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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수의 '오랑캐꽃']

하고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하다 보면 생긴 것도 비슷비슷하고 그가 갖고 있는 고충도 비슷비슷해서, 방문하는 사람이 죄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지는 시기가 온다. 사람을 보는 시각이 소위 천편일률로 흐르는 것인데 사실 이게 굉장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냥 상담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사람을 상담의 대상으로만 보면 인간이 물건 같아지므로 그 사람이 누구냐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어진다. 이러면 그 사람을 제대로 도울 수 없다.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돕나?

먼저 그 사람이 누군가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아나?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사람의 이력(*Life History)을 살펴보는 것이다. 고향이 어디냐? 고국에서 뭐 했느냐? 공장에서는 무슨 일을 하(했)느냐? 사장님은 좋으냐? 발안까지 뭐 타고 왔느냐? 고국에 돌아가면 무슨 일 하고 싶냐? 요런 잡다한 이력을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구별되게 하는 특성이니까.

물론 상담자는 시간이 없으므로 이런 이력을 다 물어볼 수는 없다. 다만 한두 가지라도 물어보면 그 사람의 그림이 어느 정도 그려진다. 이래야 진짜 상담이 이루어진다.

화성지역에 250밀리의 폭우가 쏟아지던 일요일.
캄보디아인 4명이 아까부터 와서 면담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상담으로 계속 바쁜데다가 하필이면 그날 신입 직원 면접까지 봐야 했기에 그들은 너무나 긴 시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먼데서 온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상담을 해줄 걸. 하기야 그런 줄 알았나?

내 볼 일 다 보고서야 그들을 불렀다.
"캄보디아 4명 이리 와요."

4명은 모두 얼마 전까지 부산의 공장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로서 지금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일하고 있다. 사봉은 평택에서 일하고, 란피치는 안산에서 일하며 나머지 2명, 말린과 보타나는 충남 공주에서 일한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오늘 우리 센터에서 재회한 것인데, 평택이나 안산은 비교적 가까운 곳이라 괜찮지만 충청도 공주는 너무 멀어서 미안한 생각이 든다.

"공주에서 어떻게 왔어요?"
"공주에서 천안, 천안에서 오산, 오산에서 발안, 이렇게 버스 세 번 타고 왔어요."
"시간 많이 걸렸겠네요."
"아뇨, 2시간 15분밖에 안 걸렸어요."

▲ 공주에서 온 말린(왼쪽)과 보타나ⓒ한윤수

폭우 속을 뚫고 달리는 버스 차창에 기대앉은 그들의 그림이 비로소 눈에 잡히니 밀린 월급을 꼭 받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운전할 때 졸리면 먹으려고 사둔 뻥튀기를 권했다. 나를 포함하여 모두가 뻥튀기를 먹는데 공주에서 온 말린은 안 먹는다.

"나 그런 거 안 먹어요."
다시 탁자 위 바구니에 있는 홍삼사탕을 권했다.
"이거 한국 인삼 들었어. 좋은 거야."
말린은 못 이기는 체 비로소 홍삼사탕을 까서 먹는다. 몇 가지를 더 물었다. 부산에서 어떻게 지냈나 알기 위해서다.

"(부산) 사장님 좋아요?"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좋아요."
사장님이 좋다면 돈 받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다.
"그럼 왜 돈 안 줘요?"
똑똑한 사봉이 대답한다.
"부산 일거리 없어요. 회사들 문 닫는 데 많아요."
부산 사정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걸 보니 이해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나는 돈 받는 절차를 설명해 주었다.
"늦더라도 사장님이 돈 주면 괜찮아요. 돈 안 주면 시간 많이 걸려요. 부산 노동부 멀어요. 우리 부산까지 가기 힘들어. 대전까지는 가는데!"
그들은 웃었다. 부산이 멀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리가 못 가면 부산에 있는 센터에 부탁할 게요. 괜찮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의 손을 잡고 일일이 부탁했다.
"공주는 머니까 *말린과 보타나는 가끔 오고, 안산은 가까우니까 란피치는 심심하면 놀러 오고, 평택은 아주 가까우니까 사봉은 다음 일요일에 꼭 한 번 더 와요. 주중에 사징님과 전화해볼 테니까. 알았죠?"

그들은 안심한 듯 펴진 얼굴이 되어서 떠났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그들을 이해했고 그들도 나를 이해했다.
비로소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Life History : 인류학 용어로 보통 인생사라 번역한다. 상담에서는 그다지 거창한 것을 묻는 게 아니므로 간단히 이력이라고 번역했다.

*말린과 보타나 : 가장 멀리 떨어진 공주에 있는 두 사람이 그 다음 주에도 놀러왔다. 급여명세서를 가지고. 위의 사진은 이때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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