와는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기제를 거침없이 발휘하게 되고 무절제한 이윤추구와 그에 따른 공황이 발생한다고 폴라니는 보았습니다. 지금 바로 세계금융위기는 극단에 이르러 자신과 함께 사회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킬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비시장사회의 영역을 최소로 축소하고 '만물의 상품화'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헌법 1조는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는 데 국민의 여론은 수렴 되지 않고 거대언론이 여론을 교란합니다. 시민이 아무리 광장에서 100만이 모여 여론을 만들려 해도 무시합니다. 경제와 정치와 언론권력의 유착으로 여론을 호도합니다. 정치인들은 한술 더 떠서 여러 가지 정치공학적 전술을 사용합니다. 언론은 여론을 조작하고 지배합니다. 돈은 언론을 움직이고 자금을 댑니다. 시장경제에 이로운 것은 사회에도 이롭다는 논리의 첨병에서 서서 경제권력을 보호하는데 앞장서 있습니다. 대형언론사의 언론은 기획된 소비상품입니다. 시민이 가공되는 여론을 피해 언론자유권을 찾겠다는 것이 이번 언론법 개정사태의 본질이어야 합니다. 표현과 소통의 자유권을 시민이 어떻게 실체적으로 행사하느냐가 관건입니다. 미술도 표현의 자유를 찾으려는 시민권과 분명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의 이야기가 마무리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미술 다시 중심잡기'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창조적 영혼입니다. 내 몸 속에서 자연(우주)가 있어 내 몸과 물(物)사이를 소통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감지됩니다. 몸은 희로애락을 감지하고 다스리는 미의 중심입니다. 촛불, 지못미, 미선효순양 추모제 등에서 계속 나타난 것은 몸의 소통을 갈망하는 현상입니다. 예술은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리비도- 만족(필요)를 행해 끝없이 움직이는 몸의 에너지, 욕망과 관련됩니다. 너와 나, 생명과 생명, 없어짐과 살아있음, 생명과 무생명 사이에서 욕망의 에너지가 오갑니다. 각종 스트레스, 히스테리, 욕구불만이 증대하는 현대사회는 욕망은 왜곡됩니다. 그렇다고 지식정보화시대로도 안주하지 못합니다. 나와 세계 사이 에너지의 소통에서 충족감이 생깁니다. 영성은 욕망을 사랑과 화해로 소통하는 차원의 에너지 현상입니다. 욕망의 갈망을 사랑과 화해로 사회화하는 것이 영성의 사회입니다. 종교는 도그마로 인하여 그 해답을 줄 수 없으며 이념은 이성으로 남을 가르치려는 계몽주의로 인하여 미래의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미래의 행복한 사회란 욕망의 충족을 존중하되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사회, 사랑의 사회화가 회복된 사회입니다. 자아와 세계 사이에 영혼이 소통하는 것을 믿는 물질과 영혼의 조화시대, 신화와 과학이 조화하는 재신화(Remytholyzation)의 시대로 가는 것은 인류미래입니다.

2. 개체중심 융합입니다. 지도부 없는 촛불시위를 작년에 올해에도 보았습니다. 경찰이 배후세력이 누구냐고 붙들고 묻자 '우린 없어요, 인터넷으로 모였어요, 굳이 있다면 대통령이에요'라고 답하여 주변사람들을 한바탕 웃긴 적이 있습니다. 이념적 교조에 시민이 영향 받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인터넷 넷트워크로 자기조직화하며 참여자 개체가 광장의 주인인 직접민주주의 형식을 창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아고라 등 싸이버 공간은 직접민주주의 공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화수요자가 아닌 자기 조직화로 스스로 창조자가 되려고 합니다. 아직도 시민을 조직하고 계몽하려는 개혁진보정치세력에게 별 흥미를 느끼려 하지 않고 번개팅으로 모여서 놀며 투쟁하고 즐기다 흩어집니다. 광장에서 스스로 만드는 직접 참여문화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즐기고 서로 나누고 놀 거리를 찾아서 모입니다.

3. 평화의 가치입니다. 정권폭력도 시위자 폭력도 반대합니다. 애국, 단체란 이름의 집단의 폭력을 넘어서는 인권과 생명권, 순환질서를 평화의 가치로 소중하게 앞세웁니다. 수입 소고기반대 등 건강한 먹을거리를 바라고,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지키려는 생활평화, 토건족 만 부자로 만드는 4대강 개발을 반대하는 생명평화, 실업자와 비정규직 해소를 바라는 산업평화, 심리적으로 행복한 자아의 평화가 범국민적 갈망이 되었습니다. 평화의 주제를 담는 소통의 형식은 당연히 말과 문학과 예술과 의례와 토론형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화를 평화의 가치로 다시 짜고 재조직화 하려는 평화문화시대에 이미 와 있습니다. 정치권력을 평화의 형식으로 짜는 것 못지않게 더 큰 숙제는 경제권력, 언론권력을 평화의 형식으로 짜는 숙제입니다. 세계 신자유주의의 몰락에 따른 대안 경제체제의 모색이 세계적 화두입니다. 지역공동체 네트워크, 생활협동체, 호혜시장 공정무역, 지역화폐, 국가복지, 저 탄소녹색시장, 사회적 기업, 독립 언론. 교육주권 등 경제권력에 대안경제로 맞서는 평화경제와 평화예술의 동행이 절실한 때입니다. 경제평화운동의 가치 중심이 평화라면 문화예술도 평화가치의 연대로 가는 큰길에서 기꺼이 만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 한 여러 가지는 이야기를 두 마디로 요약하면 미술과 평화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펼쳐온 미술운동 30여년은 자부심을 갖기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나와 시대와 역사에 대한 자각으로 시작하여 평범한 진리인 인권과 생존권에 대한 자각, 삶은 던져서 예술인으로 참여한 민주화 운동, 나아가서 생명과 평화와 영혼에 대한 치열한 각성에 이르는 기나긴 성찰의 예술운동이었습니다. 그 운동의 중심가치에 평화가 있었음은 이제 명백해 졌습니다. 삶의 평화가 그리 간단치 않아서 사회평화, 생활평화, 생명평화, 우주평화에 이르는 평화론이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있음(생명)도 없음(무생명)으로 돌아가는 우주의 순환을 자각할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자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융평(隆平), 세계인류가 성숙한 평화문화를 성취하는 것이 평화미술의 미적 목표입니다.

우주(자연)의 순환을 자각하는 평화로 가는 길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자아, 이웃, 사회, 민중, 자연, 역사, 생명, 평화, 우주… . 어느 화두를 택하든 그건 작가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를 서로 소통하고 순환하는 영혼으로 본다는 관점의 대전환은 이제 미학적 결단의 문제입니다. 영혼은 자아와 세계가 순환하고 소통하고 있는 우주의 숨결입니다. 영혼를 회복하는 문명전환의 시기입니다. 영혼은 다른 말로 기, 에너지, 숨, 아우라, 신, 귀신 등 표현은 달라도 사이, 관계망의 상징어입니다. 인류가 만든 무늬, 문채, 상형, 형상 등에는 오랜 시각적 상징도 여기 포함합니다. 인류족들은 문화적 표현이 다를 뿐 오랜 옛날부터 영혼을 신성한 힘이라고 여겨 왔고 신성한 상징을 향한 의례는 계속 되어왔습니다. 상징으로 은유된 영혼은 나와 너 사이, 인간과 생명 사이, 생명과 생명 사이, 생명과 무생명 사이를 소통하는 그 무엇입니다. 무상의 평화 질서를 소통하는 영혼이 예술정신의 본령입니다.

칼 융은 영혼을 인간의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와 생명의 원리로 작용하는 실체로 보고 정신과 다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① 스스로 자발적인 운동과 활동을 하며 ② 이러한 감각적인 지각에 의존하지 않고 이미지를 산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③ 이미지들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따라서 영혼은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영혼의 활동을 통하여 창조적인 능력을 부여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실체로 잡히지는 않는다 하여도 그런 것 같습니다. 창조란 좁은 의미의 인간의 능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창조란 인간의 지극정성이 우주에 닿아 하늘이 감천하는 영혼의 빛입니다.

자유로운 영혼을 찾지 못하면 예술은 천박한 카피나 한갓진 추상론에 빠지고 맙니다. 자유로운 영혼이란 자아와 세계 사이를 소통하고 있다는 신화적 세계관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의 현재화, 즉 재신화하는 삶입니다. 예술은 재신화화의 상징형식을 새롭게 창작으로 제출하는 것입니다. 예술은 초월이라 말하기에는 너무도 육신의 영혼이 빛나는 것이고 삶의 반영이라 말하기에는 비범한 상징입니다. 예술은 평화의 빛으로 충만한 신성한 힘입니다.

우리 다시 꿈틀거립시다. 이 비좁고 천박한 근대주의 예술관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자유로운 영혼이 빛나는 예술인이 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인은 자유로운 영혼이 빛나는 미술인이 되기까지 시련과 수행을 감내해야 하는 구차한 운명을 타고 난 자라는 사실입니다. 한국미술은 다시 중심 잡을 것이라고 나는 꿈꿉니다. 시장만능주의가 자행하는 반평화주의를 넘어 생명과 무생명이 순환하는 평화의 빛이 됩시다. 영혼의 빛으로 밝히는 영혼평화문화가 멀지 않은 미래의 문화가 될 것입니다. 예술은 인류문명사에서 최초이자 최후까지 영혼의 가치를 화두로 잡는 마지막 존재입니다. 지금 우리는 시민광장에서, 생활의 행복추구 공간에서, 생명평화 파괴를 반대하는 운동에서, 풀뿌리 사회운동에서 평화의 진화를 보고 있습니다. 시민들 스스로 평화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세계 창조의 원천에 평화의 빛이 있음을 예감합니다. 한국의 촛불은 평화의 빛이었습니다. 한국미술은 평화의 빛을 밝히는 문채가 되어 영혼평화미술로 거듭날 것입니다.

늦은 시간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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