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방문했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5일 북한의 특별사면을 받은 미국인 여기자들과 함께 무사히 귀환하면서 미국인들의 영웅이 됐다.
<뉴욕타임스>는 "이로써 클린턴은 대선 레이스에서 자신의 부인을 물리쳤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대신해 외교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세계무대에 다시 한 번 이름을 날렸다"고 평했다.
지난 3월 북-중 국경지역에서 불법입국 혐의로 북한에 구속된 로라 링(32) 기자와 유나 리(36) 기자는 이날 오전 5시 50분(현지시간) 클린턴 전 대통령이 탄 전세기 편으로 로스앤젤레스 부근 버뱅크의 밥호프 공항에 도착해 가족들과 감격적으로 상봉했다.
세계의 주요 언론들은 이 소식을 일제히 톱기사로 다루며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성공을 평가하는 한편, 이번 일이 북미관계 개선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클린턴 방북을 계기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재를 과시한 북한은 지난 5월 핵실험 이후 이어진 제재국면을 대화국면으로 바꿀 수 있는 외교적 돌파구를 마련하게 됐다. 북한과의 적극적인 대화를 주장해 온 미국 내 협상파들도 여론의 우위를 점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 유나 리가 딸과 남편을 만나 감격해 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로라 링 가족 상봉 장면 ⓒ로이터=뉴시스 |
"문을 열고 가보니 클린턴이 서 있었다"
클린턴과 여기자들을 태운 전세기는 공항 활주로에 도착한 뒤 가족들과 취재진이 대기중이던 격납고로 이동했다. 그리고 유나 리와 로라 링은 순서대로 비행기에서 내려 대기중이던 가족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기자들이 가족과 재회한지 5분 쯤 지나 박수를 받으며 수행원들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렸고, 여기자들의 소속 방송사인 커런트TV의 설립자인 앨 고어 전 부통령과 포옹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고어 전 부통령은 여기자와 이들의 가족들과도 일일이 악수하고 인사를 나눴다.
이어 취재진 앞에 선 로라 링은 "북한의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해준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그의 수행팀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로라 링은 "북한에서 매 순간마다 우리가 노동교화소로 보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으며 갑자기 누굴 만나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면서 "모처로 이동한 후 문을 열고 걸어들어가는 순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그 순간 그동안의 악몽이 마침내 끝나고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클린턴 일행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며 "최고로 멋진 팀"이라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 및 북한에서 영사 업무를 대행했던 스웨덴 대사관 관계자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는 또 "지난 140일은 저희의 삶에서 가장 힘들고 가슴 아픈 시간들이었다"면서도 "북한 정부가 사면을 허용해준 데 대해 매우 감사하게 여기고 있으며 집으로 돌아오게 돼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 로라 링 기자의 기자회견 장면. 그의 왼쪽으로 '커런트 TV' 설립자인 앨 고어 전 부통령이 서 있다. ⓒ로이터=뉴시스 |
클린턴 전 대통령은 현장에서는 별도로 입장을 내놓지 않았으나 뉴욕 소재 클린턴재단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여기자들이 석방돼 대단히 기쁘다"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재회는 가족들뿐만 아니라 전체 미국의 기쁨"이라면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앨 고어 전 부통령의 탁월한 노력에 모든 미국 국민이 감사해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두 기자가 안전하게 특별기에 탑승해 귀국길에 오른 뒤 기자들의 가족과 통화했으며, 석방 교섭을 벌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도 통화했다고 소개했다.
'개인 활동' '핵 문제와 별개' 강조, 왜?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 등 오바마 행정부의 관계자들은 클린턴의 방북은 개인 차원의 일이었고, 그가 여기자들의 불법행위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사과했다는 북한 방송의 발표는 틀린 것이라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이들은 또 클린턴 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오바마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았고, 여기자 석방은 인도주의적 문제일 뿐 핵·미사일 등 북미 정치 현안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이 같은 태도는 '북한에 고개를 숙였다'는 미국 내 보수파의 반발과 한국 및 일본 정부의 입장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케냐를 방문중인 힐러리 클린턴 장관은 <NBC> 방송에 출연해 남편인 클린턴과 김정일 위원장의 장시간 회담이 북핵 문제의 전기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것은 이번 방북의 목적이 아니었다"면서 "분명히 이번 방북은 우리가 기대할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북핵 문제는 오바마 행정부가 공식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라고 강조한 그는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하길 희망한다. 그들은 아마 비핵화를 논의하기 위해 6자회담의 틀 안에서 우리와 대화하려고 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기브스 대변인도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북한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북한이 스스로 참여했던 합의들과 책임에 따라 행동할 때이고, 그것은 북한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뉴욕타임스 인터넷판 보도 ⓒ프레시안 |
▲ BBC 인터넷판 보도 ⓒ프레시안 |
美 언론들은 '정치적 해석' 주류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클린턴 전 대통령은 여기자들의 석방을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외교 채널을 열었다"고 평가해 이번 일이 북미관계 개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 신문은 특히 힐러리 클린턴 장관이 <NBC> 회견에서 '최종적으로 남편에게 방북을 요청한 곳은 백악관이었다'고 밝혔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개인 차원의 활동'이라는 오바마 행정부의 입장을 뒤집었다.
신문에 따르면 클린턴 전 대통령은 방북에 앞서 오바마 대통령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보좌관과 접촉해 대책을 논의했다. 앨 고어 전 부통령도 공항 기자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행정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석방에 관여했다"고 밝혔다.
한편 시사주간지 <타임>은 클린턴의 이번 방북에서 분명해진 것은 "(건강이상설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이 정상적로 활동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라는 서울 주재 미국 외교관의 말을 전하며, 김 위원장이 이번 일을 계기로 북한을 외교적 궁지에서 빼내려 하고 있다고 전했다.
<타임>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다음 외교 미션은 무엇인가?'라는 온라인 설문을 진행하며 △이란에 구속된 미국인들의 석방 △버마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 석방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상 재개 등을 보기로 들어 이번 방북의 비중을 짐작케 했다.
▲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넷판 ⓒ프레시안 |
▲ 일본 요미우리 신문 인터넷판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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