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민주주의의 門, 조국통일의 門, 한일우호의 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민주주의의 門, 조국통일의 門, 한일우호의 門

[와다 하루끼 추도사] 김대중과 한반도, 동북아

김대중이라는 이름의 한국의 민주주의자, 야당정치가의 존재를 우리가 처음 알게 된 것은, 1973년 8월 8일 김대중 선생이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였다. 우리들은 그의 육성을 잡지 '세카이(世界)'에 실린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편집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들었다. 실은 '세카이'에 김대중 선생의 글이 실린 것은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보다 1년 반 전인 1972년 3월호에 '통제되지 않는 권력은 악이다'라는 제목으로 그의 글이 실린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의 우리에게 그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글을 쓴 본인이 납치당해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접한 그의 말들은 상당히 강한 인상을 주었다. 민주주의를 끝없이 갈구하는 강한 신념의 정치가의 모습을 일본에서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대중 선생은 그때에도 살해를 당할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났다. (그를 납치해 바다에 수장하려 했던) 배 위를 날아다니던 비행기가 어느 나라의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납치범들이 해상에서 선생의 살해를 단념한 것은 확실하다.

그 후 우리들은 (일본에서) '김대중 씨의 원상회복을 위해'라는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그것은 한일양국 정부의 정치결착으로 불가능해졌다. 김대중 선생은 한국에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하고, 체포당하고, 투옥당하면서 싸움을 전개했다. 그동안 김대중 선생을 향한 일본인의 관심은 지속되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 당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 8일 오후 일본 도쿄에서 머물던 김 전 대통령을 납치했다.
사진은 피랍된 지 5일 만인 1973년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자택에 돌아와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 ⓒ연합뉴스

하지만, 김대중 선생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선생이 1980년 5월의 쿠데타로 체포당해, 군법회의(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때이다. 김대중 선생을 없애려한 자들은 김대중 선생에 대한 신원조사를 하고, 정치활동 경력에 허위사실을 섞어가면서 폭로하는 전술을 택했다. 일본에 있는 우리는 사태의 심각함을 느끼고, 김대중 선생의 연설집 '민주구국의 길'을 출판했다. 그리고 지하의 루트를 통해, 생사의 갈림길에 선 김대중 선생이 군법회의에서 토한 말들이 전해져, 일본을 통해 전 세계에 전해졌다.

사형을 구형받은 군법회의 제1심 최종진술에서 김대중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국이 나에게 형을 집행하려 한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과연 법의 정의를 따른 것인지, 심사숙고해 주기 바란다. 나는, 나에 대한 관대한 처분보다 다른 피고들에 대한 관용을 바란다.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형의 책임자는 나이기 때문이다.

(중략)

이틀 전 구형을 받았을 때, 나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의 마음은 평온했다. 그리고 그날은, 공판정에 다녀왔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평소보다 깊이 잠들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천주교 신자로서, 신이 원하신다면, 이 재판부를 통해 내가 죽을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이 재판부를 통해 나는 살아남을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앉아계시는 피고들에게 부탁한다. 내가 죽더라도, 두 번 다시 이러한 정치적 보복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다"

폭력에 맞서는 빛나는 정신이 여기에 표현되어 있었다. 이 말들을 접한 사람들은 그 마음이 감동에 젖었다. '김대중 씨를 죽이지 말라'는 목소리가 일본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당시 다음과 같이 썼다.

"이상주의적이면서도 현실주의적인, 민족주의적 민주주의적 천주교 신자로서 이 정치가는, 커다란 모순을 안고 분열되어 있는 한국 국민을 단결시키고, 민주주의를 통한 국가 건설과 민족의 통일이란 거사를 향해 정열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한 정치가이다. 그 국민들이 지금 김대중 씨를 잃는다면 그것은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을 잃었던 일 이상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 국민을 포함하여,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모든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크나큰 타격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한국 내의 소리 없는 소리도 (그의 구명을 위해) 움직였다고 믿는다. 레이건 대통령도 움직였다. 일본의 스즈키(鈴木) 수상도 움직였다. 그리고 김대중 선생은 이때에도 살아났다. 사형판결의 최종 확정을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감형된 후 감옥에 있는 동안 선생은 이희호 부인과 자식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 복사본이 천주교 신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고 우리는 그것을 번역해,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을 통해 <김대중 옥중서간(金大中獄中書簡)>이라는 제목으로 1983년에 출판했다.

김대중 "나의 역사적 사명은, 닫혀있는 문을 여는 것"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에 선생은 석방되어 출국해 미국에 있었다. 선생은 미국에서 이 책의 서문을 보내왔다. 거기에 선생은 "우리나라에서의 나의 역사적 사명은, 닫혀있는 문을 여는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썼다. 열려야 할 첫째 문은 "지금 견고하게 닫혀져있는 민주주의의 문"이다. 두 번째 문은 "육천만 민족이 꿈에서도 잊지 못하는 조국통일의 문"이다. 그리고 선생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도 나는 문을 여는 역할을 맡고 싶다"면서, "나는 일본의 여러분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인해, 다른 한국인보다 더 일본인과의 사이에 마음의 공감대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썼다.

<옥중서간>은 한 장의 편지에 자신의 생각을 전하겠다는 놀랄 정도의 집중력을 보여준다. 그 내용엔 자기반성과 전진 및 향상을 향한 강렬한 의욕이 전해진다. 해설의 끝맺음에 나는 이렇게 썼다. "한국 국민은 계속되는 고난 속에 있지만, 이러한 정치가를 가진 한국국민의 가능성에 나는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다."

내가 김대중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12월 미국 워싱턴에서였다. 나는 국립문서관(National Archives) 계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된 시간에 커다란 자동차가 멈춰 섰고, 그 자동차 안에 김대중 씨가 있었다. 그때 이미 김대중 씨는 한국으로의 귀국을 강행할 생각이었다. (김대중은 85년 2.12 총선 나흘 전에 귀국했다: 역자)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개의치 않고 노력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그에게 다시 한 번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선생이 귀국하려고 하자, (역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려 했던 필리핀의 야당정치가) 베니그노 아키노 씨가 마닐라공항에서 암살 당한 전례 때문에 그의 귀국 강행을 우려하게 된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미국에서부터 그를 동행했다. 나의 친구인 커밍스(Cummings) 교수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우리들은 천주교 신자와 함께, 나리타공항에서 일본정부의 위임을 받아, 김대중 선생 일행을 맞이했다. 그날 밤 호텔의 한 방에서 '세카이'의 편집장이었던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씨와 나는 선생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불안한 하룻밤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무사히 귀국했고, 그 후 1987년 6월 민주혁명의 승리까지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민주화운동의 국면이 비폭력 직접행동을 통한 군사정권 퇴진의 실현에서 대통령선거를 통한 변혁으로 진전된 뒤, 김대중 선생은 두 번의 선거에서 패하고, 세 번째 도전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 나는 그것이 필연적인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했다. 한반도 평화를 향한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연합뉴스

그리고 '민주주의의 문'을 연 김대중 선생은, 아직 '조국통일의 문'이라고 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남북의 화해와 공존, 협력의 문을 열었고, 한일관계의 문까지 열었다. 망명지에서 옥중서간집의 서문을 쓰면서 다짐했던 것을 대통령이 된 후 실현한 것이었다. 그것은 놀라운 성공이었다.

"그가 열어제친 門을 다시 닫는 것은 불가능할 것"

어제(20일) 시청 앞 광장 분향소 앞에서 애도를 표하는 시민의 대열을 보며 내가 느낀 것은, 김대중 씨는 고난 속에서 성공을 쟁취한 한국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한국인의 지혜와 용기와 굴하지 않는 씩씩함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 지혜와 용기와 씩씩함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분명 김대중 선생이 마지막으로 입원했을 때, 선생이 보아야 했던 동북아시아의 현실은 위기적 상황이었다. 2000년 6월, 선생의 평양방문으로 열렸던 새로운 시대는 어디에 갔는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입원 전 선생의 집을 방문해 조언을 얻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고, 현정은 회장이 그 뒤를 이어 문이 열렸다. 선생의 서거로 북한의 조문단이 서울에 왔다. 선생의 장례식은, 김대중 선생이 열어제친 문을 거꾸로 들어가서 다시 낡은 세상으로 돌리는 일, 즉 선생이 열어제친 문을 닫는 일은, 이 한국 땅에서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이 지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확인시켜 줄 것이다.

(번역: 박지형)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