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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원봉사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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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원봉사자의 고백

[한윤수의 '오랑캐꽃']<118>

2년 전 "자원봉사자는 옆에만 있어도 힘이 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정말로 자원봉사자는 옆에만 있어도 힘이 될까? 그렇다!
예를 들어 외국인 노동자가 노동부에 출석할 때 누구라도 옆에만 있어주면 힘이 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자원봉사자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옆에 서있기만 하면 되니까.

우리 센터의 자원봉사자 중 최고 연장자는 67세의 L선생이다. 그는 처음에
"귀도 잘 들리지 않는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며 망설였다. 하지만 나는
"그냥 옆에만 계셔도 되요."
하고 봉사자로 모셨다.

그는 서울에 있는 명문 사립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한 분이다. 영어를 잘하지만 노령으로 청력(聽力)이 약하여 통역일은 거의 못 보고, 주로 차량 운전으로 우리를 도와주었다. 외국인 노동자가 부천, 성남, 인천, 천안 등지의 노동부에 출석할 때 자신의 차로 우리 직원과 노동자를 태워가고 태워오고 하는 궂은일을 맡아준 것이다. 더구나 그의 차에는 내 차와는 달리 내비게이션이 장착되어 있어서 초행길에서 헤맬 염려가 전혀 없었다.

또한 부득이하게 우리 직원이 바빠서 노동부에 직접 못 갈 때에는 혼자서 노동자를 데리고 출석했으므로 그분은 우리 직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담에, 통역에, 운전까지 하는 만능 직원!

L선생은 일 년이 넘게 그렇게 운전으로 봉사했다. 그러다가 관계가 좀 서먹해지는 계기가 생겼다. 직원들의 요청으로 내 차에 네비게이션을 달았기 때문이다. 13년 묵은 고물차에 내비게이션을 달아봤자 별 볼 일 없지만, 다만 L선생의 차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L선생의 발길이 뜸해지더니 몇 달 전부터는 아예 끊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며칠 전 L선생이 화성중앙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미끄러운 풀밭에서 넘어져 다리뼈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나에게 알리지 않고 14일을 견뎠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나에게 연락할 일이 생겼다. 산재를 당한 옆 병상의 중국 동포 노동자가 퇴원하면 당장 잘 데가 없다며 도와달라고 징징 울었기 때문이다. L선생은 그를 달랬다.

"울지 마. 화성센터에서 도와줄 테니까."

그의 전화를 받은 것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빗속을 뚫고 달려가니 L선생은 기브스를 한 채 현관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좀 말라 있었다.

중국 노동자의 일은 아주 간단한 문제라 가볍게 처리하고 나서 L선생과 나는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야외 정원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얘기꽃을 피웠다. 아마 한 시간쯤 얘기했을까? 그가 뜻밖에도 아주 독특한 고백을 한 것이다.

"목사님, 내가 이 병원에 와보니 거의 반 이상이 산재 환자들입니다.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그리고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공장에서 다쳐 팔다리 부러지고 손가락 짤리고 발가락 뭉개지고. 지금 제 입원실 환자 9명 중에서 5명이 산재환자인데요. 여기가 비로소 세상의 중심이고 내가 중심에 서있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고, 그 물건을 생산하다 다치고, 일한 댓가를 주니 못 주니 하고 싸우고, 여기가 세상의 중심이지, 밝고 화려한 서울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근로자들만 그런 게 아니죠. 나는 지금까지 사장님들은 다 신수가 훤하고 팔자가 편한 분들인 줄만 알았어요. 사장님들은 별 고생 안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 보고서야 사장님들이 무지하게 고생하는 줄 알겠더라구요. 하청 못 받을까봐, 납기 못 맞출까봐 근로자들 일 시키고 월급 못 줄까봐, 부도날까봐 노심초사하고 말 안 듣는 근로자들이랑 싸우고. 무척 고생하더라구요. 그러고보니 서울에서 산 몇 십 년이 헛 산 거고, 여기 와서 산 3년이 진짜로 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는 철학자가 되어 있었다.
자원봉사를 일 년쯤 하다 보면 철학자가 되는 걸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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